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880. 남자의 꿈 (12)

오늘의 쉼터 2014. 10. 11. 01:10

880. 남자의 꿈 (12)

 

 

(2338) 남자의 꿈 -23

 

 

윤미는 자장면 그릇을 깨끗이 비우더니 휴지로 입가를 꼼꼼하게 닦는다.

 

그것을 본 유서경이 물잔을 밀어주면서 웃었다.

“아이구, 윤미가 깔끔하기도 하지.”

“어린애 취급하지 마, 엄마.”

눈을 흘겨보인 윤미의 표정도 밝다.

 

천호동 아파트 단지 뒤쪽의 중국식당 안에는 손님이 그들 둘뿐이다.

 

오후 4시경이어서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유서경이 물잔을 내려놓은 윤미에게 말한다.

“잊지 마. 모레 낮 12시에 로터리의 런던 제과소로 나오는 거.”

“글쎄, 알았다니까.”

“네 아빠는 물론이고 새엄마가 눈치채면 안돼.”

“알았다니까 그러네.”

눈을 흘겨보인 윤미가 곧 정색하고 유서경을 보았다.

“엄마, 이번에는 진짜지?”

“응, 틀림없다.”

“이번에도 약속 어기면 난 앞으로 엄마 안 만날 거야.”

“글쎄 걱정 말라니까.”

그러고는 유서경이 길게 숨을 뱉고 나서 말한다.

“가방에 옷가지 같은 거 넣어올 것 없다.

 

다 새것으로 사줄 테니까. 그냥 학교가는 것처럼 와.”

“엄마 돈 많이 벌었어?”

눈을 크게 뜬 윤미가 묻자 유서경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넌 이제 필리핀에서 엄마하고 둘이 사는 거야.

 

거기서 넌 공주님 대접을 받게 될 거다.”

유서경의 얼굴이 상기되었고 목소리도 높아졌다.

“네 새엄마 애들 봐주면서 불쌍한 백설공주처럼 살 필요가 없는 거지.

 

넌 진짜 공주가 되는 거라구.”

“난 엄마만 있으면 돼.”

“절대로 그 연놈들 눈치 못 채게 해.”

“둘 다 나한테는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그런 걱정할 필요 없어.”

어느덧 윤미의 얼굴도 상기되었고 목소리도 떨렸다.

 

그러자 유서경이 손을 뻗어 윤미의 손을 쥐었다.

 

물기가 고인 두 눈이 번들거렸다.

“윤미야, 너 고생시켜서 엄마가 정말 미안했어.

 

이젠 널 위해서 엄마가 뭐든 다 할 거란다.”

윤미가 여섯살때 이혼을 했으니 벌써 8년이 지났다.

 

그동안 3년쯤 교도소에 들어간 시간만 빼고 한달에 세번은 꼭 윤미를 만나온 유서경이다.

 

전남편 박수남은 재혼하고 나서 다시 딸만 둘을 낳았는데 여섯살, 세살이다.

 

보험회사 직원인 박수남은 윤미를 과외 하나 보내지 않고 집안일만 시켰는데

 

꼭 신데렐라의 아빠 같았다.

 

그래서 작년부터 몇번이나 데리고 나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일이 틀어져서 윤미를 실망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유서경이 윤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물기가 밴 눈에서 금방 눈물이 떨어져 내릴 것 같다.

“윤미야, 하느님이 도우셔서 이번 일은 잘 될 것 같단다.

 

우린 모레 오후 비행기로 필리핀으로 날아가는 거야.

 

거기엔 우리 둘만의 새 세상이 기다리고 있단다.”

마침내 유서경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떨어졌지만 말은 잇는다.

“난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거란다.

 

그곳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나 하면서 네 뒷바라지를 할 거야.

 

네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나와 결혼할 때까지.”

 

윤미도 홀린 듯이 듣고 유서경의 얼굴도 꿈을 꾸는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소홀했던 빚을 다 갚을 거야. 내 딸을 위해 다 할 거야.” 

 

 

 

 

(2339) 남자의 꿈 -24

 

 

“웃기고 자빠졌네.”

녹음기의 스위치를 끈 최갑중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조철봉을 보았다.

 

둘은 방금 중국식당에서 유서경과 윤미의 대화 내용을 끝까지 다 들은 것이다.

 

다시 최갑중이 어깨를 치켜올렸다가 내리면서 말한다.

“나아 참, 기가 막혀서 증말. 이게 사기꾼 망신 다 시키고 있어.”

소파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담배를 꺼내 물었으므로 최갑중은 라이터를 켜 내밀었다.

 

그러나 조철봉이 머리를 젓는다.

 

빈 담배만 물고 있겠다는 표시다.

“형님,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제는 눈썹을 치켜올린 최갑중이 물었을 때 조철봉은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반, 한시간 반 후에 유서경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녹음기로 옮겨졌다.

 

국정원 이강준 실장은 철저했다.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제 오후에 유서경과 딸의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녹음해서 전해준 것이다.

 

직원을 시켜 전해 주었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다.

“제가 나가서 처리하지요.”

빈 담배만 물고 있는 조철봉이 답답했는지 최갑중은 제가 결론을 냈다.

 

그러고는 일어날 듯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한다.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형님.”

“어떻게 할 건데?”

담배를 입에서 뗀 조철봉이 묻자 최갑중은 다시 눈을 부릅떴다.

“우릴 뭘로 보느냐고 귀뺨을 한대 치고 돌려 보내지요. 아니.”

최갑중의 시선이 녹음기로 옮겨지더니 말을 잇는다.

“녹음기를 가져가 들려줘야겠군요. 그렇지. 그게 낫겠습니다.”

그러자 조철봉이 다시 벽시계를 보고나서 말한다.

“같이 가자. 30분쯤 후에 출발할 테니까 나가 기다리고 있어.”

그러고는 7시 정각이 되었을 때 둘은 약속한 극동호텔 한식당의 방으로 들어섰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유서경이 반색을 하고 맞는다.

 

오늘 유서경은 피부가 더 맑아졌고 옷차림도 화려했다.

 

익어 터지기 직전의 복숭아 같다.

 

한정식백반을 시켜 상에 가득 진수성찬이 쌓였지만 셋은 모두 식욕을 잃은 듯 깨작거린다.

 

대화도 허공에 붕 떠서 동문서답이 많았고 최갑중은 자꾸 헛웃음만 터뜨렸다.

 

그러면서 조철봉의 눈치를 본다.

 

이윽고 모두 식사를 마쳤을 때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최갑중이 와락 긴장했고 유서경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자금이 얼마 필요하다고 했지?”

“이, 이억요.”

유서경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을 때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최갑중을 보았다.

 

최갑중은 그것을 신호로 안 것 같다.

 

어깨를 부풀리더니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유서경의 시선이 녹음기로 옮겨졌을 때였다.

 

조철봉이 손을 뻗어 녹음기를 집어 상 밑에 놓았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유서경에게 내밀었다.

“여기 2억짜리 수표야. 내일 오전에 찾아갈 수 있을 거야.”

유서경은 두 손을 내밀어 봉투를 받았는데 두 손을 덜덜 떠는 것이 최갑중에게도 보였다.

 

봉투를 받은 유서경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렸을 때

 

조철봉이 다시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유서경, 박윤미의 필리핀 마닐라행 일등석 오픈 티켓이야. 서둘지 마.”

그러고는 조철봉이 차분해진 시선으로 유서경을 본다.

“그래, 식당 하나 얻어서 잘 살아, 윤미하고.” 

 

  

 

 

(2340) 남자의 꿈 -25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앞쪽만 보던 조철봉이 마침내 머리를 돌려 최갑중에게 물었다.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무슨 생각이라니요?”

했지만 최갑중은 당황한 듯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러자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상하게 보이냐?”

“뭐, 그렇다고도.”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 하면 갈 때가 된 거라며?”

“누가 그럽니까?”

계속해서 최갑중의 말이 겉돌았지만 조철봉은 정색하고 말한다.

“착한 사람한테만 베풀어 줄 필요는 없다.

 

내놓을 바에는 가리지 않고 줘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최갑중은 눈만 껌벅였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지. 유서경보다 윤미를 위해서 내줬다고 봐도 되겠다.”

“…….”

“난 다른 때보다 지금 기분이 더 흡족하다. 더 후련해.”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옆쪽에 놓았던 핸드폰을 든 조철봉이 발신자 번호를 보았다.

 

유서경이다.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핸드폰을 최갑중에게 건네주었다.

“마침 네가 내 이야기 들었으니까 대신 전화 받아. 유서경이다.”

“아니, 형님.”

놀란 최갑중이 두 손바닥까지 펴보였다가 조철봉의 표정을 보더니 핸드폰을 받아 쥐었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핸드폰을 귀에 붙인다.

“여보세요.”

그러자 유서경이 잠깐 주춤거리다가 묻는다.

“조 사장님이세요?”

“아니, 난 부사장 최갑중입니다. 말씀하십시오.”

하고 최갑중이 이제는 단호한 표정이 되어서 말한다.

“조 사장님 어디 가셨어요?”

다시 유서경이 묻자 최갑중이 상체까지 반듯이 세웠다.

“아닙니다. 옆에 계십니다만, 제가 대신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고요.”

유서경이 울먹이며 말했을 때 최갑중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저 열심히 사시는 것이 조 사장님 은혜에 보답하시는 겁니다. 아시죠?”

“네. 압니다.”

“조 사장님은 유서경씨에 대해 다 알고 계시면서도 도와주신 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

“윤미 때문입니다.

 

윤미를 행복하게 해 줘야겠다는 유서경씨에게 기회를 주신 거죠.”

“…….”

“내일 필리핀으로 도망갈 계획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으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두르지 말고 준비 잘해 갖고 떠나세요.

 

티켓도 오픈으로 끊어 놨으니까요. 아셨지요?”

저쪽에서는 대답이 없었지만 최갑중은 열심히 말을 잇는다.

 

얼굴도 상기되어 있다.

“필리핀에서 기반을 잡았을 때,

 

몇 년 후가 되더라도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것을 한번 보여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조 사장님 은혜를 갚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자 유서경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꼭 그럴게요.”

그 순간 어깨를 편 최갑중의 콧구멍이 벌름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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