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22
“뉘신지요?”
사내는 사냥복 차림의 임금을 알아보지 못했다.
“방금 누가 이리로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지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내의 부러진 대답에 왕은 잠시 낙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지낸 지 얼마나 되는가?”
“저는 모친을 여의고 근 3년째 여묘살이를 하는 중입니다.”
“하면 혹 조불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였던가?”
“글쎄올시다……”
사내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름은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법력과 도력이 깊고 유불선 삼교에 달통한 나이 많은 노인이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혹 백파 도인을 말씀하시는지요?”
“백파 도인?”
“네. 방금 말씀하신 그런 분이라면 칠악에선 백파 도인밖에 없습니다.”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는가?”
장왕은 사내로부터 백파 도인이 사는 거처를 물어 단숨에 그곳을 찾아갔다.
가서 보니 길이 눈에 익었고, 그러구러 옛 기억을 더듬으니
도인이 사는 곳은 전날 조불을 따라다니며 여러 가지 기예를 익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왕은 도인이 산다는 초막 앞에서 기척을 냈다.
그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이 큰 키를 구부려 초막 안으로 들어서자
칠순쯤 돼 보이는 백수풍신의 낯선 노인 하나가 때 묻은 거적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태연하게 물었다.
“서동 대왕께서 이 깊은 산중에 홀로 어인 일이십니까?”
장왕의 존재를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왕이 신기하여,
“노인장께서는 어떻게 나를 알아보시오?”
했더니 노인이 웃으며,
“벼슬길에서 내쫓은 분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위덕 대왕 시절에 중국을 오가며 왕변나와 더불어 객부의 일을 맡아보았지요.
그러나 대왕께서 즉위하시자 전조의 중신들은 일제히 물러나라고 명하여 하는 수 없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니 그게 어언 서른 해도 더 된 일이던가요?”
하고서,
“세월 흐르는 것이 새삼 무상하지요.
그때는 한창 혈기방장한 동안의 청년이시더니 지금 뵈니 대왕께서도 많이 늙으셨습니다.”
하였다. 왕이 노인을 유심히 뜯어보다가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왕대신과 객부의 일을 보았다면 혹시 백실 공이 아니시오?”
하자 노인이 갑자기 파안대소하며,
“모르실 줄 알았더니 용케 기억을 하십니다.”
하고는,
“벼슬살이를 그만둔 후로 사람들은 한갓지게 사는 저를 일컬어 백파라고들 부릅니다.
대왕의 충신인 백기가 미구(微軀)에게는 질자뻘이지요.”
하며 가문과 이름이 바뀐 내력을 말하였다.
백씨라면 그 역시 팔성 출신의 빈틈없는 명가 사람이었다.
왕이 약간 미안한 기분이 들어,
“그때 물러난 신하들은 대개 무력한 노신들이었는데
어찌하여 젊은 나이로 물러나셨더란 말씀이오?”
했더니 노인이 여전히 웃음 띤 낯으로 임금을 빤히 바라보고서,
“제가 올해로 여든하고도 여섯 해를 더 살았으니 그때 나이가 이미 쉰을 넘겼습지요.”
왕이 듣기에 차마 믿어지지 않는 대답을 하고는,
“허허, 괘념치 마십시오.
그저 웃자고 한 소리지 해묵은 왕시의 일로 대왕께 따지자고 꺼낸 얘기가 아니올시다.”
하였다. 왕이 노인의 권유로 자리에 앉아서,
“좀 전에 지팡이를 짚고 이곳으로 급히 오신 사람이 혹 노인장이시오?”
하고 묻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요 며칠 사이 선정에 들어 이 초막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왕에게서 사정 얘기를 전해 듣고 불쑥 놀라운 말을 뱉었다.
“그렇다면 조불을 보신 게로군요.”
왕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토록 아끼던 서동 대왕께서 모처럼 칠악으로 납시었으니 장난기 많은 조불이 가만있을 턱이 있나.
아마 반가운 마음에 잠시 인사를 하러 왔었나 봅니다.”
“조불 스승님을 잘 아십니까?”
“알지요. 알다마다.
조불과는 그가 진말(陳末)에 호구산 도학의 문하를 기웃거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입니다.
조불이 신라 중 원광, 중국인 학승 지엄(智儼)과 같이 도학선사 밑에서 불법과 신술(神術)을
배울 적에 미구는 이미 금릉(남경)에서 나라의 숙위사신을 지냈는데,
미구가 절 문을 찾아가면 도학이 신을 벗고 마중을 나올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보니 조불이 칠악에 집을 짓고 사는데,
기승으로 제법 이름이 났습디다.
하긴 재주 하나는 신통한 사람이었지요. 삼장(三藏)과 서학(西學)에도 널리 통했지만
신술도 대단하고 유술(儒術)에도 꽤나 일가견이 있었으니까요.”
노인의 대답에 장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노인이 그런 왕에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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