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9. 결단(11)
(2098)결단-21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조철봉과 김경준은 영등포역 근처의 한식당 ‘전주집’으로 들어섰다.
예약된 방으로 안내한 종업원이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두 사내가 일어섰다.
둘 다 초면이다.
“제가 미래연구소장 이석환입니다.”
40대 중반쯤의 말끔한 용모, 단정한 차림의 사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미래연구소는 박준수가 10년 전부터 운영해오는 정치·경제발전연구소다.
이석환의 경력도 화려했다. 미국 박사에다 대학 교수 경력도 있고 지지난 정권때는
청와대 근무도 했다.
“저는 민정수석실 비서관 한영기라고 합니다.”
옆쪽 사내가 인사를 한 순간 조철봉의 가슴이 서늘해진다. 청와대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이 과업이 대통령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영기는 이석환과 또래로 보였는데 인상이 좋았다.
눈이 가는 데다 눈초리가 처져서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넷이 자리잡고 앉았을 때 방문이 열리더니 종업원 둘이 아예 한정식을 상으로 들고 와
내려놓고 나갔다. 그것으로 끝이다.
본론은 이석환이 먼저 꺼냈다.
“저희들이 작성한 발기인 명단과 신당강령, 공약 그리고 신당에 참여할 의원과 최고위원,
고문 후보 명단을 가져왔습니다.
의원님께서 참고하시고 의견을 말씀해 달라는 박 의원님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나야, 뭘.”
하면서도 조철봉은 속으로 감탄했다.
빠르다. 초안을 만들어왔겠지만 조철봉의 능력으로는 이렇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석환이 건네준 두툼한 봉투는 김경준이 받는다.
김경준은 잔뜩 긴장해서 어색하게 움직였다.
신영선이 아침에 말한 로버트 같다.
그때 한영기가 말했다.
“저기, 대통령께서 조 의원님께 말씀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겉절이를 젓가락으로 집었던 조철봉이 내려놓고는 한영기를 보았다.
나머지 둘의 시선도 한영기에게 모아졌다.
“이번에 신당이 창당되면 조 의원님께선 의원직을 잃게 되실 것 아닙니까?”
한영기가 묻자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그때 청와대로 들어오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십니다.”
“내가요?”
아예 젓가락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한영기를 쏘아보았다.
“나를 말이오? 나 같은 놈을 뭐에 쓰려고 청와대로?”
“의원님.”
그렇게 가로막은 것은 옆에 앉은 김경준이다.
김경준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조철봉을 노려보았다.
“의원님이 어떻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무 그러시는 것도 안 좋습니다.”
“어, 이 사람이.”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을 때 한영기가 말을 잇는다.
“정무특별보좌관직을 제의하셨습니다.
1급 비서관직이지만 항상 대통령님을 측근에서 상담하실 수 있는 역할로
비서실장 직속으로 배치하시겠다는데요.”
“나는 그쪽은 관심이 없어서.”
“이미 비서실장님하고 이야기가 다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아이구, 난 싫어요.”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세차게 머리까지 저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전 못갑니다. 안 맞아요.”
이제는 눈까지 치켜뜬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그 이야기가 생각나네. 그, 누군가. 그렇지. 나폴레옹이 소크라테스한테
당신 뭐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햇볕 가로막지 말고 가라고 했다는 이야기.”
(2099)결단-22
“오늘 자기 때문에 일찍 들어왔어.”
조철봉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신영선이 생색을 낸다.
과일 바구니를 받아든 신영선의 표정은 밝다.
“에이구, 이 오쟁장이.”
하면서 손바닥으로 조철봉의 사타구니를 쓸어올리더니 들뜬 소리로 묻는다.
“씻을 거야? 물 받아 놓았는데.”
저고리를 받아든 신영선에게 몸을 돌린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까? 나 씻을 텐데 욕조에 앉아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게 어때?”
“먼저 들어가.”
웃음 띤 얼굴로 말한 신영선이 조철봉의 바지를 받아들었다.
욕실로 들어선 조철봉은 욕조에 물이 가득 담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약간 뜨겁게 물 온도까지 맞춰져 있었으므로 만족한 조철봉의 입에서 긴 숨이 뱉어졌다.
밤 9시반, 머릿속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으며 몸은 이미 욕망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영선이 욕실로 들어섰을 때는 10분쯤 후였다.
가운 차림의 신영선은 단정하게 허리띠까지 매었지만 맨다리가 드러났다.
가운 밑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한두번 본 것도 아닌데 웬 가운이야?”
“내가 안마해 줄게.”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신영선이 뒤쪽으로 가더니 조철봉의 어깨를 두손으로 주물렀다.
강한 악력이었고 조철봉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으음, 좋구나.”
“일본에서 잘 놀았지?”
“응.”
했다가 놀란 조철봉이 곧 정정했다.
“혼났어. 그놈의 사진 때문에.”
“그 여자하고 논 거야?”
“아니.”
정색한 조철봉이 머리까지 저었다.
“그놈들 소설 쓴 거야.”
“믿어야지.”
“이번 신당 문제 말이야.”
이제는 뒷목을 주무르면서 신영선이 화제를 바꿨다.
“내가 알기로는 열명 중 여덟은 찬성이야.
여야 양쪽에 실망한 사람들이 8할은 되는 것 같더라구.”
“연구소 쪽에서도 그러더군.”
“여당은 분열되어서 국민들이 밀어준 거대 여당의 역할을 못하고
야당은 뚜렷한 목표도 지도자도 없이 발목잡기만 하고 있다는 거야.”
“신문에 난 그대로지.”
“이번 신당에는 여야에서 알짜배기만 넣어야 돼. 정치꾼이 섞이면 안돼.”
“그래야겠지.”
“한국당의 이용찬, 안상호, 이경필 같은 거물들은 다 빼는 게 나아.”
“그럼 한국당에는 거물들만 남겠군.”
“때묻은 인간들만 남는 거지.”
어제 미래연구소 이석환이 가져온 신당에 포함시킬 의원 명단에도 그들은 이미 빠져 있었다.
그때 신영선이 문득 묻는다.
“당대표는 누구로 정했어?”
“그거 여론은 어때? 누가 좋을까?”
“자기, 다 정해놓고 그러는 거지?”
“정하기는 뭘.”
“내가 맞혀볼까?”
“맞혀봐.”
“맞히면 뭘 줄 건데?”
그러자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신영선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몸이 비스듬하게 눕혀지면서 욕조의 물에 가운이 젖었지만 신영선은 상관하지 않는다.
신영선이 혀를 내밀어주었으므로 조철봉은 사탕처럼 빨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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