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 공존 (9)
(2216)공존-17
“괜찮을까요?”
식사를 마쳤을 때 한태성이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묻는다.
그러나 옆자리의 기조실장 이윤덕 사장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제주호텔의 지하 한식당 안, 셋은 지금 방안에 앉아 있다.
조철봉이 잠깐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위원장님이 직접 말씀하신 겁니다. 저라면 믿겠습니다.”
한태성은 위원장이 말한 자동차 공장에 대한 조건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심호흡을 한 한태성이 말한다.
“그런 조건이라면 최상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도 그런 특혜를 주는 나라가 없지요. 다만.”
그렇다. 다만 지금까지의 행태를 보면 북한 당국은 믿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개성공단만 해도 걸핏하면 출입통제에다 얼마 전에는 한국인 직원 하나를 수십일간
붙잡아 놓기도 했다.
마음놓고 입출입도 못하는데 누가 투자를 하겠는가?
문 딱 닫고 나가라, 하면 끝장이다. 수백억원 투자해서 지은 공장, 원부자재가 순식간에 없어진다. 그때 기조실장 이윤덕이 말을 잇는다.
“회장님 말씀을 들었는데 위원장이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해 볼 만하다고 회장님도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한국군을 주둔시켜도 된다는 말씀, 사실일까요?”
“아, 그럼요.”
정색한 조철봉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위원장이 빈말 하시겠습니까?”
“공장 부지를 임차지로 넘겨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이윤덕이 조심스럽게 묻자 조철봉이 다시 머리를 끄덕인다.
“저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심호흡을 하고 난 한태성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조 사장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예, 말씀하시죠, 회장님.”
“조 사장님이 저희 대한자동차 사장급 고문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만.”
한태성이 정색하고 말을 잇는다.
“북한에 자동차 공장을 설립하게 되면
조 사장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
“아마 북한측도 반기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아시다시피 저도 일이 많은 터라.”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한태성이 손까지 젓는다.
“매일 출근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필요할 때 도움만 주시는 것으로,
북한 당국과의 통로가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더니 덧붙인다.
“조 사장님만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하면서 한태성이 머리를 깊게 숙여 보였고,
그것을 본 이윤덕도 서둘러 따라 숙였다가 이마가 밥그릇에 닿았다.
“알겠습니다. 미력하지만 맡겠습니다.”
마침내 조철봉이 말하자 한태성이 얼굴을 펴고 웃는다.
“감사합니다. 신세는 갚겠습니다.”
고문역이지만 대한자동차의 사장대우라니,
상사맨의 꿈을 이루고도 남는 위치가 아닌가?
대기업 임원이 되는 것은 군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대기업 사장이라니, 조철봉은 실감이 나지 않아 한동안 멍한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 된 것도 모두 위원장 덕분이다.
한식당에서 한태성과 헤어진 조철봉이 휴대폰을 꺼내들고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금방 최갑중이 받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밤 같은 때 마셔야지 언제 마시겠는가?
(2217)공존-18
제주시에 룸살롱이 왜 없겠는가? 국제관광도시로 소문이 난 제주시인 것이다.
룸살롱 문화는 대한민국이 발전시켰으며 지금도 세계 최고급 품격의 룸살롱을 배출한다고
믿는 조철봉이다.
룸살롱은 성적 배설만을 위한 장소가 아닌 것이다.
사교와 휴식, 그리고 협상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물론 성(性)에 대한 환상만큼 인간에게 생(生)의 활력을 주는 요소는 드물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감동하는 것이다.
아니, 감동해야 정상이라고 조철봉은 믿는다.
그날 밤 조철봉은 김경준과 최갑중을 데리고 룸살롱 ‘한라산’에 앉아 있다.
한라산은 최고급이라고 소문이 난 룸살롱이다.
시설은 요란스럽지 않으면서 고급스럽게 꾸며졌으며 아가씨들도 세련되었다.
술과 안주가 놓여지고 마담의 인사까지 다 끝나고 나서 방 안에 세 쌍만 남게 되었을 때
조철봉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서울 특급보다 나으면 낫지 떨어지지 않는다.”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옆에 앉은 파트너에게 묻는다.
“네가 제주산이 아니라는 데 10만원 걸지.
이 좁은 땅에 너 같은 미인이 태어날 확률은 아주 적을 거야.”
“정말이세요?”
파트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입맛을 다신다.
“그럼 내가 빈말하겠느냐? 내가 이래 봬도….”
북한 위원장이 유일하게 신임하는 남조선 사업가라고 말할 뻔했던 조철봉이 입을 다물었다.
파트너가 마음에 들어서 들뜬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 파트너가 조철봉에게 묻는다.
“저기, 제 주민증 가져와도 될까요?”
“어? 그래라.”
엉겁결에 대답한 조철봉이 문을 열고 나가는 파트너의 뒷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을 때 최갑중이 말했다.
“정말 제주산인 것 같은데요?”
“그럼 내가 10만원 잃는 거지.”
술잔을 쥔 조철봉이 다시 입맛을 다셨다.
“제주도를 깔봤다고 생각한 것 같구먼. 난 저를 치켜세우려고 한 말인데.”
“애향심이 강하군요.”
하고 김경준이 말했을 때 최갑중이 거들었다.
“아니면 돈독이 올랐든가.”
“난 저런 성품이 좋다.”
조철봉이 턱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적극적이고 애향심도 강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아.
금방 10만원 챙기는 것 봐라. 너희들도 저래야돼.”
하고 방에 남은 두 아가씨에게 말한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조철봉의 파트너가 서둘러 들어섰다.
가쁜 숨을 뱉으며 옆에 앉은 파트너가 조철봉에게 두 손으로 주민증을 내밀었다.
눈이 반짝였고 얼굴은 조금 상기되었다.
주민증을 받아 본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는다.
문영미. 주민증 나이는 26세가 되었다.
물론 주민증 발급지는 제주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주민증을 돌려주고는
지갑에서 10만원권 한 장을 꺼내 문영미에게 주었다.
“내 고향이 어딘가 맞혀볼래?”
하고 조철봉이 묻자 문영미는 웃지도 않고 머리를 젓는다.
“내기는 싫어요.”
그러자 최갑중이 킥킥 웃었다.
“보통이 아닙니다. 사장님.”
갑중은 다른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실 때는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조철봉이 문영미의 허리를 당겨 안고는 귀에 입술을 대고 물었다.
“오늘 밤 나하고 같이 있을까?”
그러자 문영미가 다시 차분한 표정을 짓는다. 조철봉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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