제22장 국운(國運) 5
한편 신라 여주 덕만은 이즈음 이름 모를 괴질을 앓아 군신들 사이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보위에 오른 지 햇수로 5년, 그사이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한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당으로부터 부왕의 봉작을 이어받고,
용춘과 수품을 각 주와 현에 파견하여 민심을 안정시켜가던 그였다.
전조에 유례가 없던 여주의 등극으로 일부 신하와 백성들 사이에 동요가 아주 없었던 바는 아니었지만
덕만은 용춘을 전면에 내세우고 민심을 다스릴 만한 잇단 정책들을 발표하여 덕과 신임을 쌓아가고
있었다.
특히 반란에 가담했던 비담과 염종을 처벌하지 않은 것과 백반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도록
허락한 일은 여주의 그릇이 결코 작지 않음을 입증하였고,
한때 여주의 등극을 수상하게 여기던 당주 이세민이 춘추의 두 번에 걸친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지절사를 파견하고 덕만을 주국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한 것은
비록 그것이 형식과 상징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여주 등극을 반대하던 일부 귀족과 백성들에게는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이웃 나라에서도 인정한 임금을 자국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덕만이 보위에 오르고 4년째인 을미년(635년)의 일이었다.
그해 10월,
임금은 이찬 용춘과 수품을 지방 군현에 보내어 이 같은 사실들을 알리고 외주의 신임을 얻었다.
그런데 임금을 도와 국정을 총리하던 을제가 노환을 얻어 물러날 것을 청하니
왕은 용춘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병신년 정월, 그에게 상대등을 맡기고자 하였다.
하지만 용춘은 이를 극구 사양하며,
“신은 이제 나이 일흔이 넘었나이다.
이번에 소임을 맡아 외관을 돌면서도 수품이 매사를 도맡아 하고 신은 수품을 따라다닌 것밖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하고서,
“신이 상신이 되면 젊은 사람들이 자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신은 사사로이 전하와 인척간이요,
산곡간의 민심도 많이 안정이 되었으므로 신과 같은 자는
그저 뒷전에 머물러 여생을 편히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서 대신 천거한 이가 수품이었다.
덕만이 용춘의 진언을 받아들여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고 얼마 아니 있어 을제가 세상을 떴다.
덕만은 즉위 초에 태산처럼 믿고 의지하던 을제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자주 침식을 거르곤 하였는데, 그러구러 자신 또한 덜컥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왕은 신열이 올라 사지가 불덩이와 같고 밤낮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심하게 앓았다.
아우인 천명이 부랴부랴 입궐하여 병수발을 들고 어의들이 입궐해 약을 쓰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효력이 없었다.
흥륜사의 승려 법척(法?)이 조서를 받들어 병을 돌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안타까운 날이 며칠 지나갔을 때다.
천명이 혼자서 병수발 들기가 버거워 하루는 사가에 잠시 도다녀가는 길에 며느리인 문희를 보고,
“아가, 네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다.”
하고는 궐로 데려갔다.
문희가 시모 천명과 함께 병난 왕의 사지도 주무르고 약 달이는 일도 감독하였는데,
밤이 되니 시모는 고단하여 먼저 꾸벅꾸벅 졸고 젊은 문희가 혼자 덕만을 보살폈다.
뒷날 아침에 천명이 눈을 뜨고는,
“네 덕에 모처럼 잘 잤다. 그래 간밤에 별일은 없었느냐?”
하고 물으니 문희가 갑자기 음성을 낮추며,
“어머님, 자장이란 분이 원녕사에 계시는 그 잘생긴 스님이 아닙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렇지. 한데 자장 스님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니?”
“아무래도 전하께서 그 스님에게 각별한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각별한 마음이라니?”
“글쎄, 밤에 그 스님의 이름을 자주 뇌이시며 가끔은 저의 손을 꼭 붙들기도 하시더이다.”
천명이 문희의 말을 듣고 문득 짚이는 바가 있었으나 며느리 앞이라 별다른 말은 아니하고,
“자장 스님과 친분이 깊으시니 그러시는 게지.
너는 행여 궐 밖 사람에게 쓸데없는 말을 옮기지 말아라.”
주의를 주고는 그날 밤 용춘이 안부를 물으러 들렀을 때 문희의 말에 자신의 말을 보태어 하였더니,
“그러니 전하께서 상사병이 난 게요?”
용춘이 임금 병나고 처음으로 웃음을 내었다.
두 내외가 잠깐 공론 끝에 원녕사로 급히 사람을 보내어 자장을 대궐로 부르니
잠시 뒤에 자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용춘이 자장을 보고,
“아무래도 스님이 전하의 회도를 기원하는 기도를 좀 올려주어야겠소.”
하고 부탁하므로 자장이 이를 쾌히 수락하며,
“용한 의원들도 보지 못하는 병이라면 필시 귀신의 장난일 것입니다.
소승이 사악한 허깨비를 쫓는 데 능통한 도반 한 사람을 데리고 오겠나이다.”
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밀본(密本)이란 중과 함께 들어왔다.
밀본은 임금의 침전 밖에서 약사경(藥師經)을 읽고 자장은 여왕의 곁에 머물며
향을 피우고 금강경(金剛經)을 낭독했다.
그러자 백약이 무효하던 왕의 용태가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용춘은 두 승려와 의논해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를 베풀고 중들을 모아
인왕경(仁王經)을 강독하게 하는 한편 1백 명의 젊은이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여주 덕만은 몸에서 신열이 내리고 찾아오는 사람을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달포 가량 신섭을 잘한 왕이 4월에 접어들고는 새로 지은 분황사며 한창 공역 중인 사천미의
영묘사까지도 바람을 쐬러 행차를 놓곤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자장이 임금의 어가를 모시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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