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 새인생(7)
(1825)새인생-13
장선옥이 전향하겠다고 한 말을 당장에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을 꺼낸 것만 해도 조철봉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몸이 서로 익숙해지고 친근감이 쌓이게 되면 허점도 드러나면서 때로는 도움도 바라게 된다. 조철봉은 점진적인 이런 과정을 통해 장선옥과의 유대를 굳히려고 했던 것이다. 이쪽에서 장선옥이 몸담고 있는 체제로의 전향가능성은 조철봉 스스로 생각해도 전무했다. 조철봉처럼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허점을 파고들어 사기를 치고 치부를 해서 사업체를 늘려왔던 인간에게 북한체제는 죽었다 깨어나도 맞지 않는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장선옥이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왜? 믿기지 않아?”
“그래.”
정색한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렇게 될 줄 예상 못했어.”
“난 예상하고 있었어.”
머리를 돌린 장선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를 보았다. 옆모습이 그림처럼 고왔으므로 조철봉은 침을 삼켰다. 장선옥이 말을 이었다.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사회에서 살고 싶었어.”
“…….”
“그 대가를 내 손에 쥐고 싶었단 말야. 내가 일한 대가를 내 손에.”
장선옥이 손바닥을 폈다가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그 대가로 내 집을, 차를, 그리고 비행기 일등석 티켓을 사는 거야.”
“그럼 앞으로 리베이트는 따로 계좌를 만들어 넣어줄까?”
불쑥 조철봉이 묻자 장선옥이 3초쯤 시선만 주더니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표정이 단호해져 있었다.
“그래, 넣어줘.”
“옥이만 눈감아주면 그건 앉아서 떡 먹기지.”
“누워서 먹는 게 아니고?”
“누워서 먹으면 체해.”
다시 얼굴을 펴고 웃은 장선옥이 조철봉을 보았다.
“돌아가서 둘이 비밀 동거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보고할게.”
“비밀동거?”
“양측에 비밀로 하고 만나는 것으로.”
“그게 낫겠군.”
“자기가 우리 둘의 아지트를 만들어 놔.”
“아지트라, 만들지.”
“거기서 가끔 만나는 거야.”
“호텔 방에서 만나는 것보다 낫지.”
“어느 정도 내 몫이 모이면….”
장선옥이 조철봉을 보았는데 시선 끝이 길었다. 조금 망설이던 장선옥이 말했다.
“떠날 거야.”
“어디로?”
“프랑스.”
“거긴 왜?”
그러자 장선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월과 손가방을 챙긴 장선옥이 조철봉을 보았다.
“배고파, 방에 들어가서 뭘 먹자.”
“좋지.”
따라 일어선 조철봉의 팔을 낀 장선옥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때까지 우린 동업자 관계야.”
“그렇지.”
“이번에 떼어낸 리베이트는 따로 모아 놓은 거야?”
“당연하지.”
바로 대답은 했지만 조철봉의 가슴은 왠지 허전해졌다. 리베이트는 모두 정부 측에 반납한 것이다. 국정원이 만들어준 계좌에 넣었다. 따라서 이번 작업으로 리베이트를 챙긴 놈은 안진식뿐이다.
(1826)새인생-14
“믿을 만합니다.”
조철봉의 이야기를 들은 국정원 정보실장 이강준이 말했다.
휴대전화 통화였지만 이강준의 목소리는 잡음도 없이 깨끗하게 들렸다.
“믿어도 손해될 것이 없단 말씀이죠.”
이강훈의 말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일단은 그쪽에 부담을 주시지 말고 자연스럽게 진행시키세요.”
국정원 입장으로서는 북한 측 거물급이 전향해오는 것이다.
흥분할 만했지만 이강훈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중에 제가 몇 가지 정보를 요구할 겁니다.
그리고 그쪽도 그쯤은 예상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고는 통화가 끊겼으므로 조철봉은 옆에 앉은 장선옥을 보았다.
음질이 맑은 데다 음량을 높였으므로 장선옥도 이강준의 말을 다 들은 것이다.
장선옥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봐요. 믿을 만하다고 하잖아요?”
응접실의 소파에 두 다리를 길게 뻗고 앉은 장선옥이 말했다.
“맞아. 믿어도 손해될 것이 없네. 정말.”
조철봉은 일부러 장선옥을 옆에 앉혀 놓고 전화를 한 것이다.
그때 장선옥이 팔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나도 할 테니까 잘 들어요.”
휴대전화의 버튼을 누르면서 장선옥이 말했다.
“김성산 대표는 당신 팬이던데.”
휴대전화를 귀에 붙인 장선옥이 혼잣소리처럼 말하더니 곧 손가락을 입에 붙였다.
가만있으라는 표시였다.
“아, 대표동지. 저 장선옥입니다.”
장선옥이 정중하게 말했다.
상대는 김성산이다.
“아, 장동무. 거기 발리인가?”
김성산의 목소리가 조철봉에게도 또렷하게 들렸다.
“네. 발리에 있습니다.”
“지금 조 사장하고 같이 있나?”
“아닙니다. 그 사람은 밖에 나가고 저 혼자 있습니다.”
“아, 그래.”
“대표님, 조 사장이 저하고 동거하기로 했습니다.”
“아, 그래.”
그러나 김성산은 별로 놀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이어진 김성산의 말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 친구는 장 동무가 제의하면 거부할 리가 없지. 원체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라.”
듣고 있던 조철봉이 입맛 다시는 시늉을 했고 장선옥은 웃음을 참느라고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그때 김성산이 불쑥 물었다.
“그 친구한테 체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
“예, 안 했습니다.”
“그런 친구는 인정이나 물욕, 또는 색으로 끌어들여야지 사상 전환은 안 먹혀.”
“알고 있습니다. 대표동지.”
“전형적인 자본주의 쓰레기지.”
이번에는 얼굴을 굳힌 조철봉이 어금니를 물었을 때 김성산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도 그 친구한테 배울 것이 많아. 기업 운영이나 축재술,
그리고 교묘한 수단에다 투자 방법 따위를 말야.”
“…….”
“어쨌든 잘되었어. 장 동무가 슬슬 끌어들여서 공화국의 일꾼으로 만들어 보라구.
그렇게 되면 대단한 공적이 될 거야.”
“잘 알겠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잘했어.”
김성산이 웃음 띤 목소리로 통화를 끝냈을 때 장선옥이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정색한 얼굴이다.
“자, 우린 이제 양측의 기대를 받고 있는 한 쌍이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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