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 조의원(11)
(1933)조의원-21
강진수, 스스로 자신이 통전부 부부장 대리라고 밝힌 인물,
조철봉이 보기에 이번 북측 대표단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것 같았던 인물이
전화를 해온 것이다.
전화기를 받아쥔 조철봉이 심호흡부터 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기 때문이다.
“예, 전화 바꿨습니다.”
그러자 수화구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조 의원님, 잠깐 뵈었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지금 호텔 라운지에 와 있습니다.”
“아아, 예.”
놀란 조철봉이 앞에 앉은 김경준에게 시선을 주고나서 곧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나가지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경준을 보았다.
“통전부 부부장 대리가 날 보자는데, 지금 라운지에 와 있다는 거야.”
“그사람이 의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냥 만나자고 할 리도 없구요.”
정색한 김경준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기회인 것은 분명합니다, 의원님.”
“모두 내가 저지른 일 때문인 것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이 세상에 우연히 닥친 일은 없으니까 말야.”
그렇다. 원인이 없는 일은 없는 것이다.
좋건 나쁘건 닥친 결과는 모두 과거 행적과 관계가 있다.
길 가다가 떨어진 간판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는 사건도 조철봉은 우연이라고 안본다.
그 사람이 전생에서 그 간판 주인한테 해코지를 했던 보답을 받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조철봉이 라운지로 들어서자 안쪽 자리에 혼자 앉아있던 강진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진수가 다가선 조철봉을 향해 얼굴을 펴고 웃는다.
그러자 눈이 가늘어지면서 독한 인상이 호인처럼 변해졌다.
그것을 본 조철봉의 가슴이 또 뛰었다.
“아니, 웬일이십니까?”
강진수가 내민 손을 잡은 조철봉이 물었다.
오후 3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라운지에는 손님이 서너 테이블뿐이다.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요.”
자리에 앉으면서 강진수가 다시 눈웃음을 쳤다.
종업원이 다가왔으므로 둘은 서둘러 커피를 시켰다.
그래서 종업원은 오다가 말고 돌아갔다.
“회의 참석해 보시니까 감상이 어떠십니까?”
강진수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부터 지었다.
“저야 참관인이니까 그냥 보고 듣기만 하는 입장이지만 좀 답답하더군요.”
“사업상 회의하고는 다르지요?”
“그렇더군요.”
“체면이라는 것이 있어서요.”
“제 보좌관도 그런 말을 하더만요.”
“그래서 비선, 즉 제2의 통로를 만들어 놓을 때가 많은데
이번에는 남조선 쪽에서 조 의원님이 그 역할을 맡아 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아아.”
또 감동한 조철봉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요즘은 조철봉이 문자 공부를 열심히 한다.
정치인들이 가끔 써먹는 문자가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 무식을 덮기 위한 방법으로 딱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방금 적당한 문자가 생각났다.
“불감청이언정고소원.”
즉, 감희 청하지는 못해도 원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 그거야 당연히.”
그러고는 조철봉이 강진수를 보았다. 이제 기회가 왔다. 고진감래다.
(1934)조의원-22
그때 강진수가 입을 열었다.
“외통위 소속이 되셨으니까 앞으로 저희들하고 자주 뵙게 될 것입니다.”
“그렇죠.”
맞장구를 쳤지만 조철봉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아직 당선자 신분이긴 해도 34번 조철봉을 오라는 모임은 원외단체 두어 곳뿐이다.
그것도 보도 듣도 못했던 두꺼비 보호단체 같은 곳이다.
그래서 모임 이야기만 나오면 기가 죽는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남북관계는 좀 골치가 아파집니다.”
하고 강진수가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강진수가 본론을 꺼낸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강진수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정권이 바뀌면서 남측의 대북 자세가 바뀐 건 이해합니다.
우리도 고집만 부릴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서로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 그래서 북한측의 융통성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 정권이 바뀌었으니 자세를 바꿔야 하는 것은 북한이다.
전(前) 정권이 약속했다고 밀어붙인다면 들어줄 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못한다.
그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난 능력 없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난 공부하라고 보낸 참관인일 뿐이고
외통위도 갈 곳이 없다고 보내진 것이라서요.
비례대표 맨 꼴찌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의원 배지를 달게 된 인물이라 천덕꾸러기죠.
원내 모임에서 오라는 데가 아직 한 곳도 없습니다.”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이야기를 끝냈더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코끝이 찡했다.
그러자 강진수가 조철봉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조 의원님 그래서 말씀인데요. 저희들이 도와드리지요.”
눈만 껌벅이는 조철봉을 향해 강진수가 말을 잇는다.
“저희들도 조 의원님이 북남 합자사업을 이뤄 놓으신 것까지 다 압니다.
당에서도 조 의원님을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곧 조 의원님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실 테니까 두고 보시지요.”
그러더니 얼굴을 펴고 다시 웃었다.
“아마 내일 회의는 조금 부드러운 분위기가 될 겁니다.
우리측도 그렇겠고 남측도 지시를 받겠지요.
어쨌든 이번 물량 공급은 지난번 합의된 물량의 잔량인데다
미국측도 문제를 삼고 있지 않으니까 한국 입장도 불편하지 않을 겁니다.”
조철봉은 이제 잠자코 강진수를 보았다.
50대 초반쯤이나 되었을까? 발음이 분명하고 군말이 없어서
그야말로 말이 쏙쏙 귀에 들어온다.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받아들이는 상대에 따라서 다르다. 강진수가 말을 이었다.
“회의는 내일 대충 합의를 하고 다시 일주일 후에 이번 대표단이
이제는 평양에서 완전 합의를 하게 될 겁니다.
물론 그 동안에 물밑 접촉과 합의가 있겠지만 일주일 후에는 다 끝납니다.”
그러더니 강진수가 정색했다.
상반신도 펴고 반듯이 앉아 조철봉을 본다.
“조 의원님도 그때 나오실 수 있겠지요?
이번처럼 참관인 자격으로 말입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조철봉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하자 강진수는 심호흡부터 했다.
“그때 조 의원님이 우리 위원장 동지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조철봉이 눈을 껌벅였다.
강진수의 말이 뇌에서 이해되는 데 3초쯤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3초가 지났을 때 조철봉은 숨을 딱 멈췄다.
위원장을 만난다면, 조철봉의 얼굴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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