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18
사비의 호암사(虎巖寺)는 백제인들에게 성지(聖地)로 통하던 곳인데,
절 옆 바위에 선명한 호랑이 발자국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 호암사 바위를 정사암(政事巖)이라고 칭한 것은 나라의 재상을 선임할 때
물망에 오른 서너 명의 이름을 함봉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뒤 개봉하여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사람으로 재상을 삼은 데 연유한다.
이를테면 호암사의 정사암은 신라의 화백 회의가 열리던 네 군데 영지와 같은 맥락이다.
고래로 정사암에 모여 국사를 논하던 백제의 귀족은 전통적인 여덟 성씨의 대성 팔족(大姓八族)
족장들로, 사(沙)씨, 연(燕)씨, 진(眞)씨, 해(解)씨, 목(木)씨, 국(國)씨, 백(룰:白)씨, 협씨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해씨, 진씨, 목씨 등은 한성(서울) 도읍기 이래 왕비를 배출하거나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던 가문들이고, 사씨, 연씨, 백씨 등은 백강(금강) 유역을 기반으로 둔 신흥 귀족들로
웅진 천도 이후에 두각을 나타낸 세력들이다.
그 뒤 다시 성왕조의 사비 천도를 지지한 대표적인 가문으로 사씨와 목씨를 들 수 있는데,
특히 사씨는 사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팔족 가운데 가장 맹렬히 천도를 주창하였다.
그러므로 성왕 이후 사씨들이 백제 갑족(甲族)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들 대성 팔족은 호암사의 정사암 회의를 통해 국사를 결정하고 6명의 좌평직을
거의 독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왕실을 견제하고 후왕을 결정하는 데까지 막대한 힘을 미치므로 제아무리 임금일지언정
이들의 의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당장 장왕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마나 캐어 팔던 자신을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무렵 백성들 사이에 불교와 유교가 급격히 전파되면서 부쩍 위축감을 느낀 팔성 족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혈혈단신인 부여장을 임금으로 옹립했던 것인데,
허수아비로 세워 마음껏 부려먹으려 했던 부여장이 워낙 영특하고 당찬 인물이어서
그를 옹립했던 족장들은 시초에 저희끼리 만나면 범의 새끼를 궁성에 잘못 들여놓았다고
가슴을 치곤했다.
한편 장왕은 장왕 대로 국정이 더 이상 팔족의 손아귀에서 함부로 놀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줄곧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에 골몰했다.
즉위 초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노신들을 몰아낸 것이나,
비팔성(非八姓) 출신인 젊은 개보(愷普)를 일거에 좌평으로 발탁한 점,
백제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왕실 족친인 부여씨들을 귀국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한 점 등이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팔성 귀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지냈다.
‘멀리 두지도, 그렇다고 가까이 하지도 않는 것(不可遠 不可親)’이 대성 팔족을 상대하는
장왕의 근본 지침이었던 셈이다.
그러면서 장왕은 유교와 불교의 이념을 장려하여 왕권의 기반을 꾸준히 넓혀나갔다.
관료의 자제들에게 유가의 경서를 읽도록 권장하고,
민간에는 불교의 미륵 정신과 왕즉불(王則佛) 사상을 확립해나갔으며,
크고 화려한 대찰을 지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귀족들로선 당연히 불만이 심했지만 동성 대왕이나 무령 대왕에 견주어
조금도 뒤지지 않을 장왕의 눈부신 업적과 위엄에 눌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흘러온 세월이 30여 년이었다.
뜻밖의 가뭄으로 잠시 곤란을 겪기는 했지만 백제의 국력은 금방 되살아났다.
장왕은 그간 소홀히 했던 내치(內治)에 힘을 쏟아 국답을 정리하고 벽골군(碧骨郡:김제)에
거대한 제방을 수리해 한재에 대비한 용수(用水)를 확보했다.
살년이 들자 기다렸다는 듯 임금의 내정 소홀을 비난하고 나섰던 팔족 세력들은
이듬해 곧바로 풍년이 들어 형편이 좋아지니 홀연 무참하여 입을 다물었고,
장왕은 추수가 끝난 뒤에 보란 듯이 당에 조공사를 파견하였는데,
공물을 실은 짐바리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즈음의 백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확실히 부국과 강국의 면모를 두루 갖추어가고 있었다.
5부 5항으로 정비된 왕도의 행정 조직은 직무를 수행함에 빈틈이 없었고,
내관 12부와 외관 10부의 기강도 한결같았다.
나라의 법강과 풍기가 바로잡히니 군율은 절로 칼날처럼 서고,
군사들의 사기 또한 병영마다 하늘을 찌를 태세였다.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는 이가 없었으며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호시절을 말했다.
백제는 동성, 무령조에 버금갈 태평성세로 접어들었을 뿐더러 삼국 가운데
가장 부강하고 살기 좋은 나라로 발전하였다.
장왕이 보위에 오르기 직전과 비교하면 가히 천양지차가 아닐 수 없었다.
재위 30여 년 만에 이처럼 눈부신 치적을 일궈낸 장왕은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 나섰다. 즉위 초부터 팔족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꿈꾸던 장왕이었다.
그는 나라가 살년의 고통에서 헤어나자마자 공덕부와 사공부에 명하여
방치된 왕흥사(王興寺) 공역을 주도했다.
왕흥사는 장왕의 아버지 법왕이 보위에 오른 직후 왕경의 부산(浮山:부소산) 아래
백강(白江:백마강)가에 창건한 국왕사찰(國王寺刹)이었는데,
착공한 지 서너 달 만에 법왕이 급사하여 그 후로는 닦다가 중단한 절터만 오래도록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물론 절 이름에 불만을 품은 팔족들이 퍼뜨린 말이겠지만,
법왕이 죽고 한동안은 임금의 급서가 부산의 맥을 끊은 왕흥사 건립과 유관하다는 소문이
꽤나 그럴싸하게 나돌기도 했다.
신묘년(631년)에 임금이 왕명으로 왕흥사 공역을 재개하자 팔족들은 일제히 표문을 올려
왕의 안위를 염려하고 나섰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권위가 위축되는 것을 막아보려는 안간힘이었다.
장왕인들 이를 모를 턱이 없었다.
그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흥사 공역을 강행하였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듬해인 임진년(632년) 정월에는 백관들이 모두 모인 신년 하례식에서
태자 책봉 문제를 거론하고 나왔다.
그동안 백제에서는 금왕 재위 중에 태자를 책봉한 전례가 없었다.
후왕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정사암 회의를 통한 팔족의 몫이었다.
귀족들은 전통과 관례를 나열하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부여장이 아니었다.
“유비무환이라 했다. 국사의 장래를 미리 정하여두는 것이 어찌 그릇된 일인가?
그대들에게 반역할 뜻이 없다면 어차피 후왕은 나의 자식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요,
기왕 그럴 바엔 과인이 살았을 때 태자를 세우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세상에서 제 자식을 부모만큼 아는 사람이 또 있던가?
더구나 태자가 있어 정사를 보좌한다면 지난번과 같이 내정에 소홀하여
겪는 곤란도 미리 막을 수 있고, 태자로서도 국정에 참여해 훗날을 준비할 수 있으며,
나중에 그대들이 정사암에 모여 시일에 쫓겨 가면서 임금을 세워야 하는
수고로움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간 본조에서 태자를 책봉한 선례가 없었던 점은 슬퍼할 일이지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릇된 선례가 있었다면 마땅히 혁파하고 개선하는 것 또한 종사에 대한 과인의 책무가 아니던가?”
장왕은 빈틈없는 논리로 중신들의 반발을 일축했다.
이미 팔족의 권위 따위는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왕이었다.
임금의 위엄에 밀린 팔족 출신의 대신들은 조정에서 물러나자
끼리끼리 모여 차선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태자를 세워야 한다면 왕자 가운데 자신들이 손쉽게 다룰 만한 사람을 골라
태자로 옹립하자는 것이 팔족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1장 호각세(互角勢) 20 (0) | 2014.10.01 |
---|---|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9 (0) | 2014.10.01 |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7 (0) | 2014.10.01 |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6 (0) | 2014.10.01 |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5 (0) | 2014.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