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2장 국운(國運) 1

오늘의 쉼터 2014. 10. 7. 15:30

제22장 국운(國運) 1

 

 

 

그러나 칠악의 여막에서 들은 성충의 말은 육순이 넘은 백제 임금 부여장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보위에 오르기 전인 20대 청년 시절부터 한결같이 달려온 외길이었다.

신라에 뺏긴 구토 회복과 전조의 화려했던 시절을 재건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엄두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들에 나락이 패면 군사를 일으킬 때를 엿보았고, 밤에 별이 밝으면 천문을 살피며 길흉을 점쳤다.

왕정에 핀 꽃 모양을 보고도 역술을 헤아리고 병법을 구사하던 그였다.

한 해 3백 날이 그러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라면 금실 좋은 왕비와 정분을 나누는 것이었는데,

계사년(633년) 8월, 백기와 은상을 장수로 삼고 1천 군사로 신라 서곡성(西谷城)을 친 일은

바로 선화비와 가진 잠자리 때문이었다.

그날 장왕은 서곡성 일대에서 역풍이 일고, 개구리 떼가 처마 밑으로 모여들며,

비는 오지 않는데 왼종일 마른번개가 친다는 보고를 받았다.

밤에 내전에 들어 옷을 벗고 누우니 그날따라 선화가 감투거리를 제안하고 위로 올라가서는

요란하게 감탕질을 해대다가 제 흥에 못 이겨 금방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조금 뒤에 싱겁게 일을 끝낸 왕이 다시 손을 뻗어 선화를 어루만지자

선화가 기진맥진하여 누워서는,

“신첩은 이제 꼼짝달싹도 못하겠나이다.

이런 날이 흔치는 않으나 대개 그럴 때는 아침부터 몸이 나른하고

여근이 심하게 젖어 속옷을 자주 버립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습니다.”

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 말에 왕은 가만히 무릎을 쳤다.

“옳거니, 그럼 내가 서곡성을 얻겠구나.”

이튿날 그는 백기와 은상을 불러 1천 군사를 내주며 말했다.

“서곡성으로 첩자를 보내 성안의 동정을 엿보다가 추수가 끝났거든

성을 치고 아직 벼가 그대로 있거든 여유를 갖고 기다려라.

성을 칠 때는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칠 것이며,

군사를 내면 속전속결로 한꺼번에 들이쳐야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왕은 전날 하지 않던 다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군사들을 단속하여 성안의 백성들을 함부로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왕명을 받고 떠난 백기와 은상이 서곡성 밖에 이르러 방물장수로 가장한 첩자를 보내

성안의 동정을 엿보았더니 성민들이 한창 가을걷이 중이라 하므로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사나흘을 기다렸다.

그사이 수시로 돌풍이 일고 마른번개가 번쩍거리더니

어느 순간부터 무섭게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비 오기를 기다리던 백기와 은상조차도,

“이런 폭우에 어떻게 군사를 낸단 말이오?”

“그렇기야 하지만 왕명이 지엄하니 안 따를 수도 없지 않소?”

하고 고민까지 했을 정도였다.

두 장수는 빗발이 약간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벼락같이 군사를 이끌고 성문으로 진격해 쳐들어가니

서곡성의 신라군은 응전다운 응전도 해보지 못한 채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달아났다.

비가 와서 나락이 유실되기 전에 수확을 서둘렀던 성안의 장정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싸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탓이었다.

백기와 은상이 사비성을 떠나 서곡성을 얻고 돌아온 날까지 정확히 13일이니

기록에 남을 속전속결이 아닐 수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거지도 신선처럼 산다는 8월,

장왕은 승전보를 듣자 크게 기뻐하며 개선한 두 장수를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대신해 개보가 하례주를 올리며,

“대왕마마의 신통한 책략과 영묘한 계략은 실로 무궁무진하여 그 끝을 알 길이 없나이다.

어떻게 그런 계책을 내셨나이까?”

하고 묻자 장왕은 한참을 껄껄 웃고 나더니,

“이번에 서곡성을 취한 계책은 나의 것이 아니라 왕후의 것이다.”

하고서,

“역풍이 일고 개구리 떼가 처마 밑으로 모여드는 것은 반드시 큰물이 질 조짐이요,

마른번개는 땅의 음기에 하늘의 양기가 제대로 순응하지 못함을 뜻한다.

이럴 때 군사를 내면 대개는 지기(地氣)의 보호를 받게 마련이다.

그런데 서곡이란 음의 계곡, 즉 여자의 음부를 뜻하는 곳이며,

여인의 음부가 물이 많고 기름지면 남근을 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비가 오고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여근의 음기가 한창 달아올랐을 때

속전속결로 군사를 내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을 알았다.”

하니 이 말을 들은 신하들치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처럼 내외간 잠자리조차도 신라를 치는 일과 결부시키던 사람이 부여장이었다.

그 30년 일로매진(一路邁進)에 차츰 심각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성충이 나타나면서부터다.

물론 임금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급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여장은 서서히 변해갔다.

그는 서곡성을 얻고 나자 성안에 남아 있던 신라인들을 모두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가잠성을 취할 때 성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것과는 판이한 조치였다.

이 무렵을 전후해 신라 토벌에만 전념해온 장왕의 동진책(東進策)은 크게 선회하였다.

그는 자신을 도와 백제 부흥에 앞장섰던 대신과 장수들에게 일제히 벼슬을 높여주고

땅과 노비를 하사해 위로하였고, 군비 충당을 위해 모아둔 곡식과 재물을 백성들을 위해 사용했으며,

장정을 징발하여 군역에 동원하는 대신 나라 안에 대규모 역사를 일으켰다.

“백제는 이제 화려하고 찬란할 때가 되었다.

뉘라서 우리 백제를 얕본단 말인가?

백성들은 백제 사람임을 천하의 자랑으로 여길 때가 왔고,

지난 서른 해 동안 고생하여 이룬 것을 이제쯤은 마음껏 향유해도 좋으리라.”

장왕은 이런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2장 국운(國運) 3  (0) 2014.10.07
제22장 국운(國運) 2  (0) 2014.10.07
제21장 호각세(互角勢) 30  (0) 2014.10.04
제21장 호각세(互角勢) 29  (0) 2014.10.04
제21장 호각세(互角勢) 28  (0) 2014.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