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4. 전향 (3)
(1892)전향-5
“아아, 웬일이야?”
조철봉이 엉겁결에 그렇게 묻고나서 금방 후회했다.
여자 전화를 이렇게 받으면 실례인 것이다.
용건은 저쪽에서 먼저 말하도록 해야 한다.
그때 김옥희가 말했다.
“저기, 잘 들어가셨나 해서요.”
오전 11시반이다.
아침 인사치고는 늦었지만 조철봉은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간 느낌이 들었다.
이런 인사는 얼마만인가?
황홀한 밤을 지낸 여자로부터 받는 안부 인사 말이다.
“응, 그래. 그래서 이렇게 씩씩하게 일하고 있지 않아?”
힐끗 앞쪽에 앉은 최갑중에게 시선을 준 조철봉이 은근하게 물었다.
“어때? 아침에는 경황이 없어서 물어보지 못했는데, 어제 좋았어?”
“네, 너무.”
그러더니 수화기에서 한숨 소리까지 났다.
“저, 지금 집이에요. 오늘은 집에서 쉬고 있어요.”
“저런, 왜?”
“그냥요. 몸도 나른하고.”
“어제 무리한 거 아냐?”
“그 반대예요.”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이런 대화라면 다섯시간 동안이라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외면한 채 앉아 있는 최갑중이 걸렸다.
“이봐, 내가 다시 전화할게. 이 번호로 말야.”
달래듯이 말하자 김옥희도 정신이 난듯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그래요. 바쁘신데 그럼 나중에.”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최갑중에게 말했다.
“이 여자는 윤달수가 날 빠뜨리려고 만든 함정이었어.”
눈만 크게 뜬 최갑중을 향해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어보였다.
“윤달수가 잡혀가자 김성산이 어제 그 함정을 나한테 다시 데려온 거야.
그것이 화해의 신호인 것 같았지. 하지만.”
최갑중은 시선만 주었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어젯밤을 같이 보냈어도 찜찜했는데 오늘 김성산의 전화를 받고 분명해졌어.”
“그러면.”
입맛을 다신 최갑중이 어려운 문제를 읽는 수험생의 표정이 되어서 조철봉을 보았다.
“어제 가신 그 식당의 여자하고도 새로 엮이셨단 말씀이군요?”
“부담없는 관계가 된 것이지.”
소파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은근하게 웃었다.
마음이 가벼워져서 입밖으로 하마터면 남남북녀 따위의 흰소리가 튀어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그랬다면 제 아무리 조철봉의 엽색 행각에 이골이 난 최갑중이라고 해도 몇마디 하지 않고는
못배겼을 것이다.
베이징에 만들어놓은 애인이 이제 김옥희에다 이경애, 거기에 장선옥까지 돌아온다니 셋이다.
그러나 조철봉이 그 셋으로 만족할 위인인가? 어림없다.
그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그럼 기분도 개운해졌으니까 오늘밤 술 한잔 할까? 우리 가게에서 말야.”
눈을 크게 뜬 최갑중을 향해 조철봉이 눈웃음을 쳤다.
“인마, 내가 네 귀가 닳도록 교육을 시켰지 않아?
매일 밤 그걸 해도 쏘지만 않으면 끄떡없다고 말야.
난 어젯밤 다섯번 했어도 총알은 한번도 발사하지 않았다.”
“그게 뜻대로 됩니까?”
말은 불퉁스럽게 했지만 최갑중의 두 눈에 생기가 떠올랐다.
몸이 아픈 인간을 빼고 이런 대화를 싫어하는 남자는 정신적인 결함이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최갑중이 기대에 찬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1893)전향-6
베이징 공항의 입국장으로 나온 장선옥의 앞으로 강철국이 다가와 섰다.
“고생하셨지요?”
반백의 머리에 검은 피부의 강철국은 옷차림도 허름해서 영락없는 노동자였는데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래서 인사랍시고 묻는 말과 표정이 어울리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건성으로 대답한 장선옥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가십시다.”
강철국이 몸을 돌리며 말했으므로 장선옥은 잠자코 뒤를 따랐다.
오후 5시반, 공항 입국장은 혼잡했다.
키가 큰 강철국의 뒤를 따르면서 장선옥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뱉었다.
강철국은 보위부 소속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계급이나 직책, 경력까지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강철국이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은 간부급들은 모두 다 안다.
강철국은 베이징에 파견된 북한의 모든 기관원을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대기시킨 승용차에 탔을 때 강철국이 장선옥에게 말했다.
“조철봉은 지금 사무실에 있습니다.
공항으로 장선옥씨 마중을 나올 줄 알았는데 움직이지 않는군요.”
장선옥은 앞쪽만 보았고 강철국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 도착시간까지 알려 주었으니까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더니 강철국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장선옥씨 새 핸드폰입니다.”
“감사합니다.”
장선옥이 핸드폰을 받자 강철국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김성산 동무도 장선옥씨가 사면받은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조철봉한테 그대로 전해 주었을 겁니다.”
“…….”
“계획했던 대로 김성산 동무는 청진식당의 김옥희 동무를 조철봉한테 붙여 주었단 말이오.”
그때 장선옥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가 외면했다.
그러나 강철국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김옥희는 본래 윤달수가 조철봉 약점을 잡기 위해서 데리고 온 미인계지요.
그런데 조철봉이 눈치를 채었는지 윤달수의 공작에는 넘어가지 않았소.
방에 같이 있었지만 일은 치르지 않았거든.”
“…….”
“그런데 이틀 전에 김성산의 제의에는 쉽게 무너졌소.
윤달수가 소환되었다는 말을 듣고 긴장이 풀린 것 같습니다.”
“…….”
“그러고는 장선옥 동무 구명건으로 윤달수한테 300만불을 주었다고 실토한 거요.”
다시 강철국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 말을 듣고 윤달수를 추궁했더니 마카오 은행의 비밀계좌에 750만불이 입금되어 있는 것을
회수할 수 있었던 거요.
조철봉이 덕분에 찾은 돈이지.”
“저어.”
머리를 든 장선옥이 강철국을 보았다.
“제가 평양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조철봉의 전향은 어렵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압니다.”
강철국이 이제는 앞쪽을 향한 채로 말했다.
“그 자는 이미 김옥희 작전으로 약점이 잡힌 상황이지.
이제 장 동무가 붙어서 안팎으로 몰아붙여야 됩니다.”
의자에 등을 붙인 강철국이 말을 이었다.
“그자 재산을 현금화하면 대략 1조가 됩니다.
사기꾼이 엄청나게 번 것이지.
그까짓놈 전향 따위는 문제가 아니오.
그놈 재산이 목적이지.”
강철국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차게 울렸다.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656. 전향 (5) (0) | 2014.10.05 |
---|---|
655. 전향 (4) (0) | 2014.10.05 |
653. 전향 (2) (0) | 2014.10.05 |
652. 전향 (1) (0) | 2014.10.05 |
651. 숙청 (12) (0) | 2014.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