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27
성충이 백제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태 뒤다.
그는 인편에 백부 유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자 곧바로 짐을 꾸려 귀국선을 탔다.
아우들과 함께 백부의 장례를 치르고 관 묻을 땅이 없어 쩔쩔맬 때 도움을 준 이가 바로 흥수였다.
성충과는 선대의 교분으로 알고 지내던 흥수는 이 무렵 낭자곡성(낭성)의 성주로 있었는데,
유의 문상을 왔다가 성충의 살림이 궁한 것을 알고 장지를 마련해주었을 뿐 아니라
전답까지 따로 장만하여 성충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저 자신 이미 도도하고 식견 높은 선비로 좀체 남을 인정하거나 칭찬하는 법이 없던 흥수였지만
성충에 관해서만큼은 누구한테나,
“그는 이제까지 내가 본 사람 가운데 제일이다.
성충이 만일 30년만 먼저 났더라면 좌평 개보공은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없었을 것이며,
임금의 총애가 모조리 성충 한 사람에게만 이르렀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모두 개보공의 식견을 높여 말하지만 개보와 성충을 맞대어 비교하면
물고기와 용이며 참새와 봉황의 차이가 있다.”
하며 극찬하고 스스로도 성충의 앞에서만은 자세를 낮추니 성충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도
흥수의 말만 듣고 성충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다.
한번은 흥수의 벗인 임자(任子)가 낭자곡성에 놀러갔다가,
“성충이 그토록 대단한 인물이라면 자네와 성충을 비교하여 어떠한가?”
했더니 흥수가 얼굴이 벌개서,
“자네는 반딧불의 밝기와 태양의 밝기를 비교할 수 있는가?”
되묻고는,
“나 정도면 작금의 개보공이나 전지왕조의 여신(餘信:백제 최초의 상좌평)에 비유할 자질은 되겠지만
성충에 견줄 만한 이는 우리 백제의 고금에는 없네. 그는 가히 불세출의 영걸일세.”
하고 단언하였다.
임자가 경사에 돌아와 흥수의 말을 그 아버지에게 전하였는데,
임자의 아버지가 좌평직에 있던 사람이라 젊은 흥수의 말을 매우 시건방지게 여기고 개보를 만났을 때,
“흥수란 자가 임금의 면전에서도 잘난 체를 하여 주흥을 깨더니 요즘에는 상좌평과 자신을
곧잘 한입에 비교하고 다닌답니다.
게다가 전지왕 시절의 명재상 여신의 이름까지 읊어가며 거들먹거린다니
그야말로 분수를 모르는 고약한 놈이지요?”
하며 흉을 보았더니 개보가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껄껄 웃으며,
“흥수가 제 입으로 나와 자신을 비교하였다면 이는 내가 나이를 먹었다고 예우하는 것이오.
나로선 가히 영광이외다.”
하고서,
“흥수쯤이면 능히 그럴 만도 하지요.
모르긴 해도 지금 내 앉은 이 상좌평 자리는 언젠가는 흥수의 차지가 될 게 분명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성충을 만나본 사람들이 모두 흥수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성충이 당에서 공부한 선비라고 알려지자 백제의 유인(儒人)들과 학동을 가르치던 늙은이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성충의 학문을 시험하였는데,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범인(凡人)이라는 평은 그래도 후한 편이었고,
공맹의 가르침을 거꾸로 배웠다느니,
심지어 침을 뱉어가며 욕을 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래서 성충이 한때 문학당(文學堂)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려 했던 꿈은 말끔히 수포로 돌아갔다.
흥수는 이 말을 전해 듣자,
“이는 옆구리에 경서를 끼고 다니면서 어려운 것이나 물어보는 수준의 유인들이 성충이
이룬 학문의 도저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긴 불상사다.
물(物)과 이(理)를 논하고, 삼라만상의 본성(本性)을 헤아리며,
하나의 이치로써 만사를 꿰뚫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경지를 뉘라서 알아들을 수 있으랴.”
하고 탄식하였다.
백파는 성충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음하였다.
“그는 한(漢) 나라를 왕성하게 만든 장량(張良)이나 촉한의 승상 공명(孔明)에 견줄 만한 큰 인물이요,
가슴에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이 들었고 손바닥에는 칠종오신(七縱五申)이 있습니다.
만일 그를 찾아내어 마음과 뜻을 얻을 수만 있다면 솥발처럼 나뉜 삼한의 강 토는 반드시
대왕의 발아래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파의 확신에 찬 장담을 들으며 장왕은 성충이란 인물에 관해 말할 수 없이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 어디를 가야 성충을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노인이 자신도 성충의 사는 곳은 알지 못한다고 밝힌 뒤에,
“본시 경이로운 인물일수록 쉽게 얻는 법이 아니올시다.
성충은 두루미처럼 고고한 인물로 번잡한 것을 싫어하여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디에 살고 무엇을 하는지 미구 역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흥수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흥수라면 성충의 거처를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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