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19
이때 임금과 선화비 사이에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다.
장자는 의자요, 차자는 풍(扶餘豊)이며, 막내아들의 이름은 경(扶餘輕)이었다.
의자와 부여풍 사이에 고명딸인 보(扶餘寶)가 있었으며,
후궁 몸에서 난 자식 가운데는 교기(扶餘翹岐)의 신망이 비교적 두터운 편이었다.
이들 가운데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인물은 장자인 의자와 둘째 풍이었다.
의자와 풍은 여러 면에서 좋은 대조를 이뤘다.
우선 의자는 인품이 후덕하고 성정이 관후하며 담력과 결단성이 있었고,
풍은 지혜가 뛰어나고 학식이 높았으며 판단이 빠르고 사람을 대할 때 항상 겸손했다.
의자가 영웅의 풍모를 갖춘 왕자라면 풍은 고고한 선비에 가까웠다.
의자는 범사에 초연하여 좀체 화를 내 는 일이 없었지만
가끔은 그 때문에 뜻밖의 낭패를 보기도 했고,
풍은 하찮은 일까지 꼼꼼하게 챙겨 작은 일에도 실수가 없었다.
의자는 말술을 마시고 흥이 나면 춤을 추다가 아무 데서나 코를 골며 잤는데
풍은 시종 넘치지 않는 잔술을 자로 잰 듯 따라 마시고 어떤 경우에도 취하는 법이 없었다.
두 사람이 사냥을 나가도 의자는 큰 짐승만 쫓아다니느라 허탕을 치는 일이 잦았지만
풍은 큰 짐승을 잡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경인년 백제에 한재가 들었을 때 달솔 벼슬을 지내던 해구루(解構累)란 자가 의자를 찾아왔다.
그는 국답을 관리하던 해치(解馳)의 아들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문책이 따를 것을 염려하던 중이었다.
“한재와 홍수는 대개 하늘이 주관하시는 천계의 일입니다.
하늘이 하신 천계의 일로 어찌 사람을 문책하오리까?
임금께서 환궁하시면 부디 잘 말씀드려 저의 아비가 과중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힘써주십시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해구루로부터 죄를 가볍게 해달라는 청탁을 받자 의자는 대뜸 호탕하게 웃었다.
“자네는 별걱정을 다 하는군그래. 적간을 해봐서 벌을 받을 만하면 받고 아니면 그만이지
미리부터 그처럼 전전긍긍할 게 무언가?
대왕께서는 현명하시므로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을 터이니 과히 염려하지 말게나.”
이 말을 해구루는 의자가 힘써보겠다는 언질로 해석했다.
그러나 의자는 그 일을 곧 잊어버렸고, 웅진으로부터 환궁한 장왕은
천재에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한 해치의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
이 일로 의자는 대성 팔족의 하나인 해씨 족친들과 등을 지고 말았다.
팔성 족장들이 태자 책봉 문제를 거론할 때 마지막까지 남은 이가 의자와 풍이었다.
“의자는 유가의 가르침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왕실과 부여씨들 사이에 신망이 높소이다.
해동증자라는 별칭이 달리 있겠소?
그런 자가 후위를 계승한다면 장차 팔성의 권위는 흔적도 없이 소멸할 거외다.”
“그렇습니다. 의자의 안중에는 오로지 부여씨밖에 없습니다.
그러잖아도 금왕 즉위 초에 외지의 부여씨들이 대거 귀국하여 나라의 요직을 독식한 연고로
우리가 설 땅을 죄 잃어버렸는데,
만일 의자가 임금이 된다면 그보다 더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가 비록 임금의 원자라고는 하나 지금의 당주만 하더라도 차자가 보위를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매사에 겸손하고 우리에게 우호적인 차자 풍을 태자로 세우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의자는 자신이 태자가 될 것을 당연시 여기지만 풍은 그렇지 않소.
만일 풍이 태자가 되면 그는 우리의 은공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오.”
팔족 회의에 참여한 족장들은 이구동성 부여풍을 옹립했다.
이들은 적실 왕자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함에 싸서 넣고 호암사 정사암에 두었다가
며칠 뒤 입궐하여 임금에게 개봉할 것을 권했다.
“신 등이 왕자 세 분의 존함을 적어 하늘의 뜻을 물었사오니
대왕께서 친히 확인하여보사이다.”
장왕은 팔성들이 들고 온 봉함을 열어 종이를 펼쳤다.
그곳에는 자신의 세 아들 가운데 부여풍의 이름 위에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장왕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알았으니 그만 물러들 가라.”
가타부타 대답 없이 중신들을 물리쳤다.
병관좌평 해수를 위시한 팔성 중신들은 자신들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될 것을 기대한 채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다. 사비에서는 한 가지 큰 소동이 일어났다.
노장 굴안과 망지가 경사의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가 사소한 시비 끝에 사람을 죽였는데,
하필이면 죽은 이가 사비 갑족인 사씨 문중의 덕미(德味)라는 젊은이였다.
죽은 덕미가 그 자신도 덕솔 벼슬을 살며 내경부의 일을 보던 관리였지만
형제 다섯이 모두 고관이었고, 특히 맏형인 기미(岐味)는 젊었을 때부터 부여헌을 따라
여러 차례 중국을 다녀온 공로로 벼슬이 달솔에 올라 있었다.
더구나 중좌평인 사숙정(沙肅征)과는 숙질간이기도 했다.
덕미의 횡사로 사씨 문중은 발칵 뒤집혔다.
이들은 나뭇가지에 걸린 연실처럼 얽히고설킨 인맥으로 법부와 사구부를 움직여
굴안과 망지의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어전을 찾아가서도 살인자를
극형으로 다스려줄 것을 극렬히 주청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굴안과 망지는 뉘우치거나 근신하기는커녕
이번에는 휘하의 군사들과 집안 종들을 풀어 사씨 문중의 사당을 짓밟고,
사비원 방목장에 노니는 가축들까지 죄다 죽여 버리고 말았다.
이 일은 사씨 문중뿐 아니라 팔족 전체의 공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굴안과 망지의 일로 한창 세상이 시끄럽던 어느 날 밤,
장왕은 의자와 풍을 가만히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너희는 굴안과 망지의 일을 들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 두 장수는 만리 외지로부터 짐의 왕업을 보필하기 위해 귀국한 왕실 종친으로
지난 30여 년간 살벌한 전장을 누비며 견마지로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 백제가 강국 소리를 듣고, 나라 형편이 이만큼 풍요로워진 것도
바로 그들의 노고 덕택이다.”
왕은 다소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한 국법이다.
열 가지 공덕이 한 가지 허물을 덮지 못하고,
10년 노고가 한순간의 실수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더냐?
지금 저들의 소행이 만 사람의 입초시에 오르내리며 팔족의 공분을 사고 있으니
이 역시 나로서는 무시하기 어렵구나.
사사로움으로 말하면 능히 용서할 일이나 그러자니 자칫 국법과 치도가 훼손될까 심히 두렵도다.”
왕은 괴로운 듯 크게 한숨을 쉬고 두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희라면 과연 이 일을 어떻게 처결하겠느냐? 어디 솔직한 생각들을 말해보아라.”
두 왕자는 잠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둘째 풍이었다.
“두 장수의 소행은 엄벌에 처하심이 마땅합니다.
비록 두 장수의 공이 크다고는 하지만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인 허물을 덮을 수 있겠나이까.
자고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사사로움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벌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곧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공은 공이고 죄는 죕니다. 공을 세운 자는 상으로 다스리고 죄는 벌로 다스린다면
국법이 무너지고 치도가 훼손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풍은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바라보았다.
“원자의 뜻도 그러한가?”
그러자 의자는 무덤덤한 낯으로 말했다.
“소자는 좀 다릅니다.”
“그래?”
“중요한 것은 임금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국법과 사사로움을 임금만큼 정확히 저울질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이미 마음으로 두 장수를 용납하셨다면 실제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임금이 이미 용서하였는데 감히 누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더군다나 두 장수는 왕실의 종친입니다.
치도도 중하고 국법도 소홀히 할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왕실의 위엄입니다.
왕실이 있고 나서야 사직도 나라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만일 소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겠나이다.”
“하면 극형을 주장하는 팔족들의 성화는 어찌한단 말이냐?”
왕이 다시 묻자 의자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바마마께서 피해를 입은 사씨 문중의 사람들을 불러 친히 위로하시고
약간의 재물로 사의를 표한다면 일은 자연히 무마가 될 줄 압니다.
그래도 성화가 그치지 않으면 제왕의 권위로 다스리면 됩니다.”
왕은 내심 의자의 당찬 태도에 크게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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