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국운(國運) 2
갑오년(634년) 2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역을 강행한 왕흥사(부여군 규암면)가 마침내 완공되었다.
부산(부소산)을 등지고 강가에 그림처럼 지은 왕흥사였지만 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백공들을 동원해 최대한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절이 완공되자 왕은 나룻배를 타고 신선처럼 한가롭게 절 문을 드나들었다.
그런데 절의 앞쪽 언덕에는 10여 명이 한꺼번에 앉을 만한 꽤 너른 바위가 있었다.
절이 완공된 직후 임금의 첫 행차가 있던 날이다.
나룻배로 왕흥사를 찾아온 왕이 그 바위에서 부처를 향해 예불을 올리자
신기하게도 바위 전체가 저절로 따뜻해졌다.
그 이후에도 왕이 올 때마다 바위가 번번이 똑같은 이적을 보이므로 사람들은
그 바위를 자온대(自溫臺)라고 불렀다.
3월부터는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공사가 진행되었다.
장왕은 사방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한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중국의 방장선산처럼 꾸몄다.
수만의 장정들이 동원되고도 만 2년이 걸린 엄청난 규모의 대역사였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던 것은 백성들의 왕에 대한 신망이 그만큼 두터웠기 때문이다.
“세상 참 좋아졌네. 경사 한복판에 섬을 만들다니 이런 사치가 어디 있나 그래?”
“사치도 할 만하니까 하는 게지.
우리 임금과 같은 분은 방장선산에서 신선처럼 살아도 무방하지. 암만, 무방하고 말고.”
“하긴 군역에 나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야 힘들어도 노역이 백 배 낫지.
내가 군역 대신에 공역에를 간다니 집안 어른들이 호시절 만나 호강한다고 여간 부러워들
하는 게 아님세.”
“우리가 시절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고난 셈이야.
역선 타고 나라 밖에 나갔던 장사치 얘기를 들어봐도 당인이건 왜인이건 백제서 왔다고 하면
알아들 준다더만. 그까짓 땅덩어리가 암만 크면 뭘 해?
사람이란 그저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게 제일이지.”
“왕생극락이 별건가? 천하에 밥 걱정 옷 걱정 없이 사는 족속은 우리 백제인들뿐인가봐.
서동 대왕 아니면 누가 우리를 이처럼 걱정 없이 살도록 해주겠어.
아무튼 대왕이 오래 살아야 해.”
“버들 그늘에 불사초가 자란다니 많이 구해 심어야 대왕이 오래 살지.”
불평은커녕 노역에 동원된 장정들은 그렇게들 입을 모았다.
장왕은 국력을 과시하듯 거의 해마다 당에 조공사를 파견했고, 조공물의 양도 엄청났다.
방장선산 공역이 끝난 병신년(636년) 2월, 왕은 춘궁기임에도 또다시 당에 조공사를 파견했다.
3월에는 좌우에 신료들을 거느리고 사비하(泗?河:금강)의 북포(北浦)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며 놀았다. 이 포구의 양쪽 언덕에는 기암괴석을 세우고 그 사이에 희귀한 꽃과 이상한 풀들을 심었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흥이 극에 달하면 친히 북을 치고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다.
따라온 신하들도 위신과 체면을 벗어던지고 흥에 겨워 덩달아 춤을 추었다.
이런 일들이 거듭되자 백제 사람들은 그곳을 대왕포(大王浦)라 일컬으며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으니
장왕에 대한 백제인들의 숭모가 대개 이러했다.
한편 우소(于召)라는 자는 목기루와 함께 국왕을 근시(近侍)하던 전내부의 장수로 벼슬이 덕솔(4품)
이었는데, 계사년에 자신보다 나이 어린 길지의 아들 은상이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
단숨에 은솔(3품)이 되자 이를 늘 불만스럽게 여겼다.
우소가 목기루를 보고,
“나는 임금을 가까이 뫼시느라 싸움다운 싸움은 해본 일이 없고,
따라서 무공도 세우지 못하였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네.
내가 만일 전내부의 장수가 아니었다면 근본도 미천한 은상 따위에 비길 것인가?”
하고 불평하여 목기루가,
“임금을 아무나 가까이 뫼시나? 그게 다 각별한 승은이지.”
하고 달래었으나,
“글쎄 그 각별한 승은이 원수라 그렇지. 그것이 내게는 도리어 해일세.”
하며 일변으론 게정을 피우고 일변으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곤 했다.
우소가 왕의 거둥을 호위하여 행차하는 곳마다 따라다니느라 딴에는 적잖이 공을 세웠으나
이런 것은 죄 광도 나지 않는 공이어서 돌연 일생이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병신년 4월에 왕이 또 신료들을 거느리고 풍광 명미한 곳에서 흥에 겨워 놀다가 뒷전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우소를 보고는,
“너도 갑옷을 벗고 이리로 와서 함께 어울려라.”
하니 우소가 미동도 아니한 채로,
“괘념치 마소서. 신은 언제나 흥도 없고 공도 없고 그저 있는 거라곤 뒷전 신세일 뿐입니다.”
대꾸를 비틈하게 하였다.
왕이 웃음을 거두고 우소를 되돌아보며,
“어째 너의 말 중에 뼈가 있다?”
하니 우소가 다시,
“신과 같은 것은 난세나 와야 흥이 날까, 지금과 같은 태평세에 무슨 흥이 나오리까.”
하며 비 맞은 중이 담 모퉁이 돌아가는 소리를 내므로 왕이 비로소 정색을 하고
악사들의 연주와 무희들이 춤추는 것을 그치게 하였다.
임금의 흥겨운 연회에 찬물을 끼얹었으니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불벼락이 떨어질 판이었으나
평소에 우소가 충직한 인물임을 알던 장왕은 그를 가까이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에 우소가 설움에 북받쳐 씩씩거리며 저는 그간 무공을 세울 기회가 한 번도 없었음을 토로하고
아울러 벼슬을 높일 기회 또한 없었음을 울먹이는 소리로 하소연하였다.
그제야 우소의 불만을 알아차린 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네게 기회를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라.”
하고서 중단한 여흥을 계속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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