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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호각세(互角勢) 26

오늘의 쉼터 2014. 10. 4. 15:39

제21장 호각세(互角勢) 26

 

 

 

도인 백파는 사택기루의 증손인 지적에 대해 한동안 설명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또 한 인물을 천거했다.

“대왕께서 나라의 국론을 하나로 아울러 전조의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면 앞서 말씀드린 흥수나

지적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미 부국의 기틀은 다져졌으니 한수 유역을 되찾고 요서의 고토를 회복하면 그만이 아닙니까?

그러나 7백 년 사직의 골칫거리인 신라를 쳐 없애고 북적 고구려마저 아울러 삼한의 강역을

마침내 하나로 만들자면 반드시 성충(成忠)과 같은 기재(奇才)를 얻어야 합니다.”

장왕이 성충의 이름을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성충을 만나본 이들은 그를 가리켜 보통의 선비라 평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친 자라고

욕하는 이도 없지 않으나 이는 모두 성충의 그릇을 알아보지 못한 탓입니다.

사람의 눈은 너무 작은 것도 못 보지만 바람이나 공기처럼 너무 큰 것도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성충은 무령 대왕이 아직 임금이 되기 전에 왜국에서 낳은 서자의 후손으로 그 조부인

부여인(扶餘忍) 대에 일가가 본국 백제로 건너왔다.

인은 한때 위덕왕 조정에서 벼슬을 살기도 했지만 워낙 타고난 성정이 자유분방하여

말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중국을 넘나들며 돈을 벌었다.

그는 본국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유(扶餘裕)요 둘째가 위(扶餘瑋)였다.

성충은 둘째 위의 장자다.

위는 어려서부터 그 아버지를 따라 교역물을 싣고 왜와 중국의 등주항을 오가는

역선(易船)의 길잡이 노릇을 하며 살았다.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자유분방하던 위는 본국에서 국씨(國氏) 여자와 성혼하였으나

왜에도 젊은 첩을 두었고 중국에도 따로 살림을 차려 자식까지 낳았다.

그러다 마흔다섯의 나이로 풍랑에 목숨을 잃은 것이 장왕 재위 13년째인 임신년(612년)의 일이다.

그때부터 위의 형인 부여유가 아우의 식솔들을 거두어 한집에서 살았다.

유는 아버지나 아우와는 달리 학문을 좋아하고 번잡한 것을 싫어하여 경사를 떠나 칠악 인근에

기반을 닦고 살았는데, 젊어서는 흥수의 조부인 장흥의 문하에서 유학과 도학을 배웠고,

뒤로는 불법 에 심취하여 수덕사에 머물기도 했다.

유가 아들이 없어 성충 형제들을 마치 제 친자식처럼 거두고 보살폈는데 특히 성충에게는

학문에 뜻이 있음을 알고 일찍부터 중국에 유학을 시켰다.

그 바람에 가산을 날리고 전답도 죄 팔아치워 유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널을 묻을 땅 한 뼘이 없었다.

성충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백부인 유를 친아버지처럼 여기며  자랐다.

성충은 백부의 도움으로 16, 7세 어린 나이에 이미 장안의 이름난 스승을 찾아다니고

학문하는 사람들을 폭넓게 사귀었는데,

그 무렵 당나라 왕자로 있던 이세민과도 교분이 있었지만 신라에서 온 김춘추나

고구려 욕살의 아들 연개소문과도 자주 어울렸다.

이들 세 사람은 엇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로, 비록 태어난 나라는 달랐지만

다 같은 동방 출신에 타향살이를 한다는 공통점들이 있었다.

그것이 북부나 서부에서 온 생판 다른 외모의 사람들 속에서 적대감보다는

묘한 친밀감과 공감대를 이루었다.

이들 셋은 장안의 황성(皇城)으로 통하는 주작문(朱雀門) 밖에 이웃해 살며

지나치는 길이 있으면 들러 서로 안부를 묻곤 했다.

나이는 임술(602년)생인 춘추가 가장 위요,

계해(603년)생인 개소문이 중간이며, 성충은 을축(605년)생이라

제일 어렸지만 셋은 서로를 예우하여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예의 바르고 조용한 성품의 춘추와 당차고 강직한 개소문 사이에서

성충은 그 두 사람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노릇을 톡톡히 하였고,

비록 나이는 어려도 춘추의 학문이나 개소문의 지혜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묘하게도 이들은 삼한 출신이면서 워낙 격의 없이 가깝게들 지내니

하루는 이세민이 자신의 사가로 세 사람을 모두 초청하여,

“장차 세 분 아우님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삼한이 서로 피를 흘리며 다툴 일은 없을 것 같소?”

하고 말했다. 이에 춘추는 겸연쩍은 얼굴로,

“우리가 고향이 달랐던가? 나는 지금껏 한 고을에서 온 줄 알았네.”

하였고, 개소문도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세민 형님은 삼한이 서로 다툰 것만 알지 서로 양식을 꿔주며 지낸 과거지사는 통 모르시는 모양이오?”

하고 어물쩍 넘겼는데, 유독 성충만이 정색을 하며,

“저는 본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여기 계신 두 분 형님처럼 나라의 중책을 맡을 만한 신분이 아니어서

주제넘게 국사를 논할 수는 없지만 장안에 와서 형님들과 깊이 사귀며 백제 사람임을 까맣게 잊고

지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삼한 얘기가 나오면 까닭 없이 마음에 벽이 생기고, 없던 경계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실로 안타깝다는 눈빛을 하고 눈물까지 글썽였다.

성충의 말에 춘추와 개소문은 숙연해졌고, 이세민은 성충에게 술을 권하며,

“천심은 민심이며 나랏일을 만드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라 하였소.

백제 아우님의 뜻이 저토록 맑고 향기로우니 이제 삼한 사람들이 한 식구처럼

아름답게 지낼 날도 멀지 않은 게 틀림없소.”

하고 위로하였다. 그 일은 본국의 사정과 무관하게 살던 세 사람에게

새삼 삼국의 개 이빨과 같은 국경이며 치열한 정족세(鼎足勢)를 떠올리게 하였다.

하지만 셋은 곧 다시 어울렸고 이들의 교우는 이세민이 당주가 되고 춘추가 귀국하던

병술년(626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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