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24
장왕은 백파가 흥수를 찬하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인 또한 흥수의 재주와 학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그를 대궐로 불러들이고 새로 지은 유학당을 맡겨 왕자들에게
경서의 오묘함을 가르치도록 해두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대저 나라를 다스림에는 백성들이 모두 흔쾌한 마음으로 왕업을 보필하고
자신의 일처럼 국사에 참여하는 것이 중합니다.
그래야 병농(兵農)이 함께 창성해 군사를 일으킬 때도 도망가는 이가 없고,
조세를 거두어도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대왕의 치세에는 비록 백성들의 신망은 얻었으나
팔족들은 마음에 불만이 없지 않습니다.
단지 강주(强主)의 태산압란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따름이지요.
팔족이라고 특별히 우대하는 일도 없어야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바른 정사는 아닙니다.
흥수가 비팔성 출신의 왕좌지재라면 사택지적이란 젊은이는 팔족에서 난 재사(才士)입니다.”
사택씨(沙宅氏)라면 사비 갑족인 사씨의 한 갈래로, 백제에서는 고래로 문벌 높은 귀족 집안이었다.
그 가운데 누정(累亭)이란 이가 있어 경사 부근의 나지성에서 꼬리가 다섯 자나 되는
백제 닭 천계11)를 기르고 살았는데, 젊어서부터 배소(排簫:피리의 한 가지)를 잘 불어
천계의 울음소리를 내곤 했다.
봉황과 모습이 흡사한 천계는 백제에서만 사는 희귀한 야생조(野生鳥)여서
사람이 기를 수 없는 새였지만 누정은 배소를 불어 불러들인 천계를 1백여 마리나 키웠다.
이에 사람들은 누정을 ‘닭아비’라 불렀고, 나라에서 중국에 방물을 바칠 때 관리들이
천계를 구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닭아비 누정을 찾아오기 일쑤였다.
때로는 중국에서 온 사신이 백제의 봉황을 얻어가고자 직접 객부 관리들을 앞세우고
누정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신미년(611년)에 고구려 정벌을 모의하러 왔던 수나라 사신
석률(席律) 역시 누정의 집을 찾아와 천계 한 쌍을 얻어갔는데, 그때 석률이 누정을 일컬어,
“대인께서는 우리나라 춘추시대 때의 도인 축계옹(祝鷄翁)을 닮았습니다.
축계옹은 낙양 사람으로 시향(尸鄕:하남성)의 북산 기슭에 살며 1백여 년간 닭을 길렀는데,
천여 마리나 되는 닭에게 모두 이름을 붙여주었지요.
그가 닭을 부르면 이름을 불린 닭이 마치 사람처럼 알아듣고 달려오곤 했답니다.
축옹은 닭과 계란을 팔아 천만 냥에 달하는 큰돈을 벌었지만 갑자기 재물을 모두 버리고
오산(吳山)으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는데, 백학과 공작 수백 마리가 항상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고 합니다.”
하고 찬탄한 일이 있었다.
그 말이 나지성 일대에 알려져서 사람들은 이때부터
누정을 일컬어 닭아비 대신 계옹(鷄翁)이라 불렀다.
계옹 누정이 성왕조에 상좌평을 지낸 사택기루(沙宅己婁)의 손자이나
일평생 정치에 뜻을 두지 아니한 것은 그 인품이 워낙 고고한 때문이다.
문중 사람들이 계옹을 닭이나 기른다며 무시하고 힐난하면
그저 허허 웃을 뿐 별응대가 없었지만 누가 계옹의 조부를 알고
그 앞에서 칭찬이라도 하면 도리어 벌컥 역정을 내며,
“모시던 임금을 싸움터에서 죽게 만든 그깟 좌평이 무슨 대수고 자랑이야?
남의 신하질을 하자면 제대로 해야지, 나는 그럴 자신이 없어 벼슬을 살지 않을 뿐더러
할아비 이름도 부끄러이 여기는 사람일세.
그러니 내 면전에선 우리 집안 얘길랑 삼가주시게.”
하고 나무라곤 했다. 즉위 초에 장왕도 계옹의 얘기를 전해 듣고
나지성으로 사람을 보내 궁으로 청했더니 계옹이 몸 아픈 것을 핑계삼아 응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다시 사람을 보내려 하자 개보가 만류하며,
“그는 신선 같은 사람입니다. 신선 같은 사람은 신선같이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치도가 아닐는지요?
불러서 올 사람만 같으면 신이 벌써 손을 썼을 것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계옹이 젊어서는 자식이 없다가 본처를 여의고 새로 들인 처녀의 몸에서 나이 쉰을 넘겨
아들 하나를 보았는데, 그 아들을 낳던 날 천계 수백 마리가 마당에 날아들어
어찌나 시끄럽게 지저귀는지 이웃은 고사하고 관청에서까지 조사를 다 나왔을 정도였다.
그렇게 본 아들을 계옹이 ‘지저귀’라 이름을 지어 부르다가 글을 가르칠 나이가 되자
지적(智積)이란 정식 이름을 붙였다.
사택지적이 자랄수록 장난질도 심하고 부산스러웠지만 일변 신통한 구석도 많았다.
배소를 불고 천계를 부리는 것이야 계옹을 닮아 그렇다손 치더라도 일고여덟에
벌써 고서의 뜻을 깨친 것이나, 10여 세를 넘기며 역서에 통연하여 길흉을 꿰고
섭리와 변괴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은 범상한 자질로는 설명이 어려운 점들이었다.
지적이 열두 살 무렵에 하루는 천계두 쌍이 벼슬을 곧추세우고 서로 싸우다가
그중 한 마리가 깨어진 알을 낳자,
“오늘밤에 필경 산불이 날 것이니 나지산에 방사한 닭을 모두 불러들여야겠습니다.”
하고는 곧 배소를 불어 천계를 거두어들였는데,
과연 그날 밤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나지산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계옹이 지적의 말을 신기하게 여겨,
“네가 산불 날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니 지적이 대답하기를,
“천계 두 쌍이 다툴 적에 그 형세가 역서에서 말하는 간괘(艮卦)를 그리고, 깨어진 알의 조각은
영락없는 이괘(離卦)의 모습이었습니다.
간괘는 산이 거듭됨을 상징하니 나지산의 형상이요,
이괘는 우레와 벼락을 뜻하는 불의 형상입니다.
본래 간괘와 이괘가 거듭되는 것을 여괘(旅卦)라 하는데,
여괘란 산 위에 불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지산에 불이 날 것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계옹이 젊은 아내에게 말하기를,
“저 아이는 자네와 내가 만들고 낳았지만 우리 아이가 아닐세.
아마도 천계들이 하늘에서 신령스러운 성인의 씨를 물어다준 모양이야.”
하고는 나라의 이름난 학인과 도인을 스승으로 구하여 아이를 맡겼다.
그런데 지적이 어찌나 장난질이 심한지 맡기는 스승마다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고개를 쩔쩔 흔들며 아이를 되돌려 보내니 계옹이 지적을 볼 적마다,
“제발 좀 얌전히 지내거라.”
하고 타이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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