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9. 대타협 (1)
(2175)대타협-1
방으로 들어선 조철봉이 저고리를 의자 위에 걸치더니 선반을 턱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뭘 드실까?”
“위스키로 하죠.”
선반으로 다가간 민유미가 스카치 위스키를 집었다.
한국인이 잘 마시는 술이다.
민유미의 부모는 이민 2세였으니 부모대부터 미국인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미국은 다민족국가이며 지금은 흑인이 대통령인 기회의 땅이다.
능력만 있으면 인정받는 사회, 이민 3세대인 민유미, 본명 나오코는
할아버지의 고향인 요코하마에 가본 적도 없다.
위스키 병과 잔을 들고 소파로 다가온 민유미가 잔 두 개에 술을 따랐다.
민유미의 표정은 차분했고 입술은 야무지게 다물어져 있다.
“자, 드세요.”
제 잔은 왼손에 그리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조철봉에게 건네주면서 민유미가 묻는다.
“뭘 위해서 건배할까요?”
“대타협을 위하여.”
술잔을 든 조철봉이 말하자 민유미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타협이죠?”
“남북한.”
한모금 술을 삼킨 조철봉이 빙그레 웃더니 말을 잇는다.
“민유미씨하고 나.”
“남북한은 그렇다치고 저하고 사장님이 뭘 대타협씩이나.”
“민유미씨한테서 그냥 가실 거냐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으니 진짜 대타협이 된 것이지.”
그러자 민유미가 한입에 위스키를 삼키더니 입을 쩍 벌린다.
식도를 타고 불덩이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철봉이 제 잔에 술을 채우면서 말을 잇는다.
“내가 미리 말해둘 것이 있는데.”
민유미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빙긋 웃었다.
“난 나하고 같이 일하는 여자와는 남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어.”
“…….”
“내 소문은 내 후배인 이영규한테서 대충 들었겠지만 그놈도 이 원칙은 모르고 있을 걸?”
민유미는 표시 안나게 심호흡을 한다.
참 별놈의 원칙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조그맣게 실망감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낭패감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속물근성을 발견한 후의 죄책감일 것이다.
시선을 들었더니 조철봉이 신바람이 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역겨운 놈.
“여자가 쌔고 쌨는데 같이 일하는 여자를 건드려 일에 지장을 줄 수는 없지. 안그래?”
“그런 것 같네요.”
대답을 안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대답하고 술잔을 들었지만 저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에 나오면서 팬티도 흰색으로 갈아입고 나온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뿐만이 아니다. 지난번에도 팬티를 갈아입고 조철봉을 만났다.
조철봉 앞에서 옷을 벗을지도 모른다는 가상 하에서 일어난 행동이다.
그때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붙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민유미를 보았다.
“하지만 예외는 있어.”
옳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치미를 딱 뗀 표정을 짓고 민유미가 조철봉을 보았다.
너무 서론이 길다, 이놈아.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여자가 먼저 덤비면 어쩔 수가 없더구먼. 말릴 명분도 없고 거짓말도 싫어서.”
그럼 날더러 먼저 덤비란 말이냐? 개자식아.
(2176)대타협-2
당연히 민유미는 덤벼들지 않았다.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리는 없을 것이었다.
다음 날 오전, 다시 인천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 조철봉과 민유미는 나란히 앉아 있다.
“보상금은 얼마나 될까요?”
안전벨트 사인이 꺼졌을 때 민유미가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바라보며 묻는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면세품목 리스트를 뒤적이던 조철봉이 머리를 조금 기울였다.
“글쎄, 내 생각이지만 30억불쯤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30억불요?”
“이젠 몇 억불 따위는 껌값이야.”
“껌값이라뇨?”
한국말은 잘했지만 속어는 서툰 민유미가 정색하고 묻자 조철봉이 정색했다.
“잔돈이란 말이지, 동전.”
“아아.”
“많을수록 좋아, 나한테는.”
조철봉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면서 말을 잇는다.
“내 몫이 많아질 테니까.”
“그럼.”
“양쪽에서 받아낼 테니까.”
“정부 차원에서 협상을 할 텐데 그것이 가능할까요?”
“잘 모르는군.”
입맛을 다시고 난 조철봉이 은근하게 웃는다.
“공식 협상만으로는 결론을 못 낸다고. 비밀협상이 있어야 돼. 그래야 서로 이득이란 말이지.”
눈만 껌벅이는 민유미를 향해 조철봉이 머리를 기울였다.
그래서 조철봉의 입과 민유미의 귀가 가까워졌다.
“예를 들면 북한이 처음에 50억불을 부르고 나서 나중에 30억불로 합의를 하는 거야.
그 대신 비공식으로 10억불을 따로 받는 것이지. 그럼 양쪽이 다 이득이란 말야. 안 그래?”
“예, 그 그건.”
이득은커녕 돈 내는 놈들만 조금 깎였을 뿐이겠지만 조철봉의 말을 계속 들으려면 하는 수 없다.
머리를 끄덕여 보인 민유미를 향해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내가 중간에서 10억불을 깎고 그 대가로 3억불쯤 먹는단 말야.
물론 그 3억불은 나하고 북한 고위층하고 둘이 나눠 먹는 것이지.”
“그, 그러면.”
“보상금을 내는 측은 총 40억불을 내는 셈이지만 북한한테 가는 자금은 37억불,
중간에서 중개자 몫이 3억불이야.”
“가능할까요?”
“북한측이 손발만 맞춰 주면 돼.”
그러자 어깨를 늘어뜨린 민유미가 이제는 소리내어 긴 숨을 뱉는다.
이건 엄청난 사기꾼인 것이다.
이렇게 통 큰 놈은 처음이다. 그때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다 속고 속이면서 사는 거야. 속는 줄 알면서도 속아 주고, 속아 주는 척하면서
또 속이는 것이지. 그러다 보면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돼.”
무슨 말인지 아리송해진 민유미가 입만 반쯤 벌렸을 때 조철봉이 빙긋 웃는다.
“다 제 이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한다는 거야.
특히 나라 사이의 일은 더 그래. 내가 느낀 점이 그거야.”
다시 민유미의 귀에 입술을 가깝게 붙인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북한이 전쟁 안 한다고 맹세한 다음 날 한국을 침략해서 점령했다고 상상해 봐.
거짓말했다고 한국 국민들이 항의하면 북으로 돌아갈까?”
조철봉이 저 혼자 머리를 젓고 대답한다.
“아니지. 그 거짓말은 전략으로 칭송을 받을 거야.
그러니까 큰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냐.”
돈 먹는 변명 같지만 그럴듯하다.
그래서 민유미는 가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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