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 공존 (1)
(2200)공존-1
조철봉이 다가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이춘수가 일어섰다.
단정한 양복 차림에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소공동 도로변의 커피숍 안이다.
오전 11시, 시내 커피숍은 한가한 시간대가 없다.
지나던 행인들이 불쑥 들어오는 터라 항상 분주하지만 오래 자리잡고 떠드는 손님은 드물다.
“바쁘신데 연락드렸습니다.”
먼저 인사를 그렇게 때운 이춘수가 지그시 조철봉을 보았다.
이춘수가 북한에서 파견된 요원인지 한국 국적의 시민인지 조철봉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지난번 전(前) 정권의 실세였던 최문식 작전 때 같이 작업을 해 봐서
일에는 틀림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이춘수가 말을 이었다. 태도가 공손하다.
“미국 정부에서 밀사를 파견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소리를 낮춘 이춘수가 조철봉을 보았다.
긴장한 조철봉이 소리죽여 숨을 뱉는다.
북한은 미국과 비밀 협상을 하려는 것이다.
조철봉이 묻는다.
“언제 말입니까?”
“빠를수록 좋다고 하십니다.”
“통전부장 말씀이지요?”
“예, 사장님.”
물잔을 들어 입술을 적신 이춘수가 말을 잇는다.
“3자만 알고 있도록 하자고도 말씀하셨습니다.”
3자라면 남북한과 미국이 될 것이다.
조철봉에게 말한 것은 한국측에 말한 것이나 같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한테 미국 이야기를 하신 건 민유미를 통해 전하도록 하라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민유미가 눈치를 챌 텐데.”
그러자 이춘수가 쓴웃음을 짓는다.
“CIA는 민유미 정체가 탄로났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대로 전해주면 민유미가 쑥스러워할 텐데.”
웃음 띤 얼굴로 말한 조철봉도 지그시 이춘수를 보았다.
“이 내용이 곧장 국정원측에 전해지리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조 사장님이 전하시지 않아도 지금 우리 이야기를 다 듣고 있을 겁니다.”
이춘수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면서 말한다.
“한국 국정원 실력도 보통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조 사장님께서 정식으로 보고는 해 주셔야겠지요.”
“뭐, 그것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문득 머리를 들고 이춘수를 보았다.
“이형, 가족이 다 여기 계십니까?”
“아닙니다.”
이춘수가 머리를 젓더니 말을 잇는다.
“저 혼자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저를 거론하는 건 삼가 주십시오.
전 민유미하고는 달라서 공개되면 입장이 난처해지거든요.”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직 주문도 하지 않았지만 종업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커피숍 안에서 이춘수와 헤어진 조철봉은 소공동의 인도를 걷는다.
그렇다. 민유미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으리라고 CIA가 믿고 있었을 리는 없다.
민유미의 정체에 대해서는 국정원 측에도 이미 말을 해 둔 터라
3국이 서로 알면서 모르는 척해 오고 있었을 것이다.
걸으면서 조철봉이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버튼을 누르는 조철봉의 앞에 미녀가 다가왔으므로 번호를 잘못 눌렀다.
조철봉은 다시 민유미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2201)공존-2
인사동에 한정식 전문 식당이 여러 곳 있지만 각각 상차림이 다르다.
가격에 따라, 전라도 음식도 남북이 또 다르며 젊은 세대를 겨냥한 퓨전 한정식 요리도 있다.
조철봉과 민유미가 마주 앉은 이 식당은 전통 전주식 한정식당이다.
점심시간이어서 방마다 다 찼지만 조철봉과 민유미는 안쪽 밀실에 자리잡고 앉아
한정식 점심을 먹는다.
민유미는 일본계여서 한정식 메뉴에 익숙지 않았고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김치는 한입만 먹었고 전 종류도 깨질깨질 헤쳐보다가 말았다.
젓갈류는 젓가락도 대지 않았으며 된장찌개는 냄새도 맡기 싫은 눈치였다.
그러나 조철봉은 잘 먹는다. 겉절이는 밥을 뜰 때마다 먹었으며 새우젓에 삼합을 싸서
아귀아귀 씹는다.
이윽고 조철봉이 밥 한그릇을 깨끗이 비우더니 민유미의 밥그릇을 보았다.
삼분의 이쯤 남겨져 있다.
“일식당에 갈 걸 그랬군.”
혼잣소리처럼 조철봉이 말하자 민유미가 싱긋 웃었다.
“저, 다이어트 하니까 잘 안 먹어요.”
“별로 찐 것 같지가 않은데.”
“아니, 체중이 좀 나가요.”
“이거 벗겨 봤어야지.”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문득 정색하고 말했다.
“북한이 미국 특사를 원하고 있던데, 정상회담 전에 만나고 싶다는 거야.”
젓가락으로 고사리무침을 집어 올리던 민유미가 다시 그릇에 놓는다.
그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누군지 알려주면 시간, 장소가 정해질 거야. 오늘 그 연락을 받았어.”
그러자 민유미가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긴장한 표정이다.
“비공식으로 만나려는 거죠?”
“그러니까 나를 통해 민유미씨한테 전해주는 것이지.”
“그 말씀 하시려고 절 부르신 건가요?”
다시 고사리를 집으며 민유미가 묻는다.
고사리를 입에 넣은 민유미가 몇번 씹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이 요리.”
“언제까지 회답을 받을 수 있지?”
“오늘 연락을 해서 알려 드릴게요.”
“그럼 됐어.”
묵은지에 삭힌 홍어를 올려 놓으면서 조철봉이 만족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집 삼합 맛이 끝내주는군. 이거 한번 먹어보지 그래?”
“내가 그쪽 일을 하고 있다는 거 언제부터 알고 계셨죠?”
육회를 젓가락으로 집으면서 민유미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삼합을 젓가락에 든 채 말했다.
“오래되었어.”
“그러면서 아무 말 안 하셨군요.”
“말할 필요가 있나? 일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거죠. 그렇죠? 지난번에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랬던가?”
“그래서 절 놔두신 건가요?”
“놔두다니?”
“그거요.”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 말한 민유미의 눈밑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
조철봉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거하고는 상관없어.”
“저한테는 맞지 않는 일이었어요.”
“잘 하던데 뭘.”
젓가락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민유미를 똑바로 보았다.
민유미도 머리를 들고 조철봉의 시선을 받는다. 서로 소득은 있었다.
서로 이용하면서 성과를 올린 것이다. 이것도 윈윈인가?
사회에서는 이것을 공존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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