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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호각세(互角勢) 30

오늘의 쉼터 2014. 10. 4. 15:54

제21장 호각세(互角勢) 30

 

 

 

장왕 일행이 사냥을 마치고 환궁하자 개보가 물었다.

“출렵의 수확이 어떠하옵니까?”

그러자 왕은 크게 흡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출렵을 여러 번 나갔지만 이번과 같이 훌륭한 수확은 얻은 적이 없어.”

“무슨 짐승을 잡았는데 그러십니까?”

“주나라 문왕이 위양(渭陽)에서 얻은 것보다 더한 것을 내가 칠악 사냥에서 얻어왔지.”

“주나라 문왕이 위양에서 얻은 것이라면 천하의 명재상인 여상(강태공)이 아닌지요?

 

그보다 더한 것을 얻으셨다니 누구를 말씀하십니까?”

이에 장왕이 개보에게만은 칠악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일러주었다.

 

개보가 임금의 말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크게 기뻐하며,

“풍운지회를 얻었으니 감축드립니다.

 

세 젊은이 가운데 신이 아는 사람은 흥수 하나이오나 백실공의 말이라면 능히 믿을 만합니다.

 

백실공은 나이 쉰이 넘어 출가해 중이 되었는데 토굴을 파고들어가 스무 해 동안 은신하며

 

도를 닦아 마침내 살아 있는 부처가 된 기인입니다.

 

그가 득도하여 토굴을 나설 때 1만 관음의 진신이 나타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천하가 오색광명(五色光明)으로 가득 차니 수덕사(修德寺)에 머물던

 

법승 혜현(惠現)이 그 신비로운 광경을 직접 목도하고 8만 배 치성 끝에 경전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지요.

 

백실공이 수년 전에 열반에 들었다가 8일 만에 박아놓은 널 뚜껑을 열고 나왔는데,

 

그가 널에서 나와 말하기를 아직 할 일이 남았으므로 8년을 더 살다가 가겠노라고 하였답니다.

 

아마도 그가 말한 8년이 올해로 끝이 아닌가 합니다.”

하고서,

“성충이란 청년은 만나보니 어떠하였나이까?”

하며 궁금한 듯이 물었다.

장왕이 성충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자 개보가 차차 안색이 백변하더니 이윽고 더 말이 없었다.

 

왕이 개보에게,

“경의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오?”

하였더니 개보가 두 번 절하고 답하기를,

“신이 예순에도 보지 못하는 것을 성충이 서른도 안 되어 말하니

 

불초한 신으로선 그저 유구무언일 따름입니다.

 

만일 성충이 30년만 먼저 났더라면 남역 평정은 물론 전하의 오랜 꿈인 삼한일통도

 

 벌 써 이루었을 게 분명합니다.

 

이를 생각하면 새삼 대왕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듯합니다.”

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장왕이 개보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는 다정한 표정과 온화한 말투로 개보를 위로하였다.

“경은 쓸데없는 생각을 거두라.

 

나무의 과실이 어디 절로 열리는 것인가?

 

뿌리는 뿌리의 할 일이 있고 줄기와 잎은 그것 나름으로 소임이 있는 법이니

 

과인의 30년 치세가 이만큼 번성한 것도 9할은 그대의 공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왕은 꽤나 오랫동안 백파가 천거한 세 젊은이를 부르지 않았다.

 

게다가 마천성(馬川城)을 비롯한 성곽 개축을 친히 감독하고 독려하는가 하면

 

군사를 일으켜 덕만 공주가 보위에 오른 신라를 치기도 했다.

 

또한 12월에는 사신을 당나라로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이를테면 성충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간 해오던 정사를 변함없이 펴나갔다.

그러나 대회까지 열어가며 새로 발탁한 선비와 장수들에게도 별다른 임무를 맡기지 아니하자

 

이듬해 이를 수상히 여긴 의자가,

“아바마마께서는 칠악에서 장차 이 나라의 정사를 맡길 기재들을 얻었다며 그토록 기뻐하시더니

 

그 뒤로 아무 말씀이 없으시니 궁금합니다.”

하고 물었다. 왕은 그제야 문득 잊었던 일이 떠오른 듯,

“아참,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서 비로소 유사에 명하여 세 젊은이를 궐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장왕은 지적과 성충에게 겨우 문독 벼슬을 내렸을 뿐이었고,

 

시덕 벼슬의 흥수는 도리어 사도부의 전경박사(傳經博士)직을 파하여

 

셋 모두를 태자궁에 직책 없이 배속시켰다.

 

누가 보더라도 실로 납득하기 힘든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상영과 의직을 비롯한 젊은 선비와 장수들도 처음 주었던 관직을 거두고

 

일제히 동궁 관아로 보내어 의자의 휘하에 두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대회까지 열어가며 뽑아놓은 이들을 중히 쓰지 않으십니까?”

이에 개보를 비롯한 중신들이 장왕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왕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는데,

 

어느 날인가 중신들을 위해 마련한 주연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심지의 일단을 피력하였다.

“과인은 사냥을 나가서도 함부로 짐승을 잡지 않는다.

 

만일 잘못하여 젖먹이 곰이나 어린 노루, 덜 자란 멧돼지를 잡았을 때는 반드시 이를 놓아준다.

 

그것이 비록 사람을 해칠 맹수의 새끼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과인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덜 익은 과육으로 갈증을 채우는 법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 까닭은 그것들을 잡거나 따서 먹을 사람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대는 항상 가고 또 온다.

 

내가 눈에 띄는 족족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을 분별없이 취해버린다면

 

다음 세상은 어찌 한단 말인가?

 

과인이 죽어도 해는 뜨고 종사는 흐르며 초목은 자라고 아이들은 변함없이 커갈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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