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 새인생(8)
(1827)새인생-15
발리에서 5박6일간의 휴가를 마친 조철봉은 베이징에서 일박만 하고 나서 서울로 돌아왔다.
회사일이 밀렸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국정원 정보실장 이강준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도착한 날 저녁에 조철봉은 테헤란로에 위치한 룸살롱 미도에서 이강준과 제1차장 서한호와
셋이 마주 앉았다.
그들이 룸살롱으로 약속 장소를 정한 것은 조철봉의 분위기를 맞추려는 것이었다.
미도는 방이 여섯 개 밖에 없는 작은 룸살롱이었지만 특급이다.
뜨내기 손님은 아예 받지를 않고 예약 손님만 받는데 그것도 룸 3개만 차면 더 이상은 사절했다.
서비스가 소홀해진다는 이유였다.
사장 백인주는 40대 후반으로 20여년간 이 계통에서 일한 베테랑이다.
햇수만 오래되었다고 다 베테랑이 아니다.
백인주는 서울 바닥에서 제일가던 요정 국화암에서 대마담 오현주의 수양딸이 되어
10년을 수업하고 나서 마담이 되었다가 미도를 차린 것이다.
제대로 공부한 화류계의 대모였으므로 서비스에 빈틈이 없다.
허허실실,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보이면서도 여유가 있다.
손님들은 미도에 오면 긴장을 풀고 즐기게 되는 것이다.
천하의 조철봉도 이곳에는 딱 두 번 밖에 오지 못했다.
한 번은 손님으로 갔고 두 번째는 직접 예약을 했는데 두 번 다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미도는 그냥 실없이 놀러 가기에는 멋쩍은 곳이다.
손님 대부분이 고위급 정치인, 관료, 대기업 총수들인 것이 조철봉을 위축시키기도 했다.
가끔 떼돈을 번 벤처기업 사장이나 부동산 재벌을 손님으로 받지만 눈치를 보면
썩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격을 따지는 곳이었고 돈 자랑하다가는 망신당하기 딱 알맞았다.
미도는 저녁 식사부터 제공해주는 터라 그들은 먼저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전주 한정식상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상에는 찬이 29가지나 있었고 찌개가 셋,
국이 둘이었는데 어느 한 가지도 버리기 아까울 만큼 맛이 있었다.
젓갈도 창란젓, 석화젓, 갈치속젓, 명란젓, 오징어젓, 밴댕이젓까지 여섯 개나 있었는데
삼합 옆의 새우젓까지 쳐서 젓갈류를 반찬 한 가지로 계산한 나머지 밑반찬이 28개인 것이다.
마담 둘의 시중을 받으며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을 때 금방 상이 치워지면서
술상으로 바뀌었다.
소리 없이, 능숙하게 작업이 되어서 숭늉 그릇을 내려놓았을 때 술좌석이 되었다.
국산 양주와 맥주, 거기에다 마른안주가 세 접시다.
그때 아가씨 셋을 데리고 마담이 들어섰다.
“그럼 아가씨들을 앉히겠습니다.”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미리 준비한 파트너들을 앉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숨이 막힐 정도의 미인들이었다.
조철봉은 미인을 볼 때마다 조물주의 능력에 감탄한다.
지금까지 수백, 수천 명의 미인을 만났지만 모두 다르다.
모두 다른 모습의 미인인 것이다.
그때마다 조철봉의 기준이 바뀌어졌다.
지금도 그렇다.
옆에 앉은 짧은 머리의 아가씨는 둥근 얼굴형에 쌍꺼풀도 없는 가늘고 긴 눈을 가졌는데
턱의 선을 보는 순간 조철봉은 목이 메었다.
그때 1차장 서한호가 말했다.
“지난번에 리베이트 보내주신 것, 도로 가져가세요.”
불쑥 말한 서한호가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빙긋 웃었다.
“그래야 저쪽이 믿을 것 아닙니까?”
조철봉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다시 서한호가 말을 이었다.
“이번 사업은 아주 큽니다. 저희들도 기대가 크고요.”
사업이란 장선옥의 전향인 것이다.
(1828)새인생-16
한국 정보기관에서는 장선옥의 전향이 대단한 사건일 것이었다.
서한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의 시선이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로 옮겨졌다.
아가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맑은 눈이었다.
요즘은 서클렌즈가 유행이라 가끔 눈이 검은 동자로만 채워진 여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가씨의 진갈색 눈동자와 흰창의 배열은 적당했고 쌍꺼풀이 없는 눈이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한미선입니다.”
이름을 밝힌 아가씨가 입술 끝을 올리면서 웃었다.
자연스럽다.
위축되거나 너무 밝아도 불편해지는 법이다.
“좋구나.”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한 조철봉이 숨을 들이켰다.
이미 장선옥은 머리에서 깨끗하게 지워졌다.
지금은 오직 눈앞에 있는 한미선 뿐이다.
“너, 이차 되니?”
불쑥 조철봉이 물은 순간 앞쪽이 조용해졌다.
서한호와 이강준이 제각기 아가씨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이쪽에 시선을 주었다.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될 겁니다.”
이강준이 먼저 대답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하고 이강준이 확인을 받으려는 듯 정색한 얼굴로 한미선을 보았다.
그때 한미선이 대답했다.
“아뇨, 죄송합니다.”
“그럼 왜 나왔어?”
금방 되물은 이강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오늘은 조철봉의 날인 것이다.
장선옥의 전향에 대한 축하 겸 자금 지원,
그리고 조철봉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모처럼 미도에 온 것이다.
“저기, 전 이차 나간 적이….”
“잠깐”
서한호는 입맛만 다셨고 한미선의 말을 이강준이 가로막았다.
눈을 치켜뜬 이강준이 한미선을 노려보았다.
“이차 한 번도 안받았단 말이지?”
“네.”
“확인해 볼 거야.”
“네.”
그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아, 됐습니다. 그냥 농담한 건데요. 왜 이러십니까?”
“아뇨.”
머리를 저은 서한호가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가 여기로 오지 않았습니다.
모처럼 조 사장님 접대한다고 여길 잡았는데 이런 실례가.”
“실례라니요? 그런 말씀 거북합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이강준이 방을 나갔으므로 방안 분위기가 더 험악해졌다.
한미선은 물론이고 나머지 두 아가씨도 얼굴을 굳힌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이강준은 주인을 만나러 나갔을 것이다.
“장선옥은 거물입니다.”
방안의 무거운 정적을 서한호가 깨뜨렸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서한호는 말을 이었다.
“조 사장님이 알고 계신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러고는 잔을 들고 건배하자는 시늉을 했다.
한모금 술을 삼킨 서한호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장선옥의 위장 전향까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쪽 고위층의 메시지가 장선옥을 통해 전달될 가능성도 있거든요.”
낮고 차분한 서한호의 말이 끝난 순간 조철봉의 온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이 인간들은 생각하는 범위가 깊고도 넓다.
나보다도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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