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21
왕은 의자를 태자로 삼은 뒤 부여풍을 담로지인 왜국에 보냄으로써 태자 책봉과 관련해
신하들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을 정리하였다.
의자를 태자로 세우고 나서 장왕은 나라에 달포간이나 방을 써 붙이고 선비와 무장을 뽑는
대회를 열었다.
선비 발탁은 개보에게 맡기고 무장을 뽑는 대회는 임금이 친견했는데,
선비든 장수든 나이 먹은 사람은 뽑지 않고 주로 20세 전후의 젊은 인재들을 선발하였다.
이에 개보가 뽑은 사람은 상영(常永)과 자견(自堅)이었고,
임금이 직접 뽑은 장수는 의직(義直)과 정복(正福), 정중(正仲) 등이었다.
처음 대회를 열 때 장왕이 개보에게 말하기를,
“팔성 출신은 훗날 벼슬과 권세를 승계할 것이므로 되도록 선에 넣지 말라.”
하고 당부하였는데 장왕 자신이 제일 후한 점수를 주어 선발한 의직이 팔성 귀족 출신이었다.
왕이 과장(科場)에 나온 의직을 보는 순간 우뚝한 기상과 날렵한 몸놀림에 반하여,
“저 아이가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시립한 이가 답하기를,
“위사좌평 연주복(燕朱福)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왕이 팔성 좌평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상을 찡그리며,
“하필 좌평의 아들이냐.”
하고 혀를 찬 뒤에,
“선에서 빼라.”
하였는데, 그 뒤로 10여 과목의 무예 시험을 볼 때마다 의직이 선두를 차지하니 왕이 시종,
“마치 젊은 날 해수의 무예를 보는 듯하구나.”
하며 탄복하다가 급기야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지,
“자고로 신하와 연장은 쓰기 나름이요 팔족이라고 모다 불충한 것은 아니니
이는 부리는 사람의 할 탓이다.
해수와 백기도 비록 출신은 팔족이나 평생 나의 수족으로 견마지로를 다하지 않았던가.”
하고는 당초의 마음을 바꾸고 말았다.
이렇게 선발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왕은 그해 여름, 태자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칠악(칠갑산)의 생초원(生草原)으로 사냥을 나갔다.
나이가 어언 60에 가까워 한창때와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선화비와 변함없는
정분을 나눌 만큼 기력이 왕성한 왕이었다.
그가 금표(禁表) 구역인 초원의 서쪽 숲에서 집채만한 곰 한 마리를 발견한 것은
사냥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왕은 재빨리 곁에 있던 의자를 돌아보았다.
“숲의 위쪽에는 계곡이 있고 아랫녘에는 깊은 웅덩이가 있다. 어느 쪽을 맡겠느냐?”
“계곡은 길이 험하니 소자가 그쪽을 맡겠나이다.”
“좋다, 어서 서둘러라!”
왕은 의자가 탄 말이 쏜살같이 사라지고 나자 자신도 활을 든 채 반대편으로 말을 몰았다.
본래 사냥에서만은 누구한테도 양보가 없는 왕이었지만 이번만은 의자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한
사냥이었고, 따라서 이미 곰을 발견한 때부터 아들에게 사냥감을 양보한 터였다.
왕은 숲에 접어들자 말고삐를 잡아채고 별로 급할 것 없는 걸음으로 천천히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얼마쯤 왔을까.
굽은 길모퉁이를 막 돌아섰을 때, 갑자기 저만치에서 시커먼 물체 하나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필경 짐승은 아니고 사람인 듯한데, 흑색 방포에 지팡이를 짚고 백발을 휘날리며 비호처럼
달아나는 뒷모습이 지난날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 조불과 너무도 흡사해 보였다.
‘저 커다란 두상이며 검은색 두루마기는 영락없는 조불 선생이다! 아아, 그가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칠악에 들어올 때부터 줄곧 옛 추억에 젖어 있던 왕은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스승의 그림자를 허겁지겁 뒤쫓았다.
하지만 한번 사라진 물체는 좀체 다시 뵈지 않았고, 왕은 한동안 계곡의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내가 환영을 보았더란 말인가?’
난감한 기분에 사로잡힌 그가 길도 아닌 어느 외진 곳에서 막 다리를 쉬려 할 때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별안간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곡소리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왕이 수상히 여겨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가니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스물예닐곱 가량의 사내가
무덤에 상을 차려놓고 나지막한 소리로 곡을 하고 있었다.
곡하는 사이에 어머니, 어머니, 하고 애타게 부르는 점으로 미뤄 아마도 그는 모친을 여의고
상중에 있는 듯하였다.
왕은 사내의 뒷전에서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곡소리가 잦아들더니 사내는 차려놓은 상을 거두어 무덤 옆에 볏짚으로 얼기설기 지은
여막으로 향했다.
왕이 뒤따라가서 인기척을 내자 사내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왕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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