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20
이튿날 장왕은 유일한 비팔성 출신의 좌평 개보를 불렀다.
“상좌평은 누구를 태자로 삼았으면 좋겠는가?”
임금의 하문에 개보가 촌각도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예로부터 보위는 적통 장자로 흘러가는 것이 상도입니다.
장자에게 보위를 물려받지 못할 큰 허물이 있다면 모를까,
마땅히 원자로써 태자를 삼으심이 옳은 줄 아룁니다.”
“원자와 풍을 비교하면 어떠한가?”
“대왕께서 이미 잘 알고 계신데 신이 무슨 말을 더 보태오리까.
대왕께서 보시는 그대로올시다.”
개보는 다 아는 일을 무엇 하러 물어보느냐는 투로 빙긋 웃음을 지었다.
“삼한을 하나로 아울렀거나, 하다못해 남역이라도 평정했다면 풍도 임금감으로 손색이 없다.
하나 나의 세대에 동적을 멸할지는 더 두고 보아야겠고, 북방의 일은 여전히 불안하며,
안으로는 팔족의 세도가 유사 이래 늘 임금을 노리고 있다.
백제왕은 무엇보다 팔족의 발호를 완벽히 제압하는 인물이어야 하고,
남역 평정도 천하 통일도 그로부터 가능한 법인데,
풍과 같이 외길만 보는 안목으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의자처럼 품이 넉넉하고 기백이 씩씩하여 팔족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인물이 제격이다.”
왕은 개보에게 두 아들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간단히 털어놓고 나서 곧 만조의 백관들을 소집했다.
그는 의자의 이름 위에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을 준비한 뒤 앞줄에 앉은 대신들에게
이를 펴 보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구려.
그대들의 말을 듣고 나 역시 정사암에서 이를 확인해보았더니
이번엔 원자의 이름에 붉은 표시가 나왔소.
사람의 마음도 불과 며칠 상간에 이처럼 오락가락하지는 않을 터인데
하늘의 뜻이 조변석개하다니 실로 어이가 없소.
도대체 정사암의 영험은 믿을 만한 것이오?”
대신들은 태자를 누구로 세우느냐는 문제보다 임금이 정사암 자체를 불신하고 나오는 데 더 놀랐다.
정사암이 불신을 당한다는 것은 그를 통해 정사에 참여해온 귀족 사회 전체가 붕괴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럴 리가 있겠나이까? 본래 정사암에서 천명을 구하는 일은 일사부재리가 원칙이옵고
재리로는 행하지 않는 법이올시다.”
“전고에 일사재리가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없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일사재리가 합당한지 부당한지 경들이 어찌 아는가?”
왕이 따지고 들자 말을 뱉은 대신은 얼굴을 붉혔다.
왕은 약간 불쾌한 낯으로 중신들을 둘러보았다.
“과인도 정사암의 영험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일개 재상도 아닌 나라의 태자를 정하는 최초의 중대사에
임금이 어찌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묻지 않으리.
과인은 정사암의 영험을 믿고 정성을 다해 뜻을 빌었는데 결과가 다르니
아마도 과인의 정성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내 경들과 더불어 다시금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물어볼 터인즉
태자 책봉은 그 결과를 보아 결정하는 것이 옳겠다.”
대신들은 임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원자를 태자로 삼으려는 왕의 뜻은 이미 분명해졌고 도마에 오른 것은 정사암의 영험이었다.
그날 어전 회의가 끝나자 팔족들은 별도로 모임을 열고 침을 튀겨가며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한번 결심한 바는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임금의 성정을 감안할 때 성지를 따르는 것이
여러 모로 이롭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길일을 택해 스스로 목욕재계하고 대신들을 모두 거느린 채 호암사를 찾아간 왕은
왕자들 이름을 적은 금빛 함을 봉해 정사암 바위에 올려두고 하늘에 고한 뒤
호위장 목기루를 불러 전내부의 군사들로 바위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고 나자 왕은 팔족 대신들에게 물었다.
“이제 함을 가져와 열어봐도 되겠는가?”
팔족 대신들은 눈앞이 캄캄했다.
전내부 군사들이 두 눈을 시뻘겋게 부릅뜨고 주야장천 바위를 지키니
자칫하면 세상에 알려진 정사암의 영험이 허무맹랑한 것으로 전락할 공산이 컸다.
궁지에 몰린 대신들은 병관좌평 해수를 내세워 임금과 타협하고 의자로 하여금
태자 책봉을 서두르게 하니 이때가 임진년(632년) 정월, 장왕 재위 33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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