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1. 새출발(1)
(2101)새출발-1
개혁이란 제도나 기구 등을 새롭게 뜯어 고친다는 말인데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가장 많이 쓴 단어 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그래서 쓰는 인간이나 듣는 국민이나 다 식상해 있었지만 ‘개혁당’으로 당명을
가칭하자고 조철봉이 제의했을 때 박준수부터 찬성을 했다.
하긴 해방 이후의 당명을 보면 자유, 민주, 국민, 평화 등이 가장 많이 들어갔고
근래에 들어서 순 한국말 당명이 몇개 있었지만 ‘개혁’이란 단어가 낀 적은 없었다.
개혁당의 창당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고 조철봉은
창당준비위원의 말석을 차지했다.
준비위원장은 당연히 박준수가 맡았는데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다고 했지만 준비위원장은 물론
모두가 강력하게 부인했다.
국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3개 기관이 거의 비슷하게 개혁당 창당에 대한
지지율이 70%가 넘었다.
지금까지 여당이 파벌로 나뉘어 강력한 지도력을 보이지 못한 데다 야당 또한 무조건
발목잡기식 정당으로만 인식되어 국민들로부터 혐오 대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창당을 발표한 지 1주일 밖에 안되었는데도 현역의원 65명이 1차로 개혁당에 가입했다.
모두 지역구였고 그 중 한국당 의원이 48명, 민족당이 9명, 기타가 8명이다.
“이젠 때가 되었어.”
그날 저녁에 조철봉이 의원회관 안의 의원실에서 최갑중과 김경준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개혁당은 사흘 후에 정식으로 신당 신고를 할 예정이었다.
“내일 의원직 사퇴서를 내.”
김경준에게 말한 조철봉이 웃음 띤 얼굴로 최갑중을 보았다.
“마치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다가 벗는 것 같다. 너는 어떠냐?”
“저요?”
해놓고 최갑중이 입맛을 다시더니 외면하고 말한다.
“저는 비싼 옷 입었다가 도로 돌려주는 것 같은데요.”
“네 분수에 안 맞는 옷이었다.”
“그 옷을 저보다 더 분수가 떨어지는 놈이 주워 입을지도 모릅니다.”
“아슬아슬했어.”
“깨끗했습니다.”
둘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다 김경준이 조철봉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찾을 텐데 어디 계실 예정이십니까?”
“김 보좌관이 맡아줘야겠어. 아니, 내일부터는 김 실장이지.”
조철봉이 웃음 띤 얼굴로 김경준을 보았다.
김경준은 오성산업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며칠 쉬고나서 회사 일을 해야지. 할 일이 많은 사람이야, 나는.”
“사람들이 의원님을 가만둘 것 같지가 않은데요.”
조심스럽게 말한 김경준이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특히 청와대에서 말입니다.”
“며칠 찾다가 말 거야. 틀림없어.”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잘난 놈들이 쌔고 쌨는데 나를 그저 찾는 시늉이나 하겠지. 신경 쓸 것 없다.”
“건성인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의원님.”
“글쎄, 난 이제 내 역할을 다 했다고. 더이상 이용당하고 얼굴 마담 노릇은 안 할 거야.”
정색한 조철봉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졌다.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겨야 돼. 이제 개혁당이 탄생했고 남북관계도 좀 풀리겠지.
당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이고 말야. 난 이제 더 이상 미련이 없어.”
(2102)새출발-2
핸드폰 전원도 꺼놓고 조철봉은 다음날부터 동해안 주문진 근처의 바닷가 빌라에서 기거했다.
이곳의 바닷가는 바위가 많고 모래사장이 없어서 사람이 드물었다.
낚시꾼 서너명이 바위에 앉아 낚시에 열중할 뿐 경치가 좋은 곳도 아니다.
낚시 구경을 하고 돌아온 조철봉을 빌라 마당에 서있던 최갑중이 맞는다.
최갑중이 물었다.
“형님. 저녁은 뭘로 하실까요?”
오후 6시가 되어가고 있다. 빌라는 주인집과도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세워진 단층 독채로
건평은 50평 가깝게 된다.
주방까지 다 갖춰졌지만 최갑중한테 식사 준비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점심은 주문진에서
꽃게찜으로 먹고 들어왔다.
“회에다 매운탕을 먹을까?”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말하자 최갑중은 눈웃음을 쳤다.
“좋지요. 그럼 가시지요. 벌써 여섯시가 되었습니다.”
며칠간 쉰다는 계획도 없이 최갑중만 데리고 서울을 빠져나온 셈이었다.
물론 이은지한테는 사람 피하려고 며칠 떠나 있겠다는 사정을 말했다.
바닷가 길을 따라 주문진으로 운전해가던 최갑중이 백미러를 보면서 묻는다.
“형님, 김 실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요.”
백미러에서 시선을 맞춘 최갑중이 말을 잇는다.
김 실장은 비서실장이 된 김경준이다.
“대통령실장이 김 실장한테 전화를 했답니다.
형님하고 연락이 되면 꼭 전화해달라면서 전화번호를 남겼다는데요.”
“며칠 지나면 잊게 돼.”
조철봉이 등받이에 몸을 붙이며 말한다.
“다 그렇게 되는 거다.”
김경준은 사흘 전에 의원직 사퇴서를 냈고 접수증도 받았다.
이미 박준수는 물론이고 한국당 대표한테도 이야기를 해놓은 터라 놀랄 일은 아니다.
그때 최갑중이 불쑥 말을 잇는다.
“정치인하고 연예인이 비슷한 것 같더만요.
기를 쓰고 언론에 뜨려고 하는 것이나 인기 떨어지면 그냥 묻히는 것까지 말입니다.”
“그것에 중독되면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혼잣소리처럼 말한 조철봉이 쓴웃음을 짓는다.
“매스컴에 보도 안되면 펄펄 뛰거나 의기소침해지는 정치인도 많다는 거야.”
“배우가 다 되는 거죠.”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으므로 당황한 최갑중이 차 속력을 늦췄다.
그러고는 조철봉의 눈치를 살피고나서 핸드폰을 귀에 붙인다.
“예.”
응답을 했던 최갑중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지금 여기 안계시는데요. 무슨 일이십니까?”
했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최갑중이 백미러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알겠습니다. 저도 어디 계신지 모르니까 찾아보겠습니다. 찾으면 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은 최갑중이 길게 숨을 뱉고 말한다.
“청와대 한영기 비서관이라고 하는데요. 꼭 연락 바란답니다.”
“못 찾은 것으로 해.”
“예, 형님. 그런데 제 전번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거 바로 외국으로 나가는 건데 잘못한 것 같다.”
“며칠 지나면 잠잠해지겠지요.”
이제는 최갑중이 조철봉을 위로했다.
주문진 바닷가 횟집에서는 손님이 꽤 있었지만 후줄근한 점퍼 차림의 조철봉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조철봉은 소주를 두병이나 마셨는데 횟집을 나왔을 때 두 사내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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