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4. 남북암행 (7)
(2285) 남북암행-13
밤 11시,
국도변의 공터에 야영 텐트를 설치하고 일행은 저녁 식사를 끝냈다.
물론 일행 중에 남매가 포함되었다.
남매의 이름은 박강수, 박미순, 저녁밥으로 나눠준 쌀밥과 쇠고깃국을 보더니
김대성과 김영만에 대한 무서움도 잊은 것처럼 밥알 한 개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웠다.
둘의 식판에 담겼던 네 가지 찬도 고춧가루 한점 남지 않았다.
텐트 안에는 다섯이 앉았다.
바닥에 양탄자를 깔았지만 셋은 접이식 나무 걸상에 앉았고 둘은 바닥에 앉았다.
편히 앉으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둘 다 무릎을 꿇고 있다.
남매의 얼굴에는 노곤한 식곤증이 끼어 있다.
긴장이 조금 풀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둘은 교화소장이 설설 길 만큼 높은 사람에 의하여 구출되었다는 것은 안다.
남매의 표정을 살핀 김대성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잡힌 거야?”
“예, 아버지는 청진시당 조직부장이었는데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되었습니다.”
박강수가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한다. 김대성이 또 묻는다.
“어떤 반혁명 행동을 했나?”
“예, 장군님을 비난하고 반란을 선동했다고 합니다.”
이제 머리만 끄덕인 김대성에게 박강수가 말을 잇는다.
“아버지는 백번 처형당해도 모자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박미순도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족까지 이 지경으로 만든 아버지는 죗값을 더 받아야 합니다.”
그러자 김대성이 정색하더니 물었다.
“동무들은 놔주면 어떻게 살 작정이야?”
둘은 숨을 죽인 채 시선만 주었으므로 김대성이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한다.
“고향에 가도 반혁명분자의 자식이라고 따돌림을 받을 것이고 배급도 나오지 않을 텐데 말이야.”
“어떻게든 열심히 일해서 살려주신 은혜도 갚고 조국에 봉사하면서 죽고 싶습니다.”
박강수가 안간힘을 쓰면서 말하는 바람에 등빛에 비친 콧잔등의 땀이 드러났다.
김대성과 강영만, 조철봉의 표정까지 살핀 박강수가 말을 잇는다.
“조국과 장군님의 은혜를 갚고 죽는 것이 저희 남매의 소원입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한다. 옷도 새 노동복으로 갈아입혔고 몸까지 씻겼지만
둘은 병원에서 막 탈출한 말기 암 환자 같다.
저 몸으로 500미터나 걸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김대성이 머리를 저었으므로 조철봉까지 긴장했다. 김대성이 말했다.
“그 충성이 마음에서 우러날 리가 없지.
아버지가 죽어 마땅하다고 했지만 자기를 낳고 키운 부모 아닌가?”
“어머니를, 그리고 동생을 죽인 것이나 같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저희들 둘도.”
마침내 박강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샘이 말라 없어진 것 같았던 눈이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박미순도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울었다.
그때 김대성이 입을 열었다.
“강 동무, 위안이 얼마나 있습니까?”
“예? 그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느냐고 물을 뻔했던 강영만이 대답을 하려고
헛기침을 했을 때 김대성이 말을 이었다.
“여기 남매가 중국에서 당분간 지낼 만큼 중국 돈을 주세요.
그리고 둘을 국경까지 데려가 강을 넘게 해주세요.”
그러더니 김대성이 머리를 돌려 남매를 보았다.
“동무들은 그냥 운이 좋은 거야. 내가 한꺼번에 다 할 수는 없어서 이러는 거라구.”
(2286) 남북암행-14
“알아요.”
하고 불쑥 김대성이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오전 8시반, 아침 식사를 마친 야영지는 출발 준비로 부산했다.
이제는 모두 익숙해져서 손발이 맞았으며 처음에는 긴장되어있던 분위기도 밝은 생기로 덮여 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김대성이 말을 잇는다.
“우리가 국제사회로부터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는 거 말입니다.”
그러고는 김대성이 머리를 돌려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은 위쪽 국도를 본다.
조금 전에 호위군관 두 명은 승합차에 박강수와 박미순 남매를 태우고 저 길로 북상해간 것이다.
호위군관들은 남매를 중국땅에 데려다 주고 나서 돌아올 것이었다.
조철봉도 국도에 시선을 준 채 말했다.
“저도 어젯밤에 생각을 좀 했는데 아버님이 모든 부담을 떠안으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걸음 다가선 김대성의 표정은 굳어져 있다.
조철봉이 주위를 먼저 살피고 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어젯밤 교화소에 간 것이 우연 같지가 않았습니다.”
김대성이 눈만 껌벅였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진다.
“강 중장 같은 분이 길을 잘못 들어가실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고 나니까 그것은 위원장님의 계획 같다고 믿어졌습니다.”
“… ….”
“김 선생께 교화소의 실상을 보여주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 ….”
“아마 박강수 남매를 구해주신 일 같은 경우를 예상하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김대성이 길게 숨을 뱉는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막으려면 얼마든지 막을 수가 있었을 테니까요.”
“부담은 위원장님이 질 테니 김 선생은 소신껏 해보라는 의도가 아니실까요?”
조철봉이 결론을 짓듯이 말했을 때 앞쪽에서 강영만이 다가왔다.
“김 선생님, 출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강영만이 말하자 김대성은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오늘은 함흥까지 내려가 보십시다.”
모든 스케줄은 김대성이 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세부 사항은 강영만이 집행한다.
그들이 차에 오르자 암행 시찰단 대열은 출발했다.
“조 선생, 심심한데 여자 이야기 좀 해주시라우요.”
차가 속력을 냈을 때 김대성이 웃음띤 얼굴로 말한다.
앞좌석에 앉은 강영만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서려 있다.
“아니, 내 여자 문제가 이곳까지 퍼져있는 모양인데.”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조철봉이 말했지만 눈은 웃는다.
“남조선에서는 여자를 어떻게 유혹합네까?”
다시 김대성이 묻자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오리발을 내밀기에는 분위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전 주로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에서 여자한테 작업을 걸었지요.”
“아하, 작업.”
김대성이 웃음띤 얼굴로 맞장구를 친다.
“그 작업 이야기를 들읍시다.”
“저는 한번도 작업에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백발백중이었지요.”
엄숙한 표정을 지은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은 여자가 바라는 것을 알고 넘어가 주는 척했기 때문입니다.”
아, 이것은 인생사에도 통용되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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