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2. 강안남자 (12)
(2363) 강안남자 -23
다음날 오후 3시가 되었을 때 조철봉의 사무실 안으로 윤희영이 들어섰다.
윤희영의 전화를 받은 조철봉이 사무실로 오라고 한 것이다.
조철봉은 웃음띤 얼굴로 윤희영을 맞았지만 의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차를 권한 것도, 뜬금없이 날씨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렇다.
시치미를 뚝 뗀 표정도 마찬가지. 그것이 윤희영의 감정을 자극한 것 같다.
“저기요, 어제 말씀하신 제안.”
하고 윤희영이 말했을 때 조철봉이 머리를 든다.
그러고는 잠자코 시선만 주었으므로 윤희영이 말을 이었다.
“이혼 위자료로 남편한테 4억을 주기로 하고 합의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4억이 필요해요.”
조철봉은 여직원이 가져온 커피잔을 들더니 차분하게 한모금을 삼켰다.
그러나 뜨겁다는 것을 잊었다.
입안이 화끈한 순간 어금니를 물고 참았다.
그래서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을 똑바로 뜬 윤희영의 말이 이어졌다.
“돈 주면 내일 합의하고 법원에 서류를 내기로 결정했어요.
그럼 모레부터 언제라도 여행이 가능해요.”
“그렇다면….”
커피잔을 멀찍이 밀어놓은 조철봉도 정색하고 말했다.
“나한테서 받은 돈을 다 그 남자한테 주고 빈손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래? 그래서….”
뜸을 들이지 않고 조철봉도 말을 이었다.
“그 박가가 압류한 가게를 원금에다 이자 붙여주고는 되찾기로 하지.
그리고 내부수리를 말끔하게 한 후에 재개업을 하는 거야.”
“…….”
“살 집도 마련해줄 테니까 걱정마. 아파트가 좋겠어? 아니면 단독주택?”
윤희영이 눈만 치켜뜨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저 혼자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집이 몇 채 있어. 부동산 투자가 재산 축적하는 데 제일 낫다고 해서
남의 이름으로 20채쯤 갖고 있거든. 그러니까 골라봐.”
그러더니 탁자 위에 놓인 벨을 눌렀다.
“네, 사장님.”
여비서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울렸을 때 조철봉은 엄숙하게 지시했다.
“부사장 들어오시라고 해.”
벨에서 손을 뗀 지 10초쯤 지났을 때 최갑중이 들어섰는데 오늘은 검정색 뿔테안경을 썼다.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이 어젯밤 포장마차 옆자리에 앉았던 자신을 알아볼까봐
걱정한 것 같다.
그러나 윤희영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힐끗 시선만 스쳐갔을 뿐이다.
윤희영의 옆자리에 앉은 최갑중에게 조철봉이 말했다.
“이분께 4억 드리도록.
이혼 위자료라고 하시는데 부사장이 변호사 통해서 처리를 도와드리도록 해.”
“예, 사장님.”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최갑중이 말을 이었다.
“홍 변호사한테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철봉이 다시 최갑중에게 말했다.
“내일 수속 끝나고 이분이 살 집을 골라야겠고 가게를 되찾아야 할 일도 있어.
그 일은 박 변호사한테 부탁해야겠지?”
“예, 사장님.”
심호흡을 한 최갑중이 어깨를 펴고 조철봉을 보았다.
얼굴에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다.
“그럼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이었으므로 윤희영이 엉덩이를 들었을 때 조철봉은 생각난듯 말했다.
“참, 그리고 내가 모레쯤 며칠 여행 다녀온다.”
(2364) 강안남자 -24
그날 밤은 또 서초구청 옆의 ‘초원복집’에서 저녁을 겸한 술을 마셨다.
오늘도 손님이 많았으므로 주인 고현숙은 나중에 등장할 모양이다.
“이혼까지 해놓고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술잔을 든 최갑중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말했지만 조철봉은 시큰둥했다.
최갑중은 홍 변호사와 함께 이혼 당사자 둘을 만나 수속을 다 끝내놓고 온 것이다.
내일 법원에 접수만 하면 된다.
한모금 술을 삼킨 최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철봉은 가라앉는 분위기인 데 반해 오히려 최갑중이 달아오르고 있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어느쪽에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 반대쪽으로 쳐들어가는 방법 말입니다. 무슨 성인데.”
“성동격서로군.”
다행히 아는 고사성어가 나왔으므로 어깨를 편 조철봉이 대답한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건 아냐. 넌 잘못 본 거다. 내가 그런 수단을 부린 게 아냐.”
최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난 윤희영의 행동이 조금도 놀랍지가 않아.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단 말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갑중을 노려보았다.
“14년 전의 내가 지금 윤희영의 남편 이기석 꼴이었거든.
이기석은 아마 초조하고 불안한데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을 거다.
그것이 옆에 있는 사람한테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지.
윤희영은 그런 분위기를 배겨내지 못해.”
“…….”
“윤희영은 14년 전의 나처럼 이기석도 미련없이 버린 거다. 물론.”
조철봉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이기석을 버린 동기를 내가 제공했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여전히 감탄한 얼굴로 최갑중은 머리를 끄덕였다.
“근데 돈이 좀 들었습니다. 형님.”
“이런 투자는 아깝지 않아. 다 한국사회 안에서 돈이 돌 테니까.”
“그럼 내일 법원에 서류 접수하고 나서 여행 떠나실 겁니까?”
“그래야지.”
“가슴이 벅차시겠습니다.”
“미친놈.”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주인 고현숙이 들어섰다.
고현숙의 눈 주위가 붉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고현숙에게 드문 일이다.
조철봉의 옆에 앉은 고현숙에게서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이것도 처음 있는 현상이다.
고현숙은 향수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현숙이 술병을 들더니 조철봉의 잔에 따르면서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 그저 그래.”
술잔을 받은 조철봉이 입맛을 다신다.
지난번에 고현숙은 장난처럼 준다고 했지만 80퍼센트는 진심이었다.
그때 조철봉이 고현숙과 비슷한 분위기로 이끌고 나갔다면 작업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철봉이 갑자기 몸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서 정색을 하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
지금 고현숙은 그때 상황을 회상시켜준 것이다.
조철봉이 손을 뻗어 고현숙의 손을 쥐었다.
그러고는 지그시 고현숙의 눈을 보았다.
“일주일만 기다려줄래?”
고현숙은 눈만 크게 떴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모레 출장을 가. 아주 중요한 출장이야.
가서 일을 성사시켜놓고 당신을 안고 싶어. 마음 푹 놓고. 괜찮겠지?”
최갑중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고 고현숙은 심호흡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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