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25
그러던 어느 날, 온종일 보이지 않던 지적이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와 계옹이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고 꾸중한 뒤에 저녁을 먹이고 재웠는데,
그렇게 잠자리에 든 아이가 이튿날 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했다.
계옹 내외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사방에서 의원을 불러다가 아이를 보게 하였더니
한결같이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쩔쩔매면서,
“이런 병은 보던 중에 처음이올시다.”
“귀하신 아드님이 요망한 괴질을 얻었소.”
“손을 쓸 수 없으니 다른 의원을 청해보오.”
약이 없다고 이구동성 입을 모았다. 계옹 내외가 얼굴이 노래져서 속수무책으로 앉았으려니
승석 무렵 생면부지의 중 하나가 마당에 불쑥 들어서는데,
그 중의 주변으로 천계들이 10여 마리나 달라붙어 요란하게 울어댈 뿐만 아니라 중이 나타나자
마당에서 모이를 쪼던 것들까지 가세해 일제히 야단법석을 부렸다.
“이놈의 닭들이 왜 이러나……”
중이 팔을 흔들어 풀썩풀썩 뛰어오르는 닭들을 귀찮다는 듯이 뿌리치고서,
“시주나 좀 하시구려.”
하였다. 계옹이 당최 시주할 정신이 아니었지만 천계들의 하는 짓이 하도 수상하니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여보 스님, 내가 시주는 넉넉히 할 테니 안채에 들어가 우리 집 아이나 좀 보아주오.”
하고는 안으로 청하여 지적을 보였다. 중이 자리에 누운 지적을 보는 순간 한번 야릇하게 웃더니
맥을 짚어보고는 또 웃고, 맥을 놓을 때까지 시종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지 아니하였다.
계옹이 답답한 마음에,
“스님은 혼절한 아이를 보고 어찌 그처럼 웃기만 하시오?”
원망하듯 물으니 그 중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어르신께서는 시주를 단단히 해야겠습니다.”
하고는 이어 설명하기를,
“이 아이가 아마도 나지산 금천(金泉)에 사는 어룡(魚龍)을 잡아먹은 모양입니다.
허, 고 녀석 맹랑도 하지. 금천에 사는 어룡이라면 나지산의 영물 중에 영물이었으니
산 하나를 통째 뱃속에 삼킨 거나 진배가 없습지요.
그러구선 소화를 못 시키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소승이 어찌 웃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먹을 만한 것을 먹어야지요.”
말을 마치자 간신히 참았다는 듯 다시 웃었다.
계옹이 치료할 방법을 물으니 중이 마당에서 노는 천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약들이 널려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어룡은 천계와 상극이니
암수 한 쌍을 잡아다가 푹 고아 먹이십시오.
그럼 곧 일어날 것입니다.”
계옹이 고맙다는 치사와 함께 시주를 넉넉하게 하였더니
중이 바랑에 가득 곡물을 챙겨 나가다가 다시 되돌아와 하는 소리가,
“어르신께서는 귀한 아드님을 두셨지만 본래 저 아이는 이승에 태어날 팔자가 아니었습니다.
대개 그럴 경우는 장성하기 전에 요절하게 마련인데 아드님의 경우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요행 목숨을 건졌으나 언제 어느 때에 또 오늘과 같은 곡경을 치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하고는,
“그 액을 피하려면 부모 슬하를 떠나 멀리 이역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아드님은 바다를 건너가는 곳에서 자라야 요절하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습니다.
소승의 말을 명심하십시오.”
정색을 하고 다짐을 두었다. 계옹이 놀라기도 하고 미심쩍기도 하여,
“스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소?”
물었더니 중이 계옹의 귀에다 대고,
“아까 맥을 짚을 적에 아드님의 손바닥에 손금이 없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계옹이 중을 보내고 급히 방으로 들어와 지적의 손바닥을 펴보았더니
과연 손금이 하나도 없었다.
계옹 내외가 중이 일러준 대로 천계 한 쌍을 잡아다가 고아 그 국물을 지적의 입에 흘려 넣자
이내 숨결이 고르게 변하고 싸늘하던 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러구러 지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계옹에게는 또 다른 걱정이 생겼으니
바로 중이 남기고 간 당부였다.
계옹이 지적의 일로 선뜻 작정을 하지 못해 망설일 때 마침 종문 사람 가운데 중국으로 가는 이가 있었다. 계옹 내외가 사나흘 밤잠을 설친 공론 끝에 중의 말을 좇기로 하고 지적을 종문 사람에게 딸려
중국으로 보냈다.
그렇게 떠난 지적은 중국 장안에서 사귄 사람의 도움으로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서너 해를 배우고,
뒤로 몇 해는 사해 문물이 집결하고 천학만교(千學萬敎)가 번창하던 청량산의 여러 사문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그러다 10여 년을 훌쩍 넘겨 스물여덟 청년의 나이로 돌아온 것이 경인년(630년) 가을,
본국에서 한재가 심해 대흉이 들던 바로 그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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