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13
이튿날이다.
대궁에서 아버지 백반을 모시고 정무를 돌보던 태에게 비담이 보낸 심부름꾼이 왔다.
“오늘밤 대궁의 공무가 끝나거든 사량궁으로 건너오시라고 합디다.”
이에 태가 불쾌한 얼굴로,
“시건방진 놈, 용무가 있으면 제놈이 올 것이지 어째 날더러 오라 가라야?”
하니 심부름꾼이,
“대궁에서 고생하시는 큰 나리를 위해 작 은나리께서 젊고 아리따운 여자들을 불러
조촐한 주연을 베풀려는 모양입디다.”
하였다. 태는 그제야 회가 동한 표정을 지으며,
“이놈아,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해야지.
비담이 드디어 철이 난 모양이구나. 허허 알았다,
이따 아바마마께서 침전에 드시고 나면 기회를 봐서 건너가겠다고 일러라.”
하고 누그러진 어투로 화답하였다.
하지만 칠숙의 반응은 태와 달랐다.
바로 그 심부름꾼이 칠숙을 찾아가서도 같은 말을 전하였는데 칠숙이 대뜸 역정을 내며,
“지금이 어디 한가롭게 주연이나 베풀 때냐? 도대체 너희 주인은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하고 면박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따위 생각일랑 말고 군사들 단속이나 빈틈없이 하라 일러라!”
마치 상전처럼 명령하므로 심부름 갔던 사람이 말도 더 붙이지 못하고 물러나 비담에게 돌아갔다.
비담은 칠숙의 언행을 전해 듣자 길길이 화를 냈다.
“저런 발칙하고 무엄한 자를 보았나?
기껏 노래자이의 아들놈이 감히 뉘한테 망발을 지껄여?
내 이놈을 붙잡아 당장 요절을 내고 말 테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므로 다른 꾀를 내지 못했다.
염종은 칠숙이 계략에 말려들지 않아 크게 실망했지만
어차피 나중에 대역죄로 다스릴 거라는 비담의 말에 마음을 달랬다.
그날 초경 무렵 백반의 장자 태가 따르는 시종도 없이 혼자 사량궁으로 건너가 비담을 찾으니
염종의 심복인 도개와 진제가 궁문 앞에 기다리고 섰다가,
“남의 이목이 있어 후궁 별전에 은밀히 상을 마련했습니다.”
하고는 태를 으슥하고 후미진 곳으로 데려갔다.
태가 한참을 따라가도 보이는 것이 없자,
“이러다 날 새겠다. 대체 어디까지 데려갈 참이더냐?”
하고 물으니 앞서 가던 도개와 진제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만 가자면 그만 가지요.”
하고 둘이 동시에 칼을 뽑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태를 양쪽에서 찔렀다.
미처 사태를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태가 한줄기 구슬픈 비명을 토하며 죽자
도개와 진제는 태의 수급만을 취해 비담과 염종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태의 죽음을 확인한 염종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딸년이 비로소 두 다리를 곧게 뻗고 잠을 자겠구나.”
염종은 휘하의 병부 군사들에게 명하여 궁문에서 연기를 올렸다.
이를 신호로 서형산성 군사들이 일제히 밀어닥쳐 사량궁과 양궁을 그날 밤에 모두 장악했고,
뒷날 동트기 전에 염종의 군사들까지 가세해 대궁이 앉은 월성 동남방을 겹겹이 포위하게 되었다.
백반은 군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월성 밖을 내다보니 이미 수만 명의 군사가 개미 떼처럼 동남방을 에워쌌는데
조금 뒤 병부 장수 하나가 보자기에 싼 물건 하나를 들고 와서,
“용춘공이 이것을 전해드리라고 합니다.”
하므로 무엇인가 궁금해하며 보자기를 풀어헤치다가 그만 혼비백산하여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괴질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갑자기 눈을 무섭게 치뜨고 사지를 바들바들 떨어댔다.
바로 그때 월성 밖에서 용춘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렸다.
“간적들은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저항하는 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필히 구족을 멸할 것이다!”
칠숙은 태의 수급을 보고 넋을 잃은 백반을 부축해 가까스로 자리에 앉혀두고
황급히 갑옷을 갖춰 입었다.
그는 포노를 배치한 성문 위로 뛰어올라가 장검을 뽑아 들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우리는 임금을 모시는 대궁의 정군들이다!
어찌 사악한 역적들에게 손을 들어 항복할 것인가!
사직을 지키다가 힘에 부치면 의로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5 (0) | 2014.10.01 |
---|---|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4 (0) | 2014.10.01 |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2 (0) | 2014.10.01 |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1 (0) | 2014.09.30 |
제21장 호각세(互角勢) 10 (0) | 2014.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