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 남북동거(6)
(1848)남북동거-11
이번에는 열흘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은지는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물론 그동안 하루에 한번은 꼭 전화를 했고 집안일은 비서를 통해 챙겼기 때문에
소홀한 점은 없다.
뛰쳐나온 영일은 조철봉한테서 선물 박스를 받더니 두말 않고 제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달려 나올 때부터 들어갈 때까지 조철봉과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손에 쥔
선물 박스만 보았다.
입맛을 다시는 조철봉을 보더니 이은지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다 그래. 손님처럼 오가는 사람이 그 정도면 됐지, 뭐.”
“아니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새삼스럽게 인사는.”
조철봉의 저고리를 뒤에서 벗기면서 이은지가 말을 이었다.
“영일이도 이젠 6학년이라구. 사춘기란 말이야.”
“사춘기?”
정색한 조철봉의 앞으로 다가선 이은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시면 가만있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고마워.”
감동한 조철봉이 두손을 이은지의 어깨위에 놓았다.
“내가 집안일에 신경을 더 써야 되는데 너무 바빠서 말야.
아무래도 일을 좀 줄여야 될 것 같아.”
진심으로 말했지만 말하는 순간뿐이다.
말을 뱉은 즉시로 잊는다.
그러나 이은지는 건성으로 듣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색한 표정도 아닌 채로 머리만 끄덕였다.
“어서 씻어요. 저녁 차릴게.”
이은지는 본래 영일의 담임선생이었던 것이다.
조철봉은 이은지와의 재혼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실속있는 선택이라고 자부했다.
자식과 가정, 모두에게 득이 되는 선택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이은지는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저녁상을 다 차려놓고 있었다.
집안에는 가정부까지 넷뿐이다.
어머니는 회원들과 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요즘은 일년에 절반은 여행을 다닌다.
“저기.”
식사를 절반쯤 했을 때 이은지가 문득 얼굴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이은지가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아이 갖도록 할까?”
“응?”
입안의 음식을 삼키는 몇초 동안 조철봉은 맹렬하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입안을 비우고 나서 말했다.
“조오치.”
그것이 부족한 것처럼 덧붙였다.
“나도 몇번이나 말하고 싶었지만 당신이 부담을 느낄 것 같아서 참았거든.”
“…….”
“당신이 영일이 때문에 애를 미루는 것 같아서 말야.”
“처음에는 그랬어.”
이은지가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영일이가 저렇게 큰 걸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어.
당신하고 나하고를 연결해주는 인연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고.”
“…….”
“집에 혼자 있으면 허전해져. 알아?”
“알아.”
시선을 내린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미안해.”
“딴 데서 애 낳지는 않았지?”
“그, 그럴 리가.”
놀란 조철봉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려다 그만두었다.
시선을 든 조철봉이 이은지를 똑바로 보았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마.”
“그말 믿기로 하지.”
그러더니 이은지가 얼굴을 굳혔다.
“결심했어. 애 낳을 거야.”
(1849)남북동거-12
그렇다. 인연이다.
그날 밤 잠이 든 이은지의 머리 무게를 팔에 가득 느끼면서 조철봉이 생각했다.
이은지는 고맙게도 끊지 못할 인연을 만들어 주려고 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 아닌가?
남남이었던 두 남녀의 인연을 거쳐 혈연이 태어난다.
자식이다.
자식을 매개로 피도 섞이지 않은 부부관계가 더 원활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식을 인질로만 이용한다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작자들은 빼놓자.
그것들 주장을 들으면 말은 그럴 듯 하지만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써먹을 데가 없는 것이다.
조철봉은 이은지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자식을 생각하고는 길게 숨을 뱉었다.
첫째로 왠지 안심이 된다.
나란히 걷던 둘이 기분 좋게 묶어지는 느낌이 왔다.
좀 무거운 느낌, 그것이 책임감인가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승객 하나가 더 늘어난 것 같지는 않다.
둘이 따로따로, 나란히 걷는 느낌이 맞다.
차는 무슨, 갈라선다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린다는 거야 뭐야?
결혼은 차 안에, 그 단단한 차 안에 들어가는 게 아냐.
요즘은 안 그래. 그저 나란히 걷는겨. 가끔 해찰도 하고,
하나가 멈춰서면 같이 서고, 그러다 하나가 먼저 디지든가 옆길로 새든가 하는겨.
“안 자?”
하고 이은지가 묻는 바람에 조철봉은 흠칫 놀랐다.
어둠 속에서 이은지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베고 있던 팔에서 머리를 뗀 이은지가 바짝 몸을 붙였다.
알몸이어서 매끄러운 피부가 닿았고 숨결이 가슴 위로 흘러갔다.
조철봉은 이은지의 어깨를 감아 안았다.
이은지가 한쪽 다리를 조철봉의 하반신 위로 감듯이 올렸으므로
둘의 몸은 빈틈없이 붙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이은지가 가슴 위의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아직도 목소리에는 달콤하면서 나른한 여운이 묻어 있다.
방 안의 공기도 아직 습하고 비린 냄새가 가셔지지 않았다.
조철봉이 이은지의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우리 아이 생각했어.”
“딸이 좋아, 아들이 좋아?”
“다 좋아.”
“영일이가 있으니까 딸이 더 좋겠지?”
“다 좋다니까.”
조철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떠올려 보았다.
사내건 계집애건 상관이 없다.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때 이은지가 말했다.
“당신한테 조금 더 성실해지고 싶어.
애 낳으면 학교도 그만둘 거야.”
놀란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은지가 손가락으로 조철봉의 가슴을 가볍게 문질렀다.
“이제 영일이도 중학교에 들어갈 텐데 집에서 봐 줘야 돼.”
“고맙다.”
“당신도 집안일에 좀 더 신경을 써야 돼. 나 혼자서는 벅차단 말야.”
“그야, 당연히.”
정색한 조철봉의 목소리가 분명해졌다.
“난 집하고 회사뿐이야.”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이번 남북합작 사업만 궤도에 오르면 난 주로 서울에 머물게 될 거야.”
“…….”
“그때까지만이야.”
그때 문득 베이징에서 기다리고 있을 장선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어제 별장 근처의 골짜기에서 섹스를 했던 나명진의 얼굴도 떠올랐다.
다시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했다.
“난 너뿐이야.”
그러고는 도둑이 제발 저린 듯이 말을 이었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여자 생각도 못해.”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634. 남북동거(8) (0) | 2014.10.05 |
---|---|
633. 남북동거(7) (0) | 2014.10.05 |
631. 남북동거(5) (0) | 2014.10.01 |
630. 남북동거(4) (0) | 2014.10.01 |
629. 남북동거(3) (0) | 2014.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