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 공존 (7)
(2212)공존-13
위원장의 예상대로 언론은 조철봉의 제주호텔 기습 방문을 특보로 터뜨렸다.
조철봉이 호텔을 나왔을 때가 9시 반쯤이었는데 TV는 10시 뉴스로 10분간이나
들어가고 나오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온갖 이야기를 다했다.
어떤 방송국은 조철봉이 북측이 임명한 개성공단 이사장이 될 것 같다고 아주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안되면 조철봉이 고소할 것도 아니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조간신문은 더했다.
어떤 신문은 위원장과 조철봉이 의형제를 맺은 사이여서 사석에서는 둘이 말을 튼다고까지 했다. 이 덕분에 조철봉은 다시 언론의 초점이 됐다.
위원장의 의도대로 진행이 되었지만 불편했다.
얼굴이 알려지면 첫째 연애사업에 지장이 있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같이 사진 찍히려고 하겠는가?
속도위반 따위로 잠시 카메라에 적발되어서
어느 날 갑자기 사진과 함께 벌금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을 때
자비로우신 경찰청에 대해 세배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놈자들이 많을 것이다.
옆자리에 태웠던 여자는 깨끗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찜찜한 아침을 보낸 조철봉이 호텔방 안에서 일행과 함께 TV를 본다.
위원장의 연설을 다시 들으려는 것이다.
이번 장소는 한라호텔 회의장. 5백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회의장이 꽉 찼다.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경제인 대표들이 모여있는 것이다.
화면에는 연단에 앉아있는 위원장과 북측 고위급 인사들이 보인다.
한국측은 총리와 해당 장관들이 참석했는데 북한측이 주최한 회의였기 때문이다.
한국 정관계, 재계 인사를 초청한 경제 협력 설명회인 것이다.
이윽고 사회자의 장황한 소개가 끝나고 위원장의 인사말 차례가 되었다.
TV 화면에 위원장의 모습이 비치자 방안의 모두가 숨을 죽인다.
어제 공항에서의 위원장 연설은 대특종이었다.
어느 신문은 몇마디의 말, 합해서 1분도 안되는 연설 내용으로 남북한
60년간의 한을 풀었다고 극찬을 했다. 그러나 아직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조철봉도 다 보았지만 밥을 몇술 떠먹다 만 기분도 들었던 것이다.
그때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귀빈 여러분,
저는 먼저 경제 협력을 설명드리기 전에 사과의 말씀부터 드립니다.”
시작했다.
조철봉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고 둘러앉은 일행도 마찬가지다.
모두 기대에 찬 표정으로 화면을 본다.
위원장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까지의 남북간 경협은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따라서 생산성을 무시한 결과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화면에 초청된 한국의 인사들이 비친다.
모두 긴장한 표정이다.
위원장은 지금 자아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다.
화면이 다시 위원장을 비춘다.
“나는 남북간 경협이 급격히 발전되면 체제가 흔들릴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의 실패한 정책에 대한 인민들의 질책이 두렵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그친 위원장이 심호흡을 하는 것까지 화면이 비치고 있다.
방안은 숨소리도 나지 않는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화면에서도 기침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때 위원장이 말을 잇는다.
“그러나 이제 다 버리고 정직하게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곧 한국 대통령 각하와 허심탄회하게 보다 자유롭고, 인권을 존중하는
새 경협 계약을 체결할 것입니다.”
위원장의 목소리가 떨렸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미어졌다.
(2213)공존-14
그날 오후 최갑중이 시내 커피숍에서 옆쪽 테이블에 앉은 사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 쇼야 쇼.”
50대 후반쯤 되는 사내 넷이 둘러앉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오늘 오전의 위원장 연설을 화제로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사내가 말을 잇는다.
“순진한 놈들이나 그 말에 넘어가지, 누가 속겠어?
냉정하게 계산해서 앞으로 손해 볼 일은 하지 말아야 돼.
그까짓 말 몇 마디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맞다.”
하고 옆에 앉은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철저히 주고받는 거다. 이젠 대가 없는 경협따위는 필요없어.
그냥 퍼 주는 건 안 된단 말이야.”
“하지만.”
앞쪽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야, 그렇게 말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변화 아니냐?
난 그 값으로 세금을 더 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
북한에 떼어 주라고 말이야.”
“동감이다.”
이제는 그 옆에 앉은 사내가 거든다.
“아무리 쇼라도 그렇게 말하는 게 쉽냐?
난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나려고 하더라.”
“이 새끼는 어제도 울었다며?”
하고 방금 말한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계산해야 한다는 사내가 묻는다.
그러자 퍼 주는 건 안 된다는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런 새끼들이 있으니까 쇼가 통하는 거야. 빙신들.”
“이 새끼는 세금도 몇 푼 안 내는 새끼가.”
하고 세금 더 내고 싶다는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옆에 사내가 응원했다.
“시발 놈들이 심보가 비비 꼬여 갖고 뭐든지 색안경을 끼고 본다니까.”
그러자 둘씩 나뉜 친구들의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마침 그때 최갑중이 기다리던 손님이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기다리셨지요?”
하면서 다가온 사내는 대한자동차의 기조실장 이윤덕 사장이다.
50대 중반의 이윤덕은 사주이며 회장인 한태성의 최측근이다.
서둘러 온 때문인지 이윤덕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다가온 종업원에게 얼음을 넣은 주스를 시키고 난 이윤덕이 웃음 띤 얼굴로 최갑중을 보았다.
“바쁘시죠?”
이윤덕은 최갑중이 조철봉의 심복인 것을 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조철봉은 이번 회담에서 언론이 가장 많이 부각시킨 한국측 인사였다.
조철봉이 바쁘면 당연히 최갑중도 바쁜 것이다.
이윤덕의 시선을 받은 최갑중이 정색하고 말한다.
“제가 뵙자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최갑중이 힐끗 옆쪽 테이블에 시선을 주었다.
친구 넷은 아직도 갑론을박하는 중이었는데 결론이 안 났다.
최갑중이 목소리를 낮춘다.
“회장님께서 오늘 저녁에 북한측 통전부장이 주최한 만찬에 가시죠?”
“예, 그렇습니다.”
긴장한 이윤덕도 상체를 앞쪽으로 숙인다.
잘생긴 용모의 두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다.
최갑중이 말을 이었다.
“식사 중에 회장님을 모시러 사람이 갈 겁니다. 그때 따라 나오시죠.”
눈만 껌벅이는 이윤덕을 향해 최갑중이 빙긋 웃었다.
“저희 사장님하고 회장님께서 10층으로 올라가 위원장님을 만나시는 겁니다.”
이윤덕은 어느새 고인 입안의 침을 삼킨다.
위원장과 비밀 면담인 것이다.
긴장이 안 될 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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