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 전향 (4)
(1894)전향-7
“나야.”
하고 수화기에서 장선옥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밤 8시 5분 전이었다.
앞에 앉은 최갑중이 긴장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장선옥의 전화인지를 아는 것이다.
“응, 기다리고 있었어.”
조철봉이 그렇게 대답했다.
방 안은 조용했다.
회사 근처의 일식당 방 안에서 전화를 받은 것이다.
“지금 도착한 거야?”
“오후 5시반쯤 도착했어.”
장선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숙소에서 전화하는 거야.”
“숙소는 어디로 정했는데?”
“이화원 근처.”
“그러면.”
힐끗 앞에 앉은 최갑중에게 시선을 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저녁 먹었어? 난 지금 일식당 ‘동경’에 있는데. ‘동경’ 알지?”
“알지.”
“저녁 안먹었으면 일루 와. 택시타면 30분 거리잖아?”
“혼자 있어?”
“그래, 혼자야.”
이제는 최갑중을 외면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나, 밥 안먹고 방에서 기다릴 테니까.”
“한시간쯤 걸릴 거야.”
“알았어.”
그래놓고 핸드폰을 닫은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한시간 후에 여기 온단다.”
“혼자라고 하셨으니 나가란 말씀이군요.”
“미안하다.”
“뭐 좀 먹고 가면 안됩니까? 시킨 요리가 곧 올 텐데.”
“안돼.”
“제가 있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잠깐 최갑중의 얼굴을 들여다본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다. 내가 좀 다급해져서.”
“형님답지 않네요.”
“3백만불짜리라서 그런가 봐.”
그러고는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북한측에선 장선옥이 이제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을까?”
혼잣소리처럼 말한 조철봉이 최갑중을 보았다.
“어쨌든 다시 돌려보낸 걸 보면 이게 현실인데 말야.”
“글쎄요.”
“내가 사기꾼 출신이라 그런지 처음에는 감동을 먹었지만 점점 찜찜해져.
자꾸 의심이 간단 말야.”
“누가요? 장선옥씨가요?”
“아니.”
그러자 최갑중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죠.”
“지금까지 내가 사기는 쳤지만 당한 적은 없어. 너도 알지?”
“그럼요. 형님이 누구신데.”
“장선옥이 작업을 하려고 돌아온 것일까? 네 생각은 어떠냐?”
“형님 돈 말입니다.”
불쑥 최갑중이 요점을 찌르자 조철봉은 대번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둘의 손발이 맞는 것이다.
“그래, 나도 그것이 핵심이라는 생각을 했다.
선뜻 3백만불을 내놨으니까 말야.”
“제가 저쪽 입장이라면 형님 대신 목록을 주욱 따져보고 나서 한탕 크게 더 뛸 겁니다.”
“나도 그랬을 거다.”
남의 일처럼 말한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최갑중을 보았다.
“장선옥이라는 인질을 잡히고 왔겠지.”
“당근이죠.”
최갑중이 맞장구를 쳤다.
(1895)전향-8
장선옥이 방으로 들어섰을 때는 최갑중이 떠난 후였다.
말은 상관없지 않으냐고 했어도 최갑중은 장선옥이 올 때가 되자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어, 그동안 고생 많았지?”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그렇게 인사를 하자 장선옥이 픽 웃었다.
“잘 지냈어?”
대답 대신 이쪽 안부만 묻는 걸 보면 거짓 변명 따위는 안하려는 의도 같았다.
최갑중의 자리에 장선옥이 앉더니 상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종업원을 시켜서 최갑중의 흔적을 치웠지만 느낌이 오는 것 같았다.
“자, 좀 들어. 내가 손을 좀 댔지만.”
조철봉이 권하자 장선옥이 젓가락 대신 술잔을 들었다. 청주 잔이다.
“술 마시면서 안주 먹을 거야.”
“좋도록.”
장선옥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조철봉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김성산씨가 말해 주었는데 이제 자유롭다면서?
무역 일만 하도록 보냈다고 말야.
말하자면 국적은 아직 북한이지만 앞으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었는데, 맞나?”
“김사장님이 그렇게 말해?”
“그럼. 내가 윤달수한테 준 몸값을 인정한다고까지 하던데.”
“3백만불 냈다면서?”
한모금 청주를 삼킨 장선옥이 굳어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이렇게 돌아왔어.”
“원, 천만에.”
시선을 비낀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막상 얼굴을 보니까 반갑기보다 좀 서글프구나, 야.”
장선옥도 외면했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까지 최갑중하고 같이 있었는데 네 이야기를 좀 했지.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네가 그냥 풀려 나온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
“애들 장난도 아니고 3백만불을 받고 네 맘대로 해라 하고 내보내는 국가가 어디 있어?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
“그래서 결국 이렇게 마음을 먹었지. 네 마음속이 어떻든,
네가 무슨 지시를 받고 있건 간에 네가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온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하고.”
“…….”
“그랬더니 가슴이 개운해지더구만.”
그때 장선옥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우린 이제 자유롭게 만날 수 있어.”
이제는 조철봉이 눈만 껌벅였고 장선옥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감시당하지도 않을 거야. 전처럼 같이 살아도 돼.”
“…….”
“모두 자기 덕분이야. 고마워.”
그러자 조철봉이 주전자를 들어 장선옥의 빈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내가 말야.”
시선을 식탁 위에 내린 조철봉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처럼 나한테 감동을 준 여자는 처음이야.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그냥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졌고 눈물이 났어.”
놀란 장선옥이 머리를 들었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돈은 문제가 아냐. 난 윤달수가 더 내라고 했으면 더 냈을 거야.
이제 난 만족해. 네가 나온 것만으로 만족한다구.”
목이 멘 조철봉은 말을 멈췄고 방 안은 한동안 무겁지만 열띤 정적에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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