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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호각세(互角勢) 17

오늘의 쉼터 2014. 10. 1. 12:48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7

 

 

 

 용춘이 원녕사에서 덕만 공주를 모셔와 제일 먼저 상의한 것도 백정왕의 장례 문제였다.

 

부왕의 참혹한 시신을 대하고 한때 혼절까지 했던 덕만은 국사에 이르자

 

자세를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하기를,

“자식으로서 부모의 장사를 주관하는 것도 중하나 이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라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례를 서둘러 아바마마께서 살아나신다면 촌각도 미룰 일이 아니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 여유를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왕실과 관련한 추문이 도는 것도 괴로운 일이요,

 

내란에 이어 국상 난 사실까지 바깥으로 알려지면 양적의 침공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여 용춘이,

“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하고는 왕궁 한편에 따로 백정왕의 시신을 안치해두었다가 반년도 더 지나

 

세상이 모두 조용해진 뒤인 임진년(632년) 정월이 되어서야 왕의 붕어 사실을 세상에 공포하였다.

신라에서는 53년간 나라를 다스린 백정 임금의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여

 

왕경 한지(漢只)에 성대히 장사지냈으며,

 

당주 이세민은 조서로써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조위사에게 비단 2백 필을 부의로 보내왔다.

국상 절차가 모두 끝난 뒤 용춘이 화백을 소집하여 후왕에 관한 논의를 하였는데,

 

만장일치로 추대된 이가 선왕의 장녀인 덕만 공주였다.

이로써 신라는 삼한 역사상 유례가 없던 여주 시대(女主時代)로 접어들게 되었다.

신라의 문무 백관들은 덕만을 임금으로 추대하면서 경의의 뜻으로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지어 바쳤다.

화백의 추대로 보위에 오른 덕만은 용춘과 상의하여 거로(巨老) 삼현을 다스리던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리토록 하고 내외관을 일제히 정리했으며,

 

군신간 불신의 근거인 상수 제도를 비롯, 나라에 해가 되는 구제악법(舊制惡法)을 과감히 혁파하였다.

 

또한 국고를 헐어 홀아비와 과부, 어린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그밖에도 자존하기 어려운 이들을

 

널리 구제하였다.

 

이듬해에는 친히 신궁(神宮)에 제사하고, 옥에 갇힌 죄수들을 대사(大赦)했으며,

 

모든 주군(州郡)에 일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는 등 건복 말년의 어지러운 민심을 달래었고

 

내란으로 황폐해진 법강과 풍기를 다잡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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