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16
다시 3궁을 장악하고 난리를 평정한 용춘은 곧바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우선 내란의 책임을 물어 상대등을 폐하고,
이찬 이상의 벼슬아치를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내란에 가담한 병부 장수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였다.
칠숙은 동시(東市)에서 참수하고 아울러 그의 9족(九族)을 함께 멸하였고,
백반은 본래 약으로 죽이려 했으나 상태가 이미 온전치 아니하여
그냥 두어도 여생이 죽음 못지 않게 처참한 데다,
공주 덕만이 한사코 간청하기를,
“전날 용춘 당숙께서는 왕실에서 더 이상 족친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시겠다고
저와 굳게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백반 숙부를 죽인다면 그 자손들과 저는 또다시 구수지간이 될 것이며,
왕실은 영원히 인심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바라건대 원한으로 돌고 도는 고리를 이곳에서 끊게 해주십시오.”
하므로 분을 삭이며 금족령으로 대신하였다.
그 뒤로 백반은 자주 개 짖는 흉내를 내며 마당을 기어다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백제로 도망갔던 석품은 칠숙과 만나기로 한 국경에서 기다리다가
문득 처자를 데려오고 싶은 생각이 났다.
이미 대명천지 밝은 날은 떳떳치 못한 몸이라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총산(叢山)으로 되돌아와 그곳에서 만난 나무꾼과 옷을 바꿔 입고 나무꾼으로 가장하여
나뭇짐까지 지고 몰래 집으로 숨어들었는데, 미리 매복하여 기다리던 군사들에게
붙잡혀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태가 대강 수습된 뒤에도 신라 조정에서는 꽤나 오랫동안 백정왕의 붕어 사실을
세상에 공표하지 않은 채 지냈다.
이는 왕실과 관련된 추문을 숨기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백제의 동향이 심상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백제왕 부여장은 웅진으로부터 돌아와 사비에 머물고 있었다.
장왕은 경인년(630년) 가을에 곡식이 무르익으면 웅진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국원을 치려고 굳게 마음을 도스르고 있었는데,
그해 여름 땅이 갈라지도록 한재가 심하여 농사를 망치게 되자,
“하늘의 뜻을 살펴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곧 제왕의 책무이거늘,
땅이 바다거북의 등과 같고 나락이 타들어가는데 어찌 근신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인가?
출병에 앞서 대장기 하나가 바람에 꺾여도 불운을 점치고 흉조를 의심하는 법이거니와
하늘이 온 여름내 저리도 붉게 타기만 하시니
이는 과인에게 군사를 낼 때가 아님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한즉 사비성의 역사를 시급히 중단하고 노역에 동원한 자들을 모두 집으로 보내어
생업에 종사토록 하라.
짐도 7월에는 사비로 돌아갈 것이다.”
하고는 실제로 그해 7월,
웅진에 데려갔던 모든 장수와 신료들을 거느린 채 환도하였다.
사비로 돌아간 그는 국고를 헐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온갖 노력을 쏟았다.
그해 백제 땅의 가뭄은 실로 지독했다.
논과 밭은 말할 것도 없고 저수지의 물까지 말라붙었으며,
산야에 방목하던 짐승과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도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해 수없이 죽어갔다.
장왕은 동명묘와 사직단에서 몇 차례나 기우제를 지내며 비를 빌었고,
국답과 수로를 관리하는 자들을 엄중히 문책하였으며,
날마다 편전에서 밤을 밝히고 5방(五方)과 10군(十郡)의 행정을 일일이 살피고 챙겼다.
“아, 내가 그간 동적(東敵:신라)을 치는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내정을 너무 소홀히 하였구나!”
왕은 피폐한 강토와 문란해진 국정을 살피면서 내내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첩자들을 통해 금성의 내란 소식이 사비에 전해진 것은 이듬해인 신묘년 4월 초순경이었다.
장왕은 백반과 용춘이 군사를 동원해 서로 싸운다는 말을 듣자
용춘이 마침내 왕위를 탐내어 역모를 일으켰다고 짐작했다.
그러자 중신들은 이때야말로 남역 평정을 실현할 적기라고 다투어 간하였다.
“백반은 3궁을 장악하였고 용춘은 도성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공주 덕만을 용춘이 납치해간 모양입니다.
이럴 때 군사를 낸다면 신라는 양난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댈 게 뻔합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동적을 영원히 궤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나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때는 바야흐로 춘궁기였다.
과년에 풍년이 들었어도 양식이 동날 때인데 유례없는 살년(殺年) 끝에 당한 이듬해
춘궁기가 황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신라 임금은 어찌 되었다더냐?”
“글쎄올습니다. 죽었다는 말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말도 있습니다.”
“첩자들에게 말하여 그 사실을 명백히 확인하라.
지금은 시운이 좋지 않아 어설픈 소문만 가지고 군사를 낼 때가 아니다.
내란이 극렬하면 반드시 임금이 온전하지 못할 터,
만일 국상이 났다면 더 따질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섣불리 나설 때가 아니다.”
그런데 첩자들이 보내온 소식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어떤 자는 신라왕이 백반의 손에 죽었다고도 하고, 어떤 자는 공주 덕만이 보위에 오를 거라고도 했다.
용춘이 반역을 일으켰다고 굳게 믿은 장왕으로선 당최 이런 소문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일흔이 넘은 늙은 아우가 어찌하여 말년에 친형을 살해할 것이며,
용춘에게 납치되었다는 공주가 무슨 수로 임금이 된단 말인가?
하물며 신라가 제아무리 오랑캐의 법도를 가진 해괴한 나라라곤 해도 스스로 망하려 들지 않는 한
어찌 여자를 임금으로 내세우랴.
대관절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뿐이로구나.”
장왕은 다시 이렇게 못박았다.
“신라 임금의 생사가 중요하다. 임금이 죽었다는 소문이 없거든 더 말하지 말라.
어쩌면 이는 우리에게 살년이 든 것을 알고 간적들이 꾸민 유인책일 수도 있는 일이다.”
신하들도 듣고 보니 그랬다.
이리하여 백제는 넉 달간이나 계속된 천금같은 남역 평정의 기회를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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