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6. 중개인 (8)
(1975)중개인-15
다음날 오전 회의장에 들어서던 조철봉은 몰려든 취재 기자들의 열기에 깜짝 놀랐다.
어제 회담이 끝나고 나서 한국측 대표 안상호가 내용을 발표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회담에서 북측은 출국자와 군 귀순자 명단을 남측에 넘겨줄 예정이었다.
기자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은 곧 한국 여론이 들끓고 있다는 증거다.
회담장에 자리잡고 앉았을 때 북측 대표 김동남이 웃음띤 얼굴로 말한다.
“남한에서 반응이 좋더군요.”
“그럼요.”
안상호가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오늘 명단이 발표되면 한국이 들썩일 겁니다.”
“그럴까요?”
그러더니 김동남이 머리를 돌려 끝쪽에 앉은 사내를 본다.
그러자 사내가 일어서더니 안상호 앞에 서류를 놓았다.
제법 두툼한 서류였다.
“그것이 출국자와 군 귀순자 명단입니다.”
이제는 정색한 김동남이 눈으로 안상호 앞에 놓인 서류를 가리키며 말한다.
“출국자는 현재 429명이 생존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의 남한군 귀순자는 현재 672명이 됩니다.”
“에엑?”
안상호의 입에서 기괴한 외침이 터졌다.
현재 한국 정부측 공식 통계로는 국군포로가 약 560명, 납북자가 480명인 것이다.
그런데 북측은 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을 내놓았다.
또 대특종이다.
대사건이 일어났다.
안상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동남을 본다.
통계보다 많은 인원을 내놓았지만 이게 사양할 일인가?
“아아, 그렇군요.”
감격한 안상호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한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위원장께서는 이른 시일 안에 전원 남한으로 귀국시켜 드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준비를 해 두시도록.”
“그럼요, 그럼요.”
안상호가 앞에 놓인 명단을 두팔로 감싸 안으면서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위원장님께 한국 국민을 대표해서, 그리고 납북,
아니, 출국자와 전쟁 군 귀순자 가족을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열띤 안상호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린다.
“저는 오늘 이 순간이 남북 화해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끝자리에 앉은 조철봉의 시선이 앞쪽 양성택에게로 옮아갔다.
조철봉의 시선을 느꼈는지 양성택이 머리를 돌려 이쪽을 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양성택이 희미하게 웃었고 조철봉은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남북 화해는 마음만 먹는다면 아주 쉽게 시작될 수가 있다.
국제 정세니 국내 정세 따위를 따질 필요도 없다.
집권자 한 명의 결심만으로 7천만 한민족이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순간이 왔다. 곧 회담은 30분도 안 되어서 끝났고
이번에는 남북 대표의 공동 기자회견이다.
공동 기자회견문을 작성하는 데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으므로 오전 12시 정각에
안상호와 김동남은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섰다.
이미 수백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카메라를 겨누었고 회견 장면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방영될 것이었다.
12시5분, 먼저 한국 대표 안상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출국자와 군 귀순자의 송환에
합의했다는 발표를 했으며, 이어서 북측의 김동남이 숫자를 발표했다.
회견장은 들뜬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생중계 방송을 보던 국민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식당과 찻집들은 무료 서비스를 했고 주가가 폭등했다.
전국이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1976)중개인-16
“손, 손님이.”
하면서 김경준이 방 안으로 들어섰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김경준의 얼굴이 누렇게 굳어져 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김경준이 침부터 삼키고 말한다.
“위원장님이 오셨습니다.”
그 순간 조철봉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 3시반, 기자회견이 끝나고 늦은 점심을 먹은 다음 모두 귀국 준비를 하는 참이다.
조철봉도 위원장이 남으라고 했지만 같이 돌아가기로 합의를 했다.
허둥지둥 문 밖으로 나온 조철봉은 복도에 서 있는 위원장을 보았다.
위원장은 김동남, 양성택을 좌우에 거느리고 서 있었는데 조철봉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나?”
“아아, 아닙니다.”
당황한 조철봉이 머리까지 젓는다.
그러나 복도에 가득 찬 경호원, 수행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인간이 있겠는가?
아마 옆방의 한국측 대표들은 문 밖의 이 소동을 구경하고 있을 것이었다.
방 안으로는 위원장과 김동남, 양성택 셋이 들어섰으므로 우물거리던 김경준은 밖으로 나갔다.
소파에 앉은 위원장이 모두 자리를 잡기까지 기다리고 나서 입을 연다.
“내가 조 의원 방에 들어가 밀담을 나눴다고 곧 한국 언론에 대서특필되겠지. 안 그래?”
“예. 그렇습니다.”
조철봉이 똑바로 앉은 채 대답한다.
당연하다.
아마 위원장이 나가자마자 기자들은 꿀에 모이는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었다.
안상호와 다른 대표들도 마찬가지로 체면도 차리지 않고 캐물을 것이다.
그때 위원장이 입을 연다.
“이제 남은 게 있지 않나? 어젯밤에 내가 말한 것 말야.”
정색한 조철봉이 위원장을 보았다.
“이산가족 말씀입니까?”
“그래.”
위원장이 웃음 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다.
6·25때 납북된 인사도 이산가족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남조선에서 부모나 형제, 자매관계의 요청이 있다면 남조선으로 보내 주겠어.
그러니까 이건 조 의원이 돌아가 추진해보란 말야.”
“예에?”
눈을 치켜뜬 조철봉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되었다.
머리가 벼락을 맞는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 위원장의 말이 마치 천상의 복음처럼 귀를 울린다.
“하지만 효과를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어.
조 의원이 귀국하면 틀림없이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문의가 빗발칠 거야.
뭔가 한탕을 노리는 정치인들도 조 의원 주위에서 바람을 잡을 것이고 말야. 그렇지 않나?”
“예. 그, 그렇습니다.”
“먼저 선수를 쳐서 우리측에 요구해오는 정치인 놈들도 있을 것이고 말야.”
“그렇습니다.”
“그땐 우리가 아주 박살을 낼 거야.
그런 말 꺼낸 놈들의 정치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말야. 그럼 쑥 들어가겠지.”
“그렇지요.”
“이건 대통령이 나서는 게 나을 거야.”
“예에?”
하고 다시 외마디 소리를 뱉은 조철봉을 향해 위원장이 빙긋 웃는다.
“대통령한테도 뭔가 선물을 하나 줘야 할 것 아닌가?
그럼 조 의원은 대통령 신임을 받아서 좋고 대통령도 나에 대한 호의가 강해지겠지. 안 그래?“
그러고는 위원장이 목소리를 낮춘다.
“그 다음에 정상회담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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