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 공존 (2)
(2202)공존-3
한영기 비서관한테서 전화가 왔을 때는 오후 4시경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한영기가 잔뜩 공손한 모양으로 말했지만 그 말을 듣고 안 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로부터 30분쯤 후에 조철봉은 청와대에서 대통령실장인 유세진,
비서관 한영기와 셋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유세진이 먼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뵙자고 했는데요. 이거 번번이.”
하면서도 가차없이 말을 잇는다.
“지금 평양에서 우리측 대표단이 북측과 의제를 조율하고 있는데
조 사장님이 한번 가 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유세진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위원장님을 한번 만나 주시지요. 조 사장님은 직접 면담이 되시지 않습니까?”
“무슨 일 때문입니까?”
긴장한 조철봉이 묻자 유세진이 입맛부터 다시고 나서 대답했다.
“북한은 이번 정상회담의 의제를 한반도 평화와 남북협력사업으로 정하자고 했습니다.
핵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논의하자는 주장이었지요. 이것은.”
엽찻잔을 들어 한모금 삼키고 난 유세진이 말을 잇는다.
“회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작전으로 서로 이해가 되었지요.
그런데 오늘 오전에 갑자기 북측이 이번 회담에서 핵 문제는 빼겠다고 나왔다는 겁니다.”
“… ….”
“그 이유는 한국 언론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이 이번 회담에서 핵 폐기에 대한 전격적인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미리 보도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보도는 조철봉도 어제 보았다. 오늘도 신문에는 핵 폐기에 대한 보도가 가득 차 있다.
북한측 입장에서 보면 시쳇말로 김이 샜을 것이다.
생색은 한국이 다 낸다면서 화가 솟구칠 만도 했다. 유세진의 말이 이어진다.
“조 사장님께서 위원장님을 만나 한국 언론 보도에 대한 양해를 구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언론은 제 마음대로 추측 기사를 내거든요.
우리가 협조 요청을 해도 너무 엄청난 일이라 특종을 내고 싶어서 안달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고는 유세진이 절박한 표정을 짓고 바라보았으므로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는다.
“알겠습니다. 연락을 하지요.”
“우리가 미리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개성을 통해 바로 평양까지 육로로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유세진의 말을 한영기가 받는다.
“우리측 대표단 일행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차도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30분쯤 후에 조철봉은 최갑중과 함께 자유로를 달리는 승용차 안에
앉아 있는 몸이 되었다.
“제기랄.”
앞좌석에 운전사와 청와대에서 따라온 수행원이 타고 있었지만 조철봉이 투덜거렸다.
이렇게 북에 갈 줄은 모르고 그냥 청와대까지 동행했던 최갑중이 먼저 앞쪽을 본다.
다시 조철봉이 투덜거렸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게 있어야지. 이건 만날 부탁이나 하고 국물은 없으니
통 의욕이 일어나지 않는구먼.”
앞자리의 수행원은 몸을 굳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떡고물이 있어야 일할 맛이 나는 거야. 그렇지 않으냐?”
하고 조철봉이 묻자 최갑중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요.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는 거죠.”
최갑중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2203)공존-4
“바쁘시구만.”
평양에서 만난 양성택이 웃음 띤 얼굴로 말한다.
하긴 그렇다. 오전 11시에 소공동 커피숍에서 이춘수를 만난 것을 시작으로 민유미,
그리고 청와대를 거쳐 지금 평양에 와 있다.
오후 9시반, 둘은 고려호텔 지하의 가라오케 밀실 안에서 마주 보며 앉아 있었는데
양성택이 미리 와서 술과 안주를 벌여 놓았다.
따라 웃은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양성택에게 내밀었다.
자유로를 달리던 중 민유미한테서 연락을 받은 것이다.
쪽지에는 북한과의 비밀 회동에 나올 미국측 대표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게 미국측 대표 이름입니다.”
쪽지를 받은 양성택이 이름을 보더니 얼굴을 펴고 웃는다.
“이 친구면 적당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제가 무슨, 그냥 말을 전하기만 했을 뿐인데요.”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이 이름을 전하려고 오신 건 아닐 테고.”
조철봉의 잔에 양주를 채우면서 양성택이 묻는다.
양성택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청와대에서 저를 보냈습니다. 양해 사절로 말씀이죠.”
양성택은 눈만 껌벅였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언론이 모두 흥분 상태여서 과장, 추측 보도를 해 대는 통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들떠서 정보를 흘린 건 절대 아니라고 합니다.”
“…….”
“가서 꼭 해명을 해 드리라고 저를 보낸 겁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위원장님을 만나뵐 수 있을까요?”
몸을 반듯이 세운 조철봉이 정색한 채로 말을 잇는다.
“저한테 위원장님을 직접 뵙고 사과 말씀을 드리라고 하더군요.”
“누가 말씀입니까?”
“대통령실장이 그랬는데 그것이 곧 대통령님 뜻이 아니겠습니까?”
“위원장동지께 말씀 올리지요.”
마침내 그렇게 말한 양성택이 길게 숨을 뱉더니 술잔을 쥐며 말한다.
“역사적인 정상회담에 미리 흙탕물을 끼얹으면 안됩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가다듬고 임해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지금 평양에 와 있는 남조선측 회담 실무자들도 공명심에만 사로잡혀 서두는 것 같습디다.
그들에 비하면 조 사장님이야말로 충신이시오.”
“그, 그렇게까지.”
자유로를 달리다가 문득 짜증이 일어나 떡고물 이야기를 꺼냈던 조철봉이다.
그때 양성택이 벨을 누르며 말한다.
“모처럼 둘이 평양에서 만났는데 오늘은 한번 놀아 보십시다.”
그러고는 얼굴을 펴고 웃는다.
“내가 이래 봬도 한국 노래 1백개는 줄줄 외운단 말입니다.”
곧 방문이 열리더니 지배인이 들어섰으므로 양성택이 아가씨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지배인은 마치 돌격 명령을 받은 특공대 조장 같은 표정을 짓고 방을 나가더니
10초도 안되어서 아가씨 둘을 전리품처럼 달고 들어왔다.
그 순간 조철봉은 숨을 삼킨다.
다음 순간에는 목이 메었으며 곧 가슴이 아래로 늘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조철봉의 옆으로 아가씨 하나가 다가와 인사를 하더니 앉았고, 지배인은 방을 나간다.
이 동작들이 꿈결에서처럼 진행되고 있다.
“조 사장, 조 사장.”
이윽고 조철봉은 양성택의 부르는 소리에 눈의 초점을 맞췄다.
양성택이 웃는다.
“조 사장님, 갑자기 넋이 나가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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