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 강안남자 (9)
(2357) 강안남자 -17
조철봉은 한 모금 소주를 삼키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오후 8시반, 서초동의 단골식당 ‘초원복집’의 방 안이다.
앞쪽에 앉은 최갑중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었지만
지금 조철봉의 반응을 기다리는 중이다. 조철봉은 방금 미스터 김이 가져온
윤희영과 박상택의 대화 내용을 들은 것이다.
역시 안주를 뒤적거리는 시늉만 하던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다.
그런데 최갑중을 향한 눈의 초점이 멀다.
“걔하고 섹스도 수백 번 했을 거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최갑중은 경청한다.
걔란 윤희영이다.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땐 고생하던 때였는데 걔 만나면 다 잊고 그 짓에 빠졌지.
하지만 지금과는 달라, 내 욕심만 채웠거든.”
그러고는 조철봉이 얼굴을 늘어뜨리면서 웃는다.
“몇 분 안 걸렸어, 넣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힘은 남아서 하루에 몇 번씩 했지만 다 합해도 지금 한 번 한 시간도 안 된다.”
“…….”
“그런데도 삼년을 버텼으니 서로 좋아한 건 맞지?”
하고 조철봉이 물었으므로 멍하고 있던 최갑중이 정신을 차렸다.
“예? 예, 그런가요?”
어설프게 대답했지만 조철봉은 다시 말을 잇는다.
눈이 게슴츠레해진 것이 끈적한 회상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나한테 가장 상처를 준 여자지. 난 걔 이후로 여자한테서 별로 상처를 받지 않았어.”
최갑중이 슬쩍 조철봉을 보았다.
지금까지 조철봉의 과거 여자에 대해서 여러 번 들었지만 이번 건이 가장 길었다.
그리고 가장 상처를 받았다는 여자는 처음이기도 했다.
오전에 조철봉은 윤희영을 놔두라고 했지만 관심은 더 깊어진 것 같다.
윤희영이 박상택의 제의를 거부한 것도 예상 밖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갑중은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형님, 사채 5천만원에 4억짜리 가게가 날아가기 직전입니다.
손을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잔에 소주를 채우는 조철봉에게 최갑중이 말을 잇는다.
“형님 입장은 이해합니다.
그만큼 상처를 입으셨으니 괜히 손을 대셨다는 생각도 드시겠지요,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나중에는 후회하실 것 같은데요.”
“너, 날 뭘로 봐?”
불쑥 조철봉이 묻자 최갑중은 긴장한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난 평범한 놈이다. 그리고 네 앞에선 내가 유세 부린 적 없어.”
“그건 압니다.”
“난 오늘 윤희영이가 박상택이 따라서 모텔방에 가기를 바랐다.”
최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시무룩하게 웃는다.
술잔을 든 조철봉이 한 모금에 삼키더니 말을 잇는다.
“그게 정상이지. 그래야 다 편해지는 거다.
제가 눈 한번 딱 감고 다리를 벌려주면 제 가게도 살아나고 제 남편, 박상택이는 말할 것도 없고
따지고 보면 저도 좋아질 수 있을 텐데 다 버린 거야. 제 자존심인지 뭔지 때문에 말이다.”
말이 길어지면서 조철봉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것도 근래에 없던 행태다.
눈을 부릅뜬 조철봉이 최갑중을 보았다.
“그러면 나도 희망이 생겨날 텐데 말이다. 안 그러냐?”
그 순간 머리를 든 최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조철봉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것을 본 최갑중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희망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2358) 강안남자 -18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식당 주인인 고현숙이 들어섰다.
쇼트커트한 머리, 차분한 분위기의 용모에다 단정한 양장 차림이다.
조철봉의 옆에 앉은 고현숙이 웃음 띤 얼굴로 묻는다.
“심각한 이야기 하고 계셨어요?”
“맞아.”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물끄러미 고현숙을 보았다.
고현숙과는 알고 지낸 지 5년이 넘는다.
그러나 깊은 관계가 되지는 않았다.
조철봉이라고 다 작업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여자가 싫다고 하면 금방 물러선다.
싫다고 하는데도 매달려서 성공할 확률은 극히 낮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옛말은 여자가 상대일 경우에는 바꿔야 될 것이다.
‘몇 번 찍다가 싹수가 없으면 좀 쉬었다 찍어라’든지 ‘무작정 찍으면
도끼 부러진다’는 말도 맞겠다.
고현숙은 조철봉이 서너번 찍다가 그만둔 경우다.
그리고 일년쯤 쉬었다가 지금 만난 것이다.
조철봉이 고현숙의 선량해 보이는 눈을 똑바로 보면서 묻는다.
“당신도 내가 잡놈인 거 알지?”
“그럼요.”
고현숙이 대번에 대답했으므로 앞에 앉은 최갑중이 저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그대로 정색한 채 또 묻는다.
“내가 헤어진 지 십수년이 지났는데도 한여자를 가슴에 담고 있다면 믿겠어?”
“아뇨.”
이번에도 즉각 고현숙이 대답했는데 최갑중은 웃지 않았다.
이제는 눈만 껌벅이는 조철봉을 향해 고현숙이 말한다.
“다 잊게 된다구요. 아무리 큰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져요.
그래야 사람이 살아간다구요.
십몇년 동안 가슴에 담고 있었다는 건 좀 과장된 거죠.
인간은 제 추억을 과장하는 습성도 있으니까요.”
“젠장, 말은 잘하는군.”
“들은 풍월이죠.”
“오늘 한번 줄래?”
불쑥 조철봉이 묻자 고현숙이 싱긋 웃는다. 웃는 모습이 밝다.
웃음이 어울리는 인간이 잘 산다고 조철봉은 믿어왔다.
최갑중도 긴장한 채 고현숙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때 고현숙이 말했다.
“합시다.”
“젠장.”
어깨를 늘어뜨린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는다.
“이 여자가 일년 안 본 사이에 변했구만. 아랫도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봐요.”
하면서 조철봉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고현숙이 말했다.
“일년 사이에도 내가 이렇게 변했는데 십수년이라면서요?
양쪽 다 엄청 변하지 않았겠어요? 현실은 다르다구요.”
“진짜 오늘 한번 해야겠군.”
“글쎄, 준다니까 그러네.”
“염병.”
해놓고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최갑중을 보았다.
“그놈은 지금 뭐해?”
“박상택이 말입니까?”
최갑중이 묻자 조철봉이 입맛을 다신다.
“윤희영이 남편 말이다.”
“아, 이기석이 말씀이군요.”
머리를 끄덕인 최갑중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쯤 설거지나 하고 있겠죠.”
“그놈은 아직 가게가 넘어간 거 모르겠지?”
“그럴 겁니다.”
“현재 상황을 알도록 해.”
조철봉의 말을 들은 최갑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방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때 듣고만 있던 고현숙이 묻는다.
“오늘 밤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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