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6. 결단(8)
(2092)결단-15
“접니다.”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옆에 선 김경문은 긴장해서 얼굴이 뻣뻣하다.
지금 말한 사내는 국정원장 김광준이다.
김광준의 전화를 받은 김경문은 핸드폰을 쥐고 계단을 달려 올라왔다.
오후 4시반, 하는 한숨 자고 나서 환한 얼굴로 돌아갔다.
최갑중이 없었기 때문에 조철봉이 100불짜리로 10장을 주었더니
놀라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받아들더니 허둥거리며 떠났다.
“아이구, 웬일이십니까?”
최갑중의 보고를 받고 전화를 했을 테지만 조철봉이 놀란 듯 묻자
김광준이 웃음 띤 목소리로 말한다.
“거기 장소가 적당하더군요.”
“어디 말입니까?”
“조 의원님 별장 말씀입니다.”
“예?”
영문을 모른 조철봉이 되물었을 때 김광준의 말이 이어졌다.
“혼자 계시지요?”
“예, 보좌관하고.”
“제가 지금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놀란 조철봉이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묻는다.
“여기로 말씀입니까? 아니, 그렇다면.”
“제가 아마 30분쯤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일행이 하나 있습니다.”
“아아, 예.”
통화가 끝났을 때 조철봉이 김경문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말한다.
“국정원장이 여기로 오고 있다는군.”
“빠른데요.”
이미 한쪽 말만 듣고도 내막을 짐작한 김경문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한다.
“국정원장이 직접 날아오다니, 국가 대사인 것은 분명합니다, 의원님.”
그로부터 30분쯤 후에 별장 이층 응접실에는 조철봉과 국정원장 김광준,
제1차장 서한호까지 셋이 둘러앉았다. 국정원 수뇌급 둘이 다 온 것이다.
미리 탁자 위에 마실 것을 가져다 놓았으므로 고용인은 올라오지 않았다.
김경문은 아래층에서 국정원 수행원들과 대기하고 있다.
김광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너무 중대한 일이어서요.
북한에서는 통전부장까지 날아왔는데
저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예.”
건성으로 대답한 조철봉에게 정색한 김광준이 말을 잇는다.
“제가 박준수 의원도 만나뵙고 왔습니다. 그리고 몇 분과도 상의를 했는데요.”
상반신을 기울인 김광준이 목소리를 낮춘다.
“이건 대한민국 역사를 바꿔 놓을 만한 중대한 계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의원님.”
“그, 그렇습니까?”
긴장한 조철봉이 시선을 내렸다가 옆쪽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초점을 맞추자 하의 금 귀고리 한짝이다.
당황한 조철봉이 귀고리를 움켜쥐었을 때 김광준의 말이 이어졌다.
“박 의원께서도 찬성하셨습니다. 의원님, 당을 만드시지요.
북한측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시고 말입니다.”
“…….”
“저희가 뽑아 보았더니 한국당 45명, 민족당 15명, 기타 5명 해서 65명으로 창당이 가능합니다.
숫자만 채우려면 당장에 120명도 되지요. 하지만.”
“잠깐만요.”
손을 들어 김광준의 말을 막은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어깨를 펴고 나서 말한다.
“난 국회의원 그만할랍니다.”
“예?”
김광준과 서한호가 동시에 외마디 외침을 뱉더니 멍한 표정이 되었다.
(2093)결단-16
그러고 나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제1차장 서한호였다.
서한호가 정색하고 묻는다.
“아니, 의원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중차대한 시기에 그만두시다니요?”
그러고는 빙긋 웃었다.
“농담이시죠?”
“아닙니다.”
조철봉이 김광준과 서한호를 번갈아 보았다.
“말씀대로 내가 그런 중차대한 일을 맡을만한 능력이 안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난 여러분의 기대치에 닿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조철봉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가 시키는 대로 이용만 당하기도 싫고 말입니다. 그래서.”
“조 의원님.”
김광준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반백의 머리칼에 주름진 얼굴, 김광준은 조철봉보다 20년 가깝게 연상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김광준이 말을 잇는다.
“솔직한 말씀,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해도 합니다.
저는 오늘 조 의원님을 다시 보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김광준이 길게 숨을 뱉는다.
“북한에서 조 의원님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덕분에 잘 풀린 일도 있지 않습니까?
이건 우리 생각입니다만 조 의원님이 그런 성품이었기 때문에 북한측이 호감을 보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될까요?”
“그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조 의원님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거든요.”
“내가 이용하기 좋기 때문이죠.”
“지금은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김광준의 절절한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마침내 입맛을 다시고는 외면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한호가 입을 열었다.
“조 의원님이 박 의원한테 신당 창당 제의를 하자
그것을 들은 북한측이 바로 이것이다,
하고 접근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남한에 북한 정권에 우호적인 신당이 필요했거든요.”
서한호가 차근차근 말을 잇는다.
“신당이 창당되면 북한은 개방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요구를 해 오겠지만
그 대신 우리는 남한 내 친북 세력에 대한 보다 강경한 조치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땐 엄격한 상호주의가 적용될 테니까요.”
어느덧 긴장한 조철봉이 눈만 껌벅였고 이제는 김광준이 말했다.
“북한은 개방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어 있지요.
그래서 남한측으로부터 체제 안전과 협조를 받을 신당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고
그 고리 역할을 하실 분이 조 의원님이십니다.”
그러더니 덧붙인다.
“박준수 의원도 기꺼이 이 큰 과업에 동참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목이 탔는지 오렌지주스 캔 뚜껑을 따면서 김광준이 말을 잇는다.
“조 의원님, 부탁드립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저기, 민족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다.”
불쑥 조철봉이 말을 잘랐으므로 김광준은 물론이고 서한호도 피식 웃는다.
“알겠습니다. 국민을 위해서.”
김광준이 정정하자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투덜거렸다.
“내가 박 의원한테 신당 하나 만들자고 한 것이 이렇게 크게 번져버렸구만.”
“그게 대운이라는 것입니다. 조 의원님.”
서한호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가 김광준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때 김광준이 묻는다.
“조 의원님, 통전부장이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연락 한번 해 주실랍니까?”
만날 작정까지 하고 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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