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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호각세(互角勢) 15

오늘의 쉼터 2014. 10. 1. 12:06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5

 

 

 

 그때부터 월성을 사이에 둔 공방전은 좀체 끝나지 않았다.

 

토벌군 장수들은 궁리를 모으고 지략을 짜내어 월성을 공략했지만

 

그때마다 성안의 군사들은 마치 이쪽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보듯 절묘한 대응책으로 응수했다.

 

동문을 어지럽게 하고 남문을 들이치면 성안 군사들은 모조리 남문에 모여 시석을 퍼부었고,

 

어떤 혼전계(混戰計)에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으며, 월성 남문에서 한바탕 치열한 교전이 있던 날

 

밤에는 도리어 토벌군의 피곤함을 틈 타 칠숙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반격을 가해

 

초저녁잠에 빠져 있던 토벌군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허를 찔린 토벌군 진채는 시일이 흐를수록 낭패감에 휩싸였다.

 

위세에 눌려 쉽게 무너질 줄 알았던 잔군들이 결사항전으로 거세게 저항하고 나오자

 

용춘을 비롯한 토벌군 장수들은 한결같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칠숙을 과소평가한 게 틀림없다.

 

그는 대군의 허를 간파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상대가 숫자의 우세함을 믿고 자신들을 호락호락 여기는 점을 거꾸로 이용하다니

 

과연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다.

 

아, 저런 자가 어찌하여 백반 같은 난신을 종신토록 섬겼더란 말인가!”

용춘은 칠숙이 비록 역모에 가담했지만 진정으로 그의 재주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은밀히 사람을 시켜 칠숙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서신 한 통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용춘의 서신을 받아본 칠숙은 깊은 한숨을 토했다.

“나는 임금을 시해한 사람이다.

 

천지가 가물어 사방이 타들어 가는데 논두렁에 든 미꾸라지가 어찌 살아나기를 바랄 것이며,

 

설혹 논두렁을 벗어난다 한들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이냐?

 

호의는 고마우나 그럴 수 없다고 아뢰어라.

 

나는 끝까지 섬기던 사람을 섬길 것이다.

 

미꾸라지는 날이 가문 것을 탓하며 죽어갈 뿐,

 

논두렁에 들어간 것을 원망할 수야 없지 않느냐?”

하지만 용춘의 서신을 받은 뒤로 칠숙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용춘공은 과연 그릇이 크고 대범한 사람이다.

 

아, 하늘은 어찌하여 그런 인물과 금생의 인연을 맺어주지 않으셨던가!”

칠숙은 허공을 향해 자주 차탄하였고, 그럴수록 당초의 독기를 서서히 잃어갔다.

게다가 그가 섬기던 백반의 상태도 날이 갈수록 칠숙을 맥빠지게 했다.

 

백반은 태의 수급을 본 뒤로 줄곧 정신이 온전하지 아니했는데,

 

하루는 칠숙이 바깥에서 싸우다가 잠시 군기를 누이고 북을 쉬는 틈을 타서 편전으로 들어오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칠숙을 빤히 바라보다가,

“네가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왔느냐?”

하고 물었다.

 

칠숙이 바깥의 전황을 설명하자

 

백반은 엉금엉금 바닥을 기다시피 칠숙에게 다가와서,

“가지 마라 얘야, 내가 간밤에 참으로 섬뜩한 흉몽을 꾸었구나.

 

 너의 목이 떨어져서 보자기에 싸인 더러운 꿈을 꾸었구나.”

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또 하루는 자다가 일어나 미친 듯이 대궁을 도망 다니며,

“죽을죄를 지었소!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 번만 용서하오!”

하고 난리를 피웠고, 대궁 편전의 담장 밑에서 개 짖는 흉내를 낸 적도 있었으며,

 

숙부인 진지왕이 자신을 잡으러 음부의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다닌다고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했다.


백반은 그렇게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칠숙은 더 이상 버텨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오랜 벗인 석품을 불렀다.

“이제 거의 막판인 성싶네.”

칠숙이 무겁게 말문을 열자 석품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제 그만 나리를 편히 모실 테니 자네는 나를 편하게 해주시게.

 

그런 연후에 자네만이라도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 어떠한가?

 

내가 자네를 사지로 부른 뜻은 실은 자네 손에 나의 종신을 부탁하기 위해서라네.

 

더구나 외주 군주 가운데 유독 자네 하나가 빠졌으니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네를 돕는 길이 아니겠나?”

이를테면 자신을 죽여 토벌군에 가담하지 아니한 허물을 만회하고

 

더 나아가 역적의 괴수를 벤 공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칠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품이 벌컥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는 나를 뭘로 보고 대체 그따위 시답잖은 망발을 지껄이는 겐가?”

“이보게나, 용춘공은 덕이 있는 사람일세.”

“아무리 덕이 있으면 무얼 해? 우리와는 이미 무관한 사람인걸.”

“굳이 저승길을 나와 함께 가려는가?”

“죽긴 왜 죽나?”

“안 죽으면?”

“우리 차라리 여기서 달아나 백제로 가세나.”

석품이 무릎을 바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백제로 달아나서 산곡간에 파묻혀 초부로 살아보세.

 

벼슬살이도 할 만큼은 했고 호강도 누릴 만큼은 누렸으니

 

인심 좋은 고을 하나를 택해 음풍농월로 여생을 보내는 것도 그런대로 즐겁지 않겠는가?”

석품의 상기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칠숙이 돌연 소리쳤다.

“좋네, 그리함세!”

그리곤 이어,

“자네부터 먼저 달아나게. 나도 곧 뒤따라감세.”

하였다.

 

칠숙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석품은 곧 평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칠숙과 백제 국경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뒤 대궁을 빠져 달아났다.

 

석품이 떠나고 나자 칠숙은 백반의 거소를 찾아가 두 번 절하고,

“나리, 대세는 이제 기울었습니다.

 

살아서 더 큰 모욕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자진하시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고 물었다.

 

칠숙의 말에 백반은 크게 노했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한 놈아, 모든 것이 나를 망치려는 너의 교활한 수작이었구나!

 

내 어찌 너 따위를 용서할 수 있으랴!”

그는 당장 주위에 명하여 칠숙을 옥에 가두라고 하였다.

 

백반을 호위하던 병부 장수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칠숙을 결박했는데,

 

그가 궐옥에 갇힌 이튿날 대궁은 마침내 토벌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이때가 신묘년(631년) 6월, 모반이 일어난 지 넉 달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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