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8. 결단(10)
(2096)결단-19
대한호텔 중식당의 밀실 안에서 조철봉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중식당 밀실은 신발을 벗지 않아서 좋다.
오후 12시 반, 기다린 지 5분이 되었다.
그때 방문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박준수 의원이 들어섰다.
건장한 체격,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아이구, 기다리셨습니까?”
다가선 박준수가 손을 내밀며 묻는다.
“아닙니다. 방금 왔습니다.”
악수를 나눈 둘이 원탁에 마주 보고 앉는다.
베트남에서 귀국한 다음날이다. 이번 약속은 박준수가 직접 조철봉의 집으로
전화를 해서 이뤄졌는데 비서를 시키지도 않았다.
아침에 전화를 받은 이은지가 놀라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박준수는 이은지가 알고 있는 열명 안팎의 정치인 중 하나인 것이다.
방에 들어온 종업원에게 식사 주문을 마친 박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좀 생각을 해 보았는데 이번이 남북한을 위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쪽이 먼저 제의해온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조철봉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인 박준수가 말을 잇는다.
“저쪽도 다급한 것 같았고 우리가 이용당할 두려움 대문에 거부한다는 것도
옳은 자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한테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강화시켜가면서 추진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박준수의 얼굴은 결의로 굳어져 있다. 박준수가 똑바로 조철봉을 본다.
“조 의원님이 저한테 그런 제의를 하신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들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것은 필연이고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죠.”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인다.
김경준의 말마따나 세상 일에는 우연이 없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다.
그 계기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제가 밑거름이 되겠습니다.”
박준수의 시선을 잡은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한다.
“곧 제가 신당 발기인을 모아 신당 결성을 하고 박 의원님을 당수로 추대하겠습니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 대한민국을 위해.”
대한민국을 강조한 박준수가 격정을 다스리려는 듯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고는 말을 잇는다.
“우리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하십시다.”
그것으로 둘의 합의는 끝이 났고 마치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문이 열리더니
음식이 들어왔다.
박준수와 단 둘이 만난 것은 처음이다.
조철봉은 박준수의 반응에 호감을 느꼈다.
박준수는 고맙다고, 또는 덕분이라는 따위의 인사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지나친 인사치레는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실례가 된다.
그러나 박준수의 태도는 정중하면서도 무겁지 않았다.
믿음성이 가는 분위기다.
조철봉으로서는 도저히 닿지 못할 경지 같았다.
음식을 먹던 박준수가 문득 머리를 들고 묻는다.
“조 의원님, 발기인으로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놓고 조철봉이 머리까지 저으며 강조했다. “전혀.”
“그럼 제가 운영하는 미래연구소 소장 이석환씨를 보낼 테니까 지도해 주시지요.”
박준수가 정색하고 말을 잇는다.
“발기인에서부터 신당 강령, 공약, 그리고 앞으로의 추진 계획까지 수립해야 될 테니까요.”
그러더니 쓴웃음을 짓고 덧붙였다.
“물론 극비리에 말씀입니다. 국정원 측이 도와주기는 하겠지요. 그리고 고위층도.”
박준수가 말을 끊는다.
그 고위층이라면 바로.
(2097)결단-20
그러나 소문은 대번에 퍼졌다.
그 다음날 아침 뉴스에 떠버린 것이다.
신당 창당 움직임이 있고 그 중심에 조철봉이 있다는 내용, 배후는 북한,
그러나 당수가 누가 될지는 아직 불분명하다고 했다.
처음 그 보도를 보았을 때 간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던 조철봉은 1분쯤 지나자 감을 잡았다.
물타기다. 어차피 곧 알려질 일, 슬슬 내놓아서 충격을 감소시키려는 작전,
박준수측의 미래연구소가 내놓았을까?
조철봉이 의원회관으로 출근하는 차 안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국정원 제1차장 서한호가 전화를 해온 것이다.
“분위기를 띄워야 할 것 같아서요.”
서한호가 대뜸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짓는다.
이것은 범국가적 사업인 것이다.
박준수가 어제 말했던 고위층이 누구겠는가?
국정원장이 혼자 결정하고 행동하겠는가? 통치권자의 묵인이나 허락을 받은 것이다.
서한호가 말을 이었다.
“북한이 오늘 오후에 금강산 총격사건에 대한 사과 발표를 할 것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 맥락이죠.”
그러고는 서한호가 짧게 웃었다.
“조 의원님만 알고 계십시오. 놀라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통화를 끝낸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한달 전 금강산 관광을 하던 한국 관광객 하나가 북한군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새벽에 바닷가 산책을 나갔다가 사살된 것이다.
그것으로 금강산 관광은 중단되었고 북한측은 관광객 잘못이라면서 오히려 비난을 했다.
한국 여론이 나빠진 것은 물론이다.
더욱이 한국이 유엔에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강경자세를 취함으로써 개성 관광까지 중단되었다. 탈북자, 납북자 송환으로 부드러워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직된 것이다.
남북 의원협의회가 무슨 기능이 있겠는가?
북측 대의원들과는 개별 접촉도 안 되는 상황이라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남북관계는 이렇게 하루아침에 급변한다.
연결고리가 확실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조철봉이 버튼을 누른다.
지금까지 자신은 꼭두각시였다. 북한측이 의도한 대로 이용당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 덕분에 유명인사가 되긴 했다.
거기에다 남북한 의원협의회 설립의 주역으로 의원 위상도 높아졌지만
이런 사건에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꼭두각시라는 증거를 보인 셈이었다.
그러다 다시 신당 제의가 들어왔고 이번에는 정권 차원에서 새 체제를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중심에 서있다.
“여보세요.”
통화 연결이 되면서 신영선의 목소리가 울렸다.
‘타임’의 대표 신영선은 조철봉의 정치학습 가정교사 역할이다.
“응, 나야.”
조철봉이 응답했을 때 신영선은 인사도 생략하고 말을 쏟아낸다.
조철봉은 신영선의 이런 자세가 좋다.
“뉴스 보았어. 이번에는 로봇 노릇을 안 해도 될 것 같네.”
신영선은 꼭두각시 대신으로 로봇이라는 표현을 썼다.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신영선의 말이 이어졌다.
“내일 밤에 올 거야? 내가 그동안 정보 모아 놨다가 이야기해줄게.”
“내가 그러려고 전화한 거야.”
조철봉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역시 누님밖에 없다니까.”
“언제는 누님이고, 언제는 또.”
“애인이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힐끗 앞쪽에 시선을 주고 나서 목소리를 낮췄다.
“보고 싶었어,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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