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국운(國運) 3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왕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까지 신하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놀았다.
거나하게 취한 왕이 중신들을 불러 모으고 입을 연 것은 연회의 막바지였다.
“과인은 아주 옛날부터 죽은 신라왕이 천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천사옥대라는 것을
한번 구경해보고 싶었으나 아직 동적을 치지 못해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소문에 그 천사옥대는 황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꾸몄는데, 길이가 열 뼘이요 단추가 62개나 되며,
일광 아래에서는 천하가 빛나고 달빛을 받으면 비기(秘氣)마저 감돌아 옥대가 절로 춤을 추는 것과
같다고 한다.
왕비는 백제에서 여러 진귀한 보물을 보았지만 아직 천사옥대와 같은 것은 구경하지 못했다 하니
과인으로선 더욱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왕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신라는 만조 고금에 유례가 없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국사를 경영한다고 하니 그 무도와 난정이 극에 달했다.
가만히 두어도 어찌 저절로 망하지 않으랴마는 그때까지 기다려 옥대를 보자니 지루하기 짝이 없구나.
과인은 신라왕의 보물 요대를 가져다가 곤전(坤殿)에게 선물로 주고 싶거니와, 제신들 가운데
누가 과인의 이 같은 소원을 이루어줄 것인가?”
왕이 만면에 엷은 웃음을 띤 채 좌우를 둘러보았다.
백제의 중신들은 임금의 말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자는 뜻인 줄 알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병관좌평 해수였다.
“그러잖아도 지난 몇 해 동안 대왕께서 군령을 내리지 아니하여 신은 엉덩이에 곰팡이가 슬고
칼날에는 녹이 슬 지경입니다.
신에게 군사 1만만 내주시면 단숨에 동적을 궤멸하고 천사옥대를 가져다 바치겠나이다.”
해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칠순에 가까운 노장 부여망지가 나섰다.
“신이 청운의 부푼 꿈을 안고 남령에서 부여헌을 따라온 지 올해로 어언 30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본국의 사정은 날로 좋아져 사람마다 넉넉하고 풍요로우며, 백성들은 입만 열면
태평세를 논하니 대왕의 덕업은 눈부시게 빛나는데,
정작 신은 수발이 황락하도록 태산 같은 성은만 입었지 과히 이룬 것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이제 땅내가 고소한 지경에 이르러 내일의 일을 장담할 수 없는 터에 마침 대왕께서
소원을 말씀하시니 이는 바로 신을 위한 마지막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오리까.
이 늙은 것에게 군사를 주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동적을 멸하여 백제의 7백 년 숙원을 풀겠나이다.”
술에 취한 망지였으나 그 음성은 사뭇 비장할 정도였다.
망지의 말이 미처 끝나지 않아 이번에는 은상이 나섰다.
“여자가 왕 노릇을 하는 동적 따위를 짓밟는데 어찌 연로하신 장군에게까지 수고를 끼치겠나이까?
신에게 5천 군사만 주십시오.
요대뿐 아니라 요대를 찬 여주까지 함께 생포하여 마마의 노리갯감으로 바치겠나이다.”
그러자 장왕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군사로써 신라를 치는 것은 오늘과 같이 흥겨운 자리에서 논할 일이 아니다.
지금 과인이 바라는 것은 다만 옥대일 뿐이다.”
그리고 왕은 뒷전에 버티고 선 우소를 힐끔 돌아보았다.
임금의 마음을 간파한 우소가 급히 앞으로 나섰다.
“신이 혼자 가겠나이다!”
순간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소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우소는 너무나 감격해 떨리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신에게 맡겨주십시오! 기어코 요대를 가져오겠나이다!”
우소의 말에 왕은 크게 흡족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정색을 하며 팔을 휘저어 만류했다.
“이 일은 성곽 하나를 쳐서 뺏는 것과는 그 격이 다르다.
군사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구중심처에 침입해 더군다나 여주의 허리에서
어떻게 요대를 훔쳐온단 말이냐?
내가 취중에 괜한 말을 하였으니 우소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
아무리 천사옥대가 탐이 난들 아끼는 장수만 하겠는가?”
우소가 그 말에 단념할 턱이 없었다.
“신은 명색이 일국의 장수로 천복을 타고나 성군을 만나기는 하였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한 번도 말을 타고 달리며 전장을 누벼보지 못하였나이다.
모름지기 장수란 피비린내 나는 적진 속을 종횡무진 치달리며 창칼로써 왕업을 돕고
무공을 세우는 법인데 신은 대왕의 성총이 지나쳐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장수인지 아닌지 스스로 의심스러울 때마저 있었나이다.
이제 대왕께서 말씀하신 그 일은 바로 신을 위한 일입니다.
우소가 비록 용렬하나 보내만 주신다면 기필코 원하시는 물건을 취하여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신에게 그 일을 맡겨주십시오!”
왕은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말렸지만 이미 욱기가 발동한 우소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왕은 마침내 중신들을 둘러보며,
“과인을 생각하는 우소의 마음은 실로 가상하고 장하구나.
내 비록 임금이지만 무슨 자격으로 그가 가고자 하는 충신과 맹장의 길을 가로막으랴.”
우소를 한껏 추켜세운 뒤에,
“가라! 가서 과인이 그토록 소원하는 신라의 보물을 취하여 무사히 돌아오라!”
하고 허락하니 우소가 어린애처럼 좋아 날뛰며,
“마마의 성은이 태산과 같습니다!”
감격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우소가 말 떨어진 즉시 가려고 서두르는 것을 왕이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아침에 가라 하고 다른 신하들도 한결같이 만류하며,
“언제 가져와도 공이 가져올 옥대이니 하루 늦게 간다고 달라질 게 있겠소.
오늘은 예서 향기로운 술이나 마시고 여흥이나 즐깁시다.”
하여 하는 수 없이 주저앉았는데, 임금이 무사히 환궁하고 나서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우소는 그때부터 비로소 고민에 휩싸였다.
비록 큰 소리로 장담은 해둔 터였지만 사실 그는 의욕만 앞섰을 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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