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 숙청 (3)
(1868)숙청-5
사무실 직통 전화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10명도 안 된다.
한국에 있는 와이프 이은지도 모른다.
급한 일이 있으면 휴대전화로 하든지 대표 전화를 한다.
직통 전화가 울렸을 때 조철봉은 최갑중과 이수동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이수동은 입사 이틀째가 되는 날부터 감독관 오대식을 장악했다.
오대식이 택할 길은 굴복하고 따르느냐 아니면 평양으로 소환되느냐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조철봉이 응답했을 때 곧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야.”
목소리가 낮은 데다 가라앉아서 조철봉은 누군지 깨닫는 데 3초쯤 걸렸다.
긴장한 조철봉이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응, 그래. 어디야?”
장선옥인 것이다.
동거를 청산한 지 이주일째가 되어가고 있다.
그동안 장선옥과는 통화도 하지 못했는데 서로 부딪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여기 시내인데.”
잠깐 뜸을 들이고 난 장선옥이 말을 이었다.
“지금 만날 수 있어?”
“아, 그럼.”
조철봉이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거기 어디야?”
“북해공원 입구 쪽에 있는데 택시 타고 와. 거기서 다시 연락할게.”
“알았어. 휴대전화로 연락하자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최갑중을 보았다.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이다.
“장선옥이다.”
“만나실 겁니까?”
따라 일어선 최갑중이 묻자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연락 주십시오. 기다릴 테니까요.”
“택시타고 오라는데 이경애 불러.”
서둘러 방을 나가면서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철봉이 북해공원 근처에 도착했을 때 휴대전화가 진동을 했다.
휴대전화를 귀에 붙인 조철봉은 장선옥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 공원 입구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 타고 있거든. 세 번째 택시야.”
“알았어.”
휴대전화를 귀에서 뗀 조철봉이 이경애에게 말했다.
“택시 정류장에서 세 번째 택시에 타고 있다는구나.”
“무슨 일일까요.”
통역으로 데려온 이경애가 불안한 표정으로 묻더니 앞을 살폈다.
택시는 정류장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다.
“넌 여기서 돌아가. 장선옥이 날 데려다 줄 테니까.”
“괜찮으시겠어요?”
“응, 걱정마.”
“아, 저기.”
이경애가 가리킨 택시 뒷좌석에 타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장선옥이다.
차가 옆에 멈추었고 조철봉만 내렸다.
조철봉이 다가가자 택시 안에서 장선옥이 웃음 띤 얼굴로 맞았다.
장선옥이 스치고 지나는 택시를 보더니 조철봉에게 물었다.
“이경애 데려왔어?”
“응. 통역으로. 걘 괜찮아.”
그러자 머리를 끄덕인 장선옥이 운전사에게 말하자 택시는 서둘러 출발했다.
“무슨 일이야?”
택시가 속력을 내었을 때 조철봉이 물었다.
그러자 장선옥이 다시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나, 평양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어.”
놀란 조철봉이 숨을 죽였고 장선옥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사상교육을 받을 것 같아.”
(1869)숙청-6
베이징 동물원 건너편의 중식당 방으로 안내되어 둘이서 마주앉을 때까지
장선옥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 저녁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장선옥은 음료수를 주문하더니
차분해진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언제 가는 거야?”
참다 못한 조철봉이 묻자 장선옥은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내일.”
“내일?”
놀란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갑자기.”
“그냥 몸만 가면 되니까.”
“업무 인계인수도 해야 할 것 아냐?”
“나 없어도 돼.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사상교육을 받는다고?”
조철봉이 묻자 장선옥은 외면한 채 대답했다.
“그래. 많이 물이 들었어. 이를테면.”
“썩었단 말이군.”
“꼭 그렇다기보다.”
“사상교육은 어떻게 받는 건데?”
“그냥 교육이야.”
“숙청당한 건가?”
불쑥 조철봉이 묻자 장선옥이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이번에는 장선옥이 웃지 않았다.
조철봉이 내친 김에 다시 물었다.
“수용소 가는 거야?”
“모르겠어.”
“무슨 죄로?”
눈을 치켜뜬 조철봉이 장선옥을 노려보았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네가 공금을 횡령했니?
아니면 지시를 어겼니? 너같이 충성을 한 애국자가 어디 있다고.”
“난 물이 들었어.”
다시 외면한 장선옥이 말을 이었다.
“사상 재교육을 받아야 돼.”
“너, 탈북해.”
불쑥 조철봉이 말했지만 장선옥은 옆쪽벽을 향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네가 탈북한다고 해서 남북한 합자사업이 지장을 받지 않을 거야.
이건 그대로 진행이 될 거라고, 그리고 네 일은 얼마 지나고 나면 잊어져.
그럼 넌 한국에서 실컷 즐기면서 살 수가 있어.
그래. 내가 빼돌린 비자금을 네 앞으로 넘겨줄게. 1차로 1백만불 주지.”
“그만.”
장선옥이 손을 들어 막았지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너한테 무역회사 하나를 차려주지.
아마 정부에서도 도와줄 거야.
그럼 넌 자립해서 살 수가 있어.”
“그만.”
이제는 장선옥이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장선옥이 입술끝을 올리며 웃어 보였지만 눈빛은 차게 느껴졌다.
“내 조국은 북조선이고 난 내 조국을 배신하지 않아.”
장선옥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또렷했다.
“난 한민족이 장군님의 영도하에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받아왔던 교육이고 소원이기도 해.”
그러고는 장선옥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길게 숨을 뱉았다.
“때로는 남조선의 체제, 자유, 그리고 자본력이 부럽고 위압감까지 느껴진 적도 있어,
하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어. 다 나쁜 게 아냐.”
조철봉은 이미 장선옥의 눈빛을 보았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 북조선에는 오대식 같은 인간도 있지만 장선옥 같은 애국자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뿌리는 깊고도 굵다.
둘 다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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