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 중개인 (9)
(1977)중개인-17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이대동이 조철봉에게 넌지시 묻는다.
“조 의원, 위원장님하고 무슨 밀담을 나누신 거요?”
이미 그런 질문은 지금까지 한 시간도 안되어서 100번은 더 들었다.
기자들은 물론이고 대표단 의원들까지 차를 타기 전에,
버스가 잠깐 휴식을 하는 사이에도 다가와서 물었다.
이제 이대동까지 물었으니 묻지 않은 위인은 딱 두 사람.
체면 차리고 있는 대표 안상호와 지금도 정신이 없는 민족당 의원 안유철이었다.
버스는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이대동은 조금 전 휴게소에서 쉴 때 조철봉 옆좌석으로 옮아온 것이다.
“밀담은 무슨, 그냥 세상 이야기 했습니다.”
정색한 얼굴로 조철봉이 말하자 이대동은 쓴웃음을 짓는다.
조철봉은 모두에게 이렇게 대답했고 그들의 반응도 이대동과 똑같았다.
“조 의원이 금방 말씀해 주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소.”
이대동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하지만 시기가 되었을 때 나를 잊지 말아주시오.
나는 언제라도 조 의원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요.”
“무슨 말씀을,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이제 조 의원은 거물입니다.”
정색한 이대동이 조철봉을 똑바로 본다.
리무진 버스는 좌석 간격이 넓어서 둘의 밀담은 건너편에 들리지 않는다.
“국민의 신망도 절대적으로 받게 되었구요.
지금 조 의원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압니까?”
“인기야 금방 변하는데요. 뭐.”
“그리고 금방 회복되지요.
이제 조 의원 주가는 천원대에서 만원대로 올라 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러고는 이대동이 길게 숨을 뱉는다.
“귀국하고 나면 민족당 안유철 의원의 정치 생명이 끝나게 될 겁니다.”
놀라 눈만 크게 뜬 조철봉이 침을 삼켰다.
안유철은 버스 뒤쪽 좌석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같은 민족당 의원도
노골적으로 피하는 것이 눈에 훤하게 띄었다.
이대동이 말을 잇는다.
“이미 그 소문이 기자단에 퍼져 있습니다.
아마 이삼일 후에 그 문제가 언론에 터뜨려질 겁니다.”
그러고는 이대동이 얼굴을 일그려뜨리고 웃는다.
“김동남 대표는 언급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대표단 앞에서 그렇게 폭로할 리가 없지요.”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인다. 맞는 말이다.
김동남이 감정적으로 불쑥 터뜨릴 인간이 아니다.
그때 이대동이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안유철의 이용가치가 없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한국 내부에 있는 연루자들에게 경고를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친북 활동을 했답시고 벌써부터 지분을 요구하는 놈들이 있었을 테니까요.”
“…….”
“안유철이 그 본보기죠.”
조철봉은 소리 죽여 숨을 뱉는다.
다시 자신의 이용가치와 역할을 되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된 것은 절대 아니다.
일단은 위원장으로부터 이용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발탁되었다는 사실은 맞다.
그러나 앞으로 어디까지 가게 될 것인가?
안유철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 되리라는 보장은 있는가?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이대동을 본다.
“저는 욕심이 없는 놈입니다.”
아마 이것 하나는 안유철과 다르지 않을까?
(1978)중개인-18
그날 밤, 한양의 밀실 안,
오늘은 세 사내가 상 주위에 둘러앉았는데 놀랍게도 조철봉이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앞쪽에 앉은 두 사내, 국정원장 김광준과 대통령 비서실장 유세진이다.
상석에 가지 않으려는 조철봉을 두 고관이 기를 쓰고 앉히는 바람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었다.
한양 대표가 인사를 마치고 물러간 후에 셋은 아가씨도 나중에 부르겠다고 해놓고 밀담을
시작한다.
오늘 술자리는 조철봉이 김광준에게 요구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김광준은 조철봉의 이야기를 듣더니 비서실장 유세진까지 셋만 모이는 것이 낫다고 했다.
“위원장이 오후에 출발하기 전에 내 방에 왔었습니다.”
하고 조철봉이 입을 열었을 때 두 거물은 시선만 주었다.
이미 그 사실은 뉴스 시간마다 계속해서 보도되고 있다.
위원장이 호텔 안으로 들어서는 장면부터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까지만 찍혔고
그 다음에는 조철봉의 얼굴이 편집되어 나온다.
뉴스 내용은 위원장이 조철봉 의원과 밀담을 나누었다는 것인데 추측성 보도는 하지 않았다.
좋은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위원장님은 이산가족을 남으로 보내준답니다.”
불쑥 조철봉이 말하자 둘은 똑같이 숨을 삼켰다.
젓가락을 들었던 유세진은 도로 내려놓는다.
정색한 조철봉이 둘을 번갈아 본다.
“하지만 조금 뜸을 들이시겠답니다.
이제 틀림없이 이산가족 문제가 이쪽저쪽에서 나올 텐데 그땐 가차 없이 자르겠다는군요.”
둘은 눈도 껌벅이지 않았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다 시기가 되었을 때 대통령께서 이산가족 문제를 제기하시고 제가 특사로 가게 되는 겁니다.”
“약속을 해 주신 겁니까?”
마침내 유세진이 먼저 입을 연다.
유세진의 얼굴은 어느덧 상기되어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 아니, 귀향이라고 하셨지요?”
“예, 위원장은 부모, 형제, 자매 등의 요청이 있으면 귀향시켜 주겠다고 직접 말씀했습니다.”
“으으음.”
유세진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그, 그것을 우리 대통령이.”
탄성은 대통령을 위한 탄성 같았지만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인다.
“예, 대통령께서 직접 제의를 하시는 모양새로 만들어서 큰 건으로
한 건 올리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크, 큰 건으로 한 건.”
말까지 더듬은 유세진이 다급하게 되묻는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으으음.”
이제는 감동한 탄성이다.
그때 잠자코 듣기만 하던 김광준이 묻는다.
“조 의원님, 그러고 나서 위원장이 바라는 게 있겠지요?”
“예.”
과연, 하는 표정을 짓고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정상회담입니다.”
“으음.”
이번에는 김광준의 탄성, 그러나 표정은 아직 굳어 있다.
“정상회담의 의제도 말씀하시던가요?”
“아니, 그건 아직.”
“이거 굉장하군요.”
혼잣소리처럼 말한 김광준이 아직도 정색한 얼굴로 조철봉을 본다.
“이번 납북자, 국군포로의 전격적 송환으로 한국 국민들의 북한 정권에 대한
호감도가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특히 10대, 20대층의 열기는 대단합니다.”
그러고는 김광준이 잔을 들었다가 아직 빈 잔인 것을 보고는 도로 내려놓는다.
“북한이 계속해서 주도권을 쥐고 있군요.”
조철봉은 심호흡을 한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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