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4. 조의원(10)
(1931)조의원-19
사흘 후, 베이징의 국제호텔 소회의실에서 남북한 비공식 경제회담의 대표단 8명이
테이블 양쪽에 마주 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10시10분을 가리키고 있다.
북한측 대표는 외교부 부부장 한정철, 그리고 조철봉과 마주 보는 자리에
통전부 부부장대리 강진수가 앉았다.
통전부는 곧 통일전선부로서, 북한의 대남 공작뿐만 아니라
대남 관계를 총괄하는 부서인 것이다.
인사 소개는 남북한 대표가 맡아서 했는데 조철봉은 현역 의원으로 참관인이라고 소개되었다.
조철봉은 옵서버가 그런 뜻인 줄 알고 놔두었다.
그리고 곧 회담이 시작되었는데 비공식 회의여서 언론 보도는 통제되었다.
회의실 안에는 양측 속기사 2명과 보좌역으로 각각 3명씩 동석했기 때문에
총원은 8명씩 16명, 문을 딱 걸어잠그고 시작했다.
조철봉은 양측 대표단이 바로 실무 협상에 들어가는 모양이 보기 좋았으므로 듣기만 했다.
가만 보니까 북한측에도 듣기만 하는 대표단 일원이 있다.
바로 통전부 부부장대리 강진수였다.
그래서 둘은 여러번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것이 어색해서 서로 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리기도 했다.
강진수의 인상은 선입견도 작용했겠지만 차갑고 독하게 보였다.
얇은 입술을 죽 다물고 있어서 입술이 아예 실낱 같은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눈빛이 곱지 않은 걸 보면 이쪽에 대한 감정도 좋지않은 것 같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고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지는 바람에 조철봉은 물론이고 강진수도 머리를 돌렸다.
북한 대표 한정철이다. 눈을 치켜뜬 한정철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앞에 앉은 임상섭의 시선은 테이블 위로 내려져 있다.
찌푸린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차분했다.
“핵 문제라니요? 핵하고 경협하고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한정철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조철봉은 임상섭을 보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으므로 심호흡을 했지만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임상섭이 머리를 들고 한정철에게 말한다. 여전히 차분하다.
“잘 아시다시피 국내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이해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회담을 하자는 겁니까? 안 하자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세요.”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핵 이야기를 꺼낸 건 회담을 깨자는 의도나 같습니다. 그만둡시다.”
“그러지 마시고.”
“정말 답답한 사람들이구만.”
그러면서 한정철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고 좌우의 대표단도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조철봉 앞에 앉은 강진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철봉은 강진수의 이맛살이 조금 찌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강진수가 부스럭대며 일어섰으므로 북한 대표단은 다 일어선 셈이 되었다.
임상섭은 눈만 껌벅이고 앉아 있었는데 태연했다.
좌우에 앉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대표단이 속기사까지 데리고 방을 나가 버렸으므로 회의실에는 한국측 대표단만 남았다.
그때 임상섭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조 의원님, 아마 내일 다시 회의를 하게 될 겁니다.”
임상섭이 웃음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우리가 핵 문제를 언급 안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제 말에 제가 대답했다.
“북한측도 핵 발언에 펄펄 뛰어야죠. 경협하고 핵하고 무슨 관계냐면서요.”
“그럼 내일은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는 겁니까?”
조철봉이 묻자 임상섭이 다시 웃었다.
“봐야지요. 하지만 바로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1932)조의원-20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아예 눈앞에 없는 놈처럼 취급하더구만.”
하고 조철봉이 말했으므로 앞에 앉은 김경준은 긴장했다.
이번 베이징 회담에는 최갑중이 따라오지 않았다.
호텔방 안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쪽 대표단도 선수들이야. 저쪽이 지랄을 해도 태연하더라니까.”
“다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잠자코 듣기만 하던 김경준이 입을 열었다.
“서로 체면을 세워주고 나서 일을 처리하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는 핵문제를 언급 안할 수가 없고 북한은 그러면 펄펄 뛰는 시늉을 하는 겁니다.”
“그럼 다 쇼란 말야?”
정색한 조철봉이 묻자 김경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인사치레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김 보좌관은 이번 회담이 잘 끝날 것 같아?”
“예. 북한측이 급하니까요.”
김경준은 안목이 높다.
조철봉보다 정치적인 식견도 깊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넌지시 김경준을 보았다.
“혹시 뭐, 이벤트 없을까?”
“예?”
눈을 크게 떴던 김경준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벤트라면 기삿거리 말씀입니까?”
“그렇지. 예를 들면 북한 대표단이 나 때문에 회담을 파기하지 않았다는 멘트도 좋고.”
“…….”
“뭐, 북한 대표 중 하나가 한국 기자들한테 한국당 의원 조철봉의 식견을
높게 평가한다는 둥 몇마디 해줘도 좋고.”
“…….”
“북한 대표 중 한명한테 돈 좀 먹이고 그렇게 부탁할 수 없을까?
그럼 귀국해서 내 주가가 높아질 것 같은데.”
“의원님.”
부르고 나서 심호흡을 한 김경준이 말을 잇는다.
“서둘지 마십시오, 의원님. 곧 기회가 올 테니까요.
그땐 꼭 제가 그 기회를 잡아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김경준이 절절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본다.
“저도 사람 여럿 겪었습니다만 의원님 성품이 제일 깨끗하십니다.
제가 진심으로 심복하고 있습니다.”
“어허, 그럴 리가.”
당황한 조철봉이 손까지 저었다.
그러다보니 얼굴까지 붉어졌다.
조철봉 평생에 성품이 깨끗하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다.
김경준 같은 인물한테서 진심으로 심복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가슴까지 세차게 뛴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다시 조철봉이 말했을 때 김경준은 정색했다.
“아닙니다. 참 순수하십니다.
그만하면 정치인 자질이 충분하십니다.”
“그거, 나, 비꼬는 말 아니지?”
“비꼬다니요? 진심입니다.”
펄쩍 뛰듯이 말한 김경준이 말을 잇는다.
“방금 말씀하신 트릭은 위험 부담이 좀 큽니다.
혹시 저쪽에서 먼저 기회를 준다면 모를까 우리측에서 제시하면 약점만 잡히게 됩니다.
이건 사업상 거래하고 다르거든요.”
“그렇군.”
“국가간 거래입니다. 오히려 안면몰수, 약점 추적은 더 철저할 테니까요.”
“내가 성급했어.”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을 때 탁자 위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다.
김경준이 전화기를 들고 귀에 붙이더니 곧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몇번 응답을 하고 나서 전화기를 조철봉에게 내밀었다.
“북한 대표단의 강진수씨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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