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814. 공존 (3)

오늘의 쉼터 2014. 10. 10. 08:00

814. 공존 (3)

(2204)공존-5

 

 

정신을 차린 조철봉이 여자의 얼굴에 초점을 맞췄다.

조금 전에 인사를 했지만 잠깐 넋이 나간 바람에 잊어먹었다.

“이름이 뭐라고?”

“이정자입니다.”

얼마나 고운 이름인가? 자(子)돌림이나 숙, 희, 순 등의 여자 이름 끝이 일본식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조철봉은 그것이 차라리 서양식 이름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이름이야 없겠지만 이비비안, 최모나리자 등의 서양 이름은 어쩐지 조철봉에게는 어색하다.

“모나리자, 새우젓 좀 가져와라.”

“비비안, 김치찌개 다 끓였니?”

하는 걸 상상하면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날 밤 양성택은 한국 노래 100곡을 외운다고 자랑한 것을 증명해 보였다.

토종 한국인 조철봉보다도 더 한국 노래를 잘 불렀다.

손담비의 ‘미쳤어’는 물론이고 원더걸스의 ‘노바디’는 춤까지 앙증맞게 추면서 부르는 것이다.

그동안 조철봉은 이정자를 충분히 익혀 놓았다.

이정자는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에 서글서글한 눈, 복스러운 콧날에 단정한 입술을 갖춘

북방 미인이다.

한반도에서 남방, 북방 따지는 건 우습지만 환경의 영향을 받아 미인의 기준은 분명히 다르다.

한국은 날씬한 몸매에 서구적인 용모를 제일로 치지만 북한은 다르다.

몇 년 전 응원차 한국에 온 북한 미인들을 떠올리면 비교가 될 것이다.

이정자는 양장 차림이어서 테이블 밑으로 다리가 드러났다.

한마디로 건강한 몸매다. 팔로 이정자의 허리를 감아 안자 허리살도 만져졌다. 탱탱하다.

조철봉이 이정자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묻는다.

양성택은 지금 파트너와 함께 앞쪽에서 패티김의 ‘사월이 가면’을 부르고 있다.

“너, 오늘밤, 나하고 할 수 있지?”

그러자 이정자가 머리를 끄덕인다.

눈밑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네, 선생님이 원하시면요.”

“내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더냐?”

“네, 그렇습니다.”

“자고 가는 거지?”

“내일 아침 6시에는 나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넌 뭐하고 있어? 직업이 뭐지?”

“그건.”

난처한 표정이 된 이정자가 힐끗 앞쪽을 보았다.

양성택은 2절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이는?”

“스물넷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허리에 둘렀던 손을 내려 스커트를 들쳤지만 이정자는 가만 있었다.

팬티 안으로 손가락을 뻗쳤던 조철봉이 문득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뱉고는 손가락도 빼내었다.

그러자 이정자가 힐끗 조철봉을 보았다.

맑은 눈이다. 그래서 눈동자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선생님, 이번 북남회담 준비하려고 오셨지요?”

조심스럽게 이정자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응, 왜?”

“위대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낮지만 분명하게 이정자가 말하고는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두어 번 눈을 끔벅였다.

“위대하다니? 그렇게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하시는 선생님께 봉사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 ….”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한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다. 

 

 

 

 

(2205)공존-6

 

 

그러나 조철봉은 그날밤 이정자를 방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다음날 위원장 면담을 신청해놓은 상황인 것이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쯤은 자제할 수 있는 조철봉이다.

그쯤 자제를 못하면 어떻게 두시간짜리 행사를 치르겠는가?

다음날 오전 10시가 되었을 때 조철봉은 양성택과 함께 주석궁의 소접견실에 앉아 있다.

지금까지 여러번 위원장을 만났지만 오늘도 조철봉은 긴장으로 굳어진 모습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회담이 될 겁니다.”

양성택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말했을 때 문이 열리더니

경호원의 안내를 받은 위원장이 들어섰다.

“여어, 조사장이 요즘 바쁘군 그래.”

조철봉의 인사를 머리만 끄덕여 받은 위원장이 앞쪽에 앉으면서 말했다.

인사를 마친 조철봉과 양성택은 위원장과 마주 보며 나란히 앉는다.

“내가 찾아온 목적은 들었어.”

불쑥 말한 위원장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받치고는 두손을 모아 쥐었다.

양성택한테서 보고를 받은 것이다.

“어쨌든 한국 언론이 너무 앞서가고 있어.

그러니까 회담 의제에서 핵문제는 빼기로 하지.

그것을 분명히 하도록 대표단한테도 말해 놓았네.”

한마디씩 차분하게 말한 위원장이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내가 극적 효과를 기대하고 그런 연출을 하는 것이 아냐.

곧 미국측 밀사하고도 상의를 하겠지만 핵은 맨 나중에 협의할 문제 중의 하나야.

그렇게 보고해 주게.”

“알겠습니다.”

조철봉이 머리를 숙이고는 소리죽여 숨을 뱉는다.

미국측 밀사는 민유미를 통해 주선해 주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남북한의 비밀 연락은 조철봉이 맡고 있는 셈이다.

그때 위원장이 손으로 턱을 고이고는 조철봉에게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묻는다.

“남조선 인민들이 나한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예? 그, 그것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조철봉은 나름대로 생각해 본 적은 있다.

사람마다 다 같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인간도 있다.

위원장이 시선을 주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부터 했다.

“이건 제 생각이었습니다만 처음에는 우리나라,

즉 한국이 북한에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위원장이 머리만 끄덕였고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뭘 주면서도 굽실거리고 받는 쪽에서는 고자세였으니까요.

그걸 보면 자존심이 상했고 저절로 정권에 대해 욕이 나왔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까 아예 남북 관계는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어지더군요.”

“재미있군. 계속하게.”

웃음 띤 얼굴로 위원장이 말했지만 옆에 앉은 양성택은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꾸 조철봉을 힐끗거린다. 말을 하다보니까 작심이 된 터라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이젠 남북 관계는 정상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는 분은 남북 정상뿐입니다. 이미 한국은 준비가 되었으니….”

“내가 결단을 해야 할 차례라는 말인가?”

말을 자른 위원장이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고는 양성택에게 묻는다.

“나한테 이런 말 하는 동무는 조철봉이가 처음이지? 안 그런가?”

양성택은 굳어서 입도 열지 못하고 있다.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816. 공존 (5)  (0) 2014.10.10
815. 공존 (4)  (0) 2014.10.10
813. 공존 (2)  (0) 2014.10.10
812. 공존 (1)  (0) 2014.10.10
811. 대타협 (13)  (0) 2014.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