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 강안남자 (5)
(2349) 강안남자 -9
11시45분, 이곳은 천안 북쪽 국도에서 5백미터쯤 들어간 작은 마을.
그러나 마을까지 도로 포장이 되어 있는 데다 집 앞에 세워 놓은 자가용도 꽤 많다.
요즘은 시골 할아버지가 서울 손자 만나려고 자가용을 몰고 가는 세상이다.
마을 회관 앞에 서 있던 조철봉은 앞쪽 어둠 속에서 어른거리는 형체를 본다.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고 있다.
회관 옆에만 보안등이 켜져 있어서 그쪽에서는 이쪽이 보일 것이다.
이윽고 다가오는 형체의 윤곽이 드러났다.
남녀. 앞장선 남자는 최갑중이었고 비스름한 뒤쪽에서 김경옥이 따라온다.
김경옥은 바지에 긴팔 셔츠 차림인데 머리는 뒤로 묶었다.
다가온 최갑중이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모셔 왔습니다.”
그러고는 발을 멈추지도 않고 뒤쪽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조철봉의 두 발짝쯤 앞에서 김경옥이 멈춰 섰다.
최갑중이 불러냈을 때는 물론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라앉은 표정이다.
앞쪽 보안등 빛을 받은 눈동자가 반짝인다.
“어이, 그렇게 갑자기 새면 어떡해?”
조철봉이 건들거리는 말투로 묻는다.
이런 경우에는 심각하게 나갈 필요가 없다.
김경옥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꼭 돈 떼어먹고 야반도주한 놈을 잡으러 온 것 같지 않으냐 이 말이야.”
“근데 왜 왔어요?”
하고 한 발짝 더 다가선 김경옥한테서 옅은 비누 냄새가 풍겨 왔다.
시골 밤공기와 섞여진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조철봉은 또 목이 멘다.
“애는 어때?”
불쑥 조철봉이 묻자 김경옥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가 멈췄다.
그러고는 입술이 질끈 다물려지더니 열린다.
“잘 있죠.”
짧은 대답. 그러고는 꾹 닫힌 입술이 열릴 것 같지가 않다.
표정도 굳어졌다.
그러자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바짝 다가섰다.
밤공기가 흔들리면서 향내가 또 맡아진다.
어느 집에선가 개가 잠깐 짖었다가 멈췄다.
주위가 조용하면 귀가 울린다.
그 속에 별 소리가 다 들어 있다.
그때 조철봉이 물었다.
“애, 병원에 안 보낼 거야?”
“누가 그래요?”
대번에 그렇게 묻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김경옥이 본론으로 끌려든 것에 만족해서 제 페이스대로 나간다.
“애 데리고 나와. 병원에 입원시키게 말야.”
이제는 김경옥이 눈만 크게 떴고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돈은 내가 다 댈 테니까. 어서.”
“…….”
“돈 자랑하는 게 아냐. 그리고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라고, 이 여자야.”
“…….”
“미친 여자처럼 왜 천방지축 이러는 거야? 애부터 살려야지.”
“그래요, 나 미쳤어요.”
갑자기 눈을 치켜뜬 김경옥이 말했다.
그러더니 치켜뜬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쏟아졌다.
딸꾹질을 한번 하고 난 김경옥이 말을 잇는다.
“이은지가 잘산다는 소문을 듣고 돈 빌리려고 갔던 것이라고요.
이력서는 그냥 가방에 있었던 것이고.”
또 딸꾹질을 하고 나서 김경옥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당신을 만났어요. 그러고 나서 뒤죽박죽이 되었어요.
그래요. 미쳤어요. 살기도 싫어졌고,
그래서 여기서 성미하고 같이 죽으려고 내려왔어요.”
(2350) 강안남자 -10
별 인간이 다 있다.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 제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날 얻어먹기만 하는 놈을 보고 이제는 놈이 낼 때가 되지 않았나 하면서
기다린다면 바보가 된다.
그런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버릇이 굳어져 나중에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목덜미쪽 털 한 올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친구 서넛하고 먹은 몇만원 밥값을 안 내려고, 그것도 한국 양반 체면상 더치페이는
어색한 터라 계산할 때만 뒤로 빠져서 뭉그적거리는 인간들이 있다.
버릇처럼 안 내는 그런 인간의 집에 가면 대부분 잘산다.
최고급 수입 가구가 번쩍거리고 양탄자도 몇천만원짜리다.
숨겨둔 보석, 그리고 부동산은 필수, 그리고 공통점이 있다.
밖에서 안 쓴다는 것. 해외에 나갈 때도 가장 싼 티켓을 구해 짐짝처럼 오가며
숙식도 싼 것만 찾는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주 쓸쓸한 말년이 찾아온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자식들이 재산은 다 빼돌렸으며
결국 돈 아낀답시고 고생만 직사하게 하다가 떠나는 것이다.
미리 병원 예약까지 해놓고 내려온 터라 김경옥과 딸 성미를 차에 싣기만 하면 되었다.
김경옥이 울고 짜는 소동을 부렸지만 곧 성미를 데리고 나와 차에 탔다.
그러고는 서울의 한국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2시,
응급실 앞에서 내린 모녀에게 조철봉이 말했다.
“돈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수술비, 병실비 다 냈으니까.”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성미가 들으라고 한 말이다.
일 거들어 주려고 직원 한 명이 와 있었으므로 조철봉과 최갑중은 병원에서 나왔다.
“댁에 들어가셔야죠?”
앞쪽 운전사를 의식한 최갑중이 몸을 숙이면서 낮게 묻자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르고 귀에 붙였다.
그 사이에 최갑중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전 2시반이다.
“응, 나야.”
수화구에서 이은지의 목소리가 울렸으므로 옆에 앉은 최갑중도 긴장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나, 지금 김경옥이하고 딸을 병원에 내려놓고 집에 가는 길이야.”
조철봉이 말하자 이은지가 길게 숨을 뱉는다.
“잘 했어. 피곤하지?”
“아니, 괜찮아.”
“빨리 와. 안마해줄게.”
“먼저 자.”
그래놓고 핸드폰을 귀에서 뗀 조철봉에게 최갑중이 묻는다.
“말씀하신겁니까?”
“당연하지.”
정색한 조철봉이 최갑중을 쏘아보았다.
“내가 찾아서 병원에 입원시키겠다고 하니까 감격해서 울먹이더라.”
“형수님이 참 좋은 분이시죠.”
“여자는 다 남자 하기 나름이다.”
했다가 조철봉이 정정했다.
“물론 여자의 기본이 갖춰져야겠지.”
“그런데, 참.”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최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지난번에 말씀해주신 여자분 말입니다. 주민등록 앞자리만 알고 계신다는 분.”
“그래.”
어느덧 정색한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찾은 거냐?”
“내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놓고 최갑중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가장 찾고 싶은 여자분이라고 하셨는데 누군지 저한테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최갑중은 시선을 내리지 않는다.
마치 자신은 알 자격이 있다는 표정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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