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847. 버려야 먹는다 (12)

오늘의 쉼터 2014. 10. 10. 13:16

847. 버려야 먹는다 (12)

 

(2270) 버려야 먹는다-23 

 

 

오늘밤은 강계시의 안가에서 편하게 잘 수 있게 되었다.

 

시외곽에 위치한 2층 저택에는 방에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사흘 만에 샤워도 했다.

 

밤 10시반, 2층의 방에 있던 조철봉은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다.

“주무시지 않으면 한잔 하실까요?”

문 앞에 선 김대성이 묻는다. 김대성은 바로 옆방을 쓴다.

“좋습니다. 들어오시죠.”

조철봉이 권하자 김대성은 잠자코 방으로 들어섰다.

 

김대성은 양손에 술병과 안주를 쥐고 있다.

 

탁자에 술병과 안주를 내려놓고 앉은 김대성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역시 집이 편하군요.

 

고생을 해봐야 어려운 인민들의 생활상을 실감하게 될 텐데요.”

“그렇다고 집이 옆에 있는데 억지로 차에서 주무실 건 없지 않습니까?”

이제는 조철봉도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잔을 가져온 조철봉이 김대성의 잔에 술을 따른다.

 

술은 위스키다.

 

술잔을 쥔 김대성이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본다.

“아마 미국이나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들은 내가 이렇게 민생 시찰을 하러

 

다니는 걸 알고 있겠지요?”

“알고 있겠지요.”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앞쪽에 앉은 김대성을 향해 웃어보였다.

“지도자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관심의 대상이 될 겁니다.”

“이젠 맘대로 놀지도 못하겠고.”

쓴웃음을 지은 김대성이 술을 한모금 삼켰다.

 

조철봉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인간은 가끔 상대방의 꾸밈 없는 자세에 감동을 받는다.

 

그렇다. 앞으로 김대성은 사적 활동을 모두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아직 젊은 김대성에게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생활이다.

 

이제는 정색한 김대성이 조철봉에게 말한다.

“난 말이죠. 내가 후계자로 선정된 이유가 뭔지 오래 생각해 보았단 말입니다.

 

아버지가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만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내 자신의 장단점을 분석해 보았지요.”

김대성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내용은 조리가 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란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고 쓸데없는 부사, 조사를

 

넣지 않으며 잘 요약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김대성의 말은 조철봉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랬더니 내가 뭘 깨달은지 아십니까?

 

난 첫째 욕심이 없었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고 양보를 했지요.

 

그러나 결말은 깨끗하게 냈습니다.

 

지건 이기건 말씀이죠.

 

내 분수를 알고 내가 맡은 일은 해내려고 노력했지요.”

그러고는 김대성이 다시 조철봉이 채워놓은 위스키잔을 들어

 

이번에는 한꺼번에 다 삼켰다.

 

안주도 먹지 않고 김대성은 말을 잇는다.

“내 장점을 짚어 보았더니

 

아버지가 바라는 조선의 미래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고요.”

“어, 어떻게 말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조철봉이 묻자 김대성은 다시 얼굴을 펴고 웃는다.

“난 아버지와 한 약속은 꼭 지킵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미련 없이 떠날 것이라고요.”

숨을 죽인 조철봉을 향해 김대성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저를 내보내신 것이라고요.”

김대성은 내보냈다는 표현을 썼다.

 

마치 고생하라고, 또는 전장으로 보냈다는 표현 같았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말만 그럴 듯하게 늘어놓는 사람을

 

수없이 겪었지만 김대성의 말은 진정성이 있다. 

 

(2271) 버려야 먹는다-24 

 

 

강계에서 동진하여 낭림고원과 개마고원을 넘어 양광도의 감산군에 도착했을 때는

 

다음날 저녁 무렵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 여러 번 멈춰섰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허천강변의 한적한 공터에 차를 세우고는 그날 밤 숙영 준비를 시작했는데

 

김대성과 강영만, 조철봉은 1킬로쯤 떨어진 마을로 민정 시찰을 나갔다.

 

이제는 김대성도 익숙해져서 옷차림도 더 후줄근해졌고 행동도 자연스러워서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조철봉과 나란히 산길을 걸으면서 김대성이 말한다.

“인민들이 이렇게 가난하게 된 것은 미제 놈들이 우리 북조선의 발전을

 

철저하게 방해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조철봉이 들으면서 무의식중에 머리를 돌려 뒤쪽의 강영만을 본다.

 

강영만은 10여미터쯤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군관 하나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그때 김대성이 다시 묻는다.

“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 선생, 누가 미제 때문에 북조선이 가난하게 되었다고 합니까?”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눈을 둥그렇게 뜬 김대성이 덧붙였다.

“미제 놈들이 없었다면 조선은 이미 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북남은 같이 잘 살게 되었을 것이라고요.”

“제가 알기로는요.”

심호흡을 하고 난 조철봉이 김대성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50년 전에는 남북한 경제 사정이 비슷했습니다.

 

오히려 북한이 좀 더 나았지요. 그런데.”

조철봉은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리고 남북한의 체제에 대한 비교 분석도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남한에서

 

사업을 해 온 덕분에 남한 경제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50년 동안 남한은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해냈지요.

 

지금 세계 12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이게 미제, 아니, 미국 덕분이 아니냐고 하신다면 까짓것,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해 두죠.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미국 종이 된 것도 아니니까요.”

김대성은 묵묵히 걸음만 떼었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진다.

“제가 남북한을 왕래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북한은 체제가 잘 정비되었고

 

남한은 경제가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양국은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위원장님이 저 같은 놈한테 김 선생을 수행하고 다니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김대성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오후 6시반이 되어 가고 있다.

 

산골이어서 이미 어둠이 덮여지고 있었는데 김대성의 두 눈이 번들거린다.

“우리 체제가 경제 발전에 방해가 된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가끔 해 보았거든요.”

“그건 김 선생께서 연구를 해 보시지요.

 

저는 머릿속에 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자 김대성이 빙그레 웃는다.

“나는 인민들이 잘 먹고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합니다.”

조철봉의 시선과 마주치자 김대성의 눈빛이 강해졌다.

“지도자 자리도 내놓겠어요. 그건 아버지도 말리지 못합니다.”

놀란 조철봉이 숨을 삼켰고 김대성의 말이 이어졌다.

“난 아버지가 시켜서 맡았지만 평생 해 먹을 생각 없다고요.

 

이건 조 선생만 알고 있으라고요.”

그러더니 김대성이 힐끗 뒤쪽을 보고 나서 말을 잇는다.

“아버지도 이런 내 성격을 아실 겁니다.” 

 

 

(2272) 버려야 먹는다-25

 

 

셋이 싸우고 있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마을 끝의 허름한 민가 마당에서

 

셋의 목소리가 밖으로 퍼져 나오고 있다.

 

마을은 어둡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밤이면 불을 켠 건물이 드물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데도 마을은 조용했다.

 

구경꾼도 없다.

 

아마 한국 같았으면 이 정도 소음에는 담장 밖에 노소남녀가 잔뜩 모여 있을 것이었다.

“그래, 날 잡아가라, 나도 이제는 할 일 다했다. 잡혀가서 죽어야겠다.”

여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자 사내 하나가 헛웃음을 웃는다.

 

목소리가 거칠다.

“이년이 아주 죽이라고 목을 갖다 대는구먼. 좋다, 가자.”

“데려가, 이놈아.”

그때 다른 사내가 말한다.

“시끄러워! 자 여기 앉아봐.”

“못 앉겠다.”

“그러지 말고 앉으라면 앉아.”

김대성과 조철봉,

 

그리고 강영만에다 경호군관 대여섯명까지 민가 담장 밖에 모여서 있었지만 모두 듣기만 한다.

 

김대성이 가만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거친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네 자식들 탈북시키고 다시 돌아온 건 네 언니 딸 가족들 데리러 온 줄 우리가 다 알아.

 

네 언니 딸을 우리가 잡아 놓았거든.”

그러더니 사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졌다.

“우리가 만만하게 보였냐? 이 반동, 하지만 너한테 우리가 살아날 기회를 주지,

 

통행증을 누구한테서 얻었는지만 털어놓으면 돼.”

“죽여, 여기서.”

하고 여자가 뱉듯이 말했으므로 조철봉이 옆에 선 김대성을 보았다.

 

이제 김대성은 흙으로 만든 담장에 등을 붙이고 서 있다.

 

그래서 조철봉도 나란히 섰고 강대성은 문 반대쪽 담장에 군관 서너명하고

 

늘어서 있는 상황이다.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렸다.

“너희들이 나한테 뭘 해줬다고 이러는 거냐?

 

이밥에 고깃국 먹게 해 주겠다면서 30년이 넘도록 새벽에 별이 떠 있을 때부터

 

밤에 별이 나올 때까지 일을 시켜 놓고 강냉이라도 배불리 먹여 준 적이 있단 말이냐?

 

그래 놓고 먹고살겠다고 국경을 넘어가면 반동이라면서 죽이겠다는 거냐?”

“이 미친년이 정말 죽으려고….”

거친 사내의 목소리가 말을 끊었을 때 다른 사내가 다시 나선다.

“동무는 가만있으라우.”

해 놓고 사내가 묻는다.

“이봐, 이옥순 동무. 동무가 그러면 언니 딸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여섯 살짜리 아이까지 세 식구가 잡혀 들어가면 석 달을 견디지 못해.

 

그러니까 통행증을 누구한테서 받았는가만 말해.”

그때 여자가 짧게 흐느끼고 나서 말한다.

“그래, 걔들하고 같이 죽을 테다. 난 말 못해.”

그러더니 쏟아내듯 말을 잇는다.

“내가 중국 여러 번 들어가 보았는데 이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냐.

 

세상에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곳도 없어.

 

왜 우리는 이렇게 못사는 거야? 왜?

 

왜 우리가 거지 취급을 당하면서 목숨을 걸고 중국 땅으로 탈출해 나가는데?

 

배불리 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이 망할 놈들아!”

“안 되겠어.”

마침내 사내가 결심한 듯 말한다.

“최 동무, 묶어서 끌고 가자고.”

그때 김대성이 담장에 붙이고 있던 등을 떼더니 손짓으로 강영만을 부른다.

 

강영만이 소리 없이 다가와 섰을 때 김대성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 동무들 둘은 그냥 보내고요.”

심호흡을 하고 난 김대성이 말을 잇는다.

“여성 동무만 나한테 데려오시라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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