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816. 공존 (5)

오늘의 쉼터 2014. 10. 10. 08:01

816. 공존 (5)

(2208)공존-9 

 

 

민유미가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채 잠깐동안 그대로 있다.

그순간 조철봉의 머릿속에 수많은 환상이 스치고 지나간다.

민유미의 절정에 이른 표정도 떠올랐고 다소 비음이 섞인 탄성도 들리는 것 같다.

피부는 부드럽고 탄력이 넘칠 것이었다.

드러난 피부와 움직임만 봐도 연상이 된다.

꿈틀거리는 몸, 문어의 흡반처럼 달라붙어 떼어지지 않는 사지,

비린 것 같으면서도 달콤한 정액의 냄새, 몇초밖에 안되는 순간이었지만

생각은 영화의 수십개 장면처럼 이어서 지나간다.

그때 민유미가 시선을 내린다.

민유미도 조철봉의 머릿속 생각은 다 읽지 못했겠지만 분위기는 느낀 것이 분명했다.

눈밑이 조금 붉어져 있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강한 충동은 곧 메시지로 전달되는 법이다.

그때 조철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로 다 아는 선수들끼리 이제 앞뒤 잴 필요는 없지,

내 말은 우리 둘 사이에 섹스가 끼어들어도 업무에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야.”

“그렇겠지요.”

민유미가 또렷하게 말을 받더니 빙긋 웃었다.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없으신 것 같더군요.”

“글쎄.”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음식과 함께 나온 소주 주전자를 들었다.

소주를 주전자에 담은 것이다.

민유미의 잔에도 소주를 채운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욕심이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어떤 욕심 말인가요?”

그러자 한모금에 소주를 삼킨 조철봉이 지그시 민유미를 보았다.

“민유미씨가 CIA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에 금방 이해가 되더구먼.”

민유미는 눈만 크게 떴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 대한 선입견을 품고 있는 것 같더라고.”

“…….”

“요즘은 그것이 차츰 희미해졌고.”

다시 잔에 술을 따른 조철봉이 빙그레 웃었다.

“민유미씨가 진짜 한번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까지 참아 보는 거지 뭐.”

“그건 꼭 말로 해야 될까요?”

“분위기만 보면 알 수 있어.”

“지금은요?”

하고 민유미가 웃지도 않고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다.

진즉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유미의 선입견은 민족적인 것일 수도, 조철봉 개인에 대한 선입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사라졌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민유미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말했다.

“좋구먼, 뜨거워.”

“뜨겁다는 건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비슷하지.”

“그럼 여기서 해요?”

하고 민유미가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는 것이 꼭 싸울 자리를 찾는

동네 깡패처럼 긴장되어 있다.

“밥상 앞에서 하는 것이 좀.”

조철봉이 말했을 때 민유미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한국에서는 밥상 앞에서 하는 것이 풍습에 어긋납니까?”

“자리도 좁고.”

“상을 치우라고 할까요?”

그러자 조철봉이 마침내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이제 마음을 연 것 같구먼, 민유미씨.”

“그래요, 말하다 보니까 흥분이 되기도 해서요.”

마음을 열어놓으니 대답도 솔직해졌다.

민유미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다. 

 

 

 

(2209)공존-10

 

 

그때 조철봉이 머리를 젓는다.

“다음에.”

마치 결재를 미루는 사장의 모습이다.

그러나 민유미가 싱긋 웃는 것이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닷새후인 6월10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제주도에서 열렸다.

한국 대통령은 두 번이나 평양을 찾아갔지만 북한 통치자는 이번이 처음이다.

남북한 국민의 관심은 모두 제주도로 모여졌고 언론의 취재열기는 폭발적이다.

오전 10시, 평양에서 날아온 조선민항기가 제주 공항에 착륙하는 장면이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생방송이 되고 있다.

조철봉은 최갑중 등과 함께 제주에 내려와 있었지만 물론 회담 참가 요원은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실장 유세진뿐만 아니라 통전부장 양성택이 가까운 곳에 있어달라는

부탁을 해왔기 때문에 제주시의 작은 호텔방 안에서 TV를 보고 있다,

이제 비행기에 내린 위원장이 마중 나온 한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나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드디어 한국에 왔구먼요.”

소파에 둘러앉은 최갑중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말한다.

방안에는 김경준과 민유미까지 모였는데 모두의 시선이 TV에 집중되어 있다.

사열이 끝나고 한국 대통령이 인사말을 한다. 절제된 표현을 썼지만 대통령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옆쪽의 연단에 서있는 위원장도 마찬가지, 굳어진 표정이다.

대통령의 환영인사는 간단하게 끝났는데 조철봉은 내용에 만족했다.

감성적인 표현은 없었고 평화와 공존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위원장의 차례가 되었을 때 방안 모두는 긴장했다.

한국 대통령과는 달리 북한 위원장은 파격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언론 측에서 보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때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남북한은 평화 공존해야 됩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여기 왔습니다.”

또랑또랑하고 굵은 목소리,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제주 공항의 수많은 청중도

순식간에 긴장으로 굳어져 있는 것이 화면으로도 보인다.

조철봉은 위원장이 북남이 아니라 남북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했다.

북측은 항상 자기들을 먼저 내세워 북남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위원장이 남북이라고 했다.

그때 다시 위원장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는 6·25전쟁 같은 비극이 이 땅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조철봉은 숨을 죽였다. 봐라,

위원장이 또 한 건 한다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일어났지만 참은 것이다.

모두 숨을 죽였을 때 위원장의 말이 방안을 울렸다.

“6·25전쟁으로 돌아가신 남북한 장병 여러분,

그리고 인민 여러분께 뒤늦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머리를 든 위원장의 얼굴은 굳어져 있다.

“아아.”

하고 먼저 비명 같은 탄성을 뱉은 것은 김경준이다.

최갑중은 입만 딱 벌리고 있다. 민유미는 눈만 깜박였고 조철봉은

목이 메는 바람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순간 화면에 청중이 비쳤다.

노인 몇명은 눈을 부릅뜬 채 숨도 죽이고 앉아 있다.

대부분의 청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아직 현 상황이 실감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때 위원장의 말이 이어진다.

“나는 한민족의 위대성을 세계 만방에 알려주신 한국 국민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같은 민족으로서 자랑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모두 홀린 듯이 TV를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는다.

TV화면에 비친 청중도 그렇다. 세계 각국의 청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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