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10
하지만 문제는 그다지 간단하지 않았다.
계책을 펴자면 우선 적진에 들어가서 비담과 염종을 구워삶아야 하는데,
흔쾌히 사지에 들어가겠다는 사람도 구하기가 어렵지만 무엇보다 비담과 염종에게
이쪽의 말을 믿게 할 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용춘이 장고 끝에 생각해낸 사람은 자신의 아들 춘추였다.
그는 은밀히 춘추를 불러 수품의 계책을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춘추가 사뭇 밝은 낯으로 대답했다.
“아버님께서는 과히 심려하지 마십시오.
소자 비록 용렬하나 어찌 비담이나 염종 따위를 구워삶지 못하겠습니까?
이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듯합니다.”
춘추가 워낙 자신 있게 말하자 도리어 용춘이 은근히 겁이 났다.
“그래도 만일을 모른다.
내가 맹졸들을 뽑아 양궁과 사량궁 북쪽에서 둔치고 있다가 이틀 동안 아무런 기별이 없거든
전후불계하고 곧바로 쳐들어갈 테니 너는 위급함에 빠지거든 수단껏 시일을 끌도록 해라.”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으나 아버님께서 꼭 그래야 심기가 편하시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뒷날 날이 밝자 춘추는 동시의 장사치로 꾸며 사량궁으로 비담을 찾아갔다.
재종간인 두 사람은 겨우 노상시비를 면할 정도의 안면이 있었는데,
비담은 춘추와 당주의 교분이 알려진 뒤로 이를 몹시 부러워하여 춘추를 볼 때마다,
“앞으로 아우가 당에 갈 일이 있거든 나와 동반하여 당황제를 내게도 소개시켜주지 않겠나?”
하고 부탁하곤 했다.
장사치로 변복하여 찾아온 춘추를 보자 비담은 크게 놀랐다.
그는 당장 양궁으로 사람을 보내 염종을 불러놓고 춘추와 마주앉았다.
“이런 형국에 자네가 어찌하여 나를 찾아왔는가?”
“형님께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말인지 어디 얘기를 해보게.”
“형님께서는 벌써 석 달이 넘도록 우리끼리 싸우는 이 한심하고 위험천만한 변란을
과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내가 되레 자네한테 묻고 싶은 말이네.
대세는 이미 정해졌는데 자네 부자는 대체 언제까지 어리석은 반항만을 일삼을 것인가?”
“하면 형님께서는 형님의 아버지이신 백반 당숙께서 칠십 평생 걸어가신
그 길고 험난한 갈문왕의 길을 고스란히 답습하실 각오가 되어 있는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비담이 춘추를 보고 반문했다.
“아버지가 임금이 되면 자식이 그 아래 처하는 것은 당연지사요,
형이 보위에 오르면 아우가 갈문왕이 되어 형의 왕업을 보좌하는 것은 계림의 유구한 전통이올시다.
이제 백반 당숙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두 분 형님께서는 마땅히 왕자가 되실 테지만
만일 당숙께서 천수를 마치시면 십상팔구 보위는 태 형님께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면 형님께서는 당숙과 똑같은 갈문왕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갈문왕의 일생이 어떠한지는 형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실 것이므로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당숙께서는 인자하신 형님을 둔 덕택에 권세도 누리고 신하들의 존경도 받을 수 있었지만
만일 태 형님과 같은 분이 임금이 되면 비담 형님은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짐작컨대 제 아버지처럼 살 없는 옥에 갇혀 평생을 징역살이로 보낼 공산이 큽니다.
게다가 사람이 셋만 모여도 성군작당으로 오해를 받기 십상이니
어쩌면 불원간에 역모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과연 그런 고초와 신산을 겪을 각오가 돼 있는지요?”
춘추의 말에 비담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아직 거기까지는 깊이 헤아리지 않았던 비담이었다.
춘추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잔뜩 낮춰 말허리를 이었다.
“저는 태 형님과 같은 분이 계림의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세상에 몇 해 먼저 나고 뒤에 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리석기 한량없는 인물은 임금이 되고,
현명하고 명철한 아우는 일생을 헛되이 살아야 합니까?
임금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저희가 지금 도성 밖에 진을 치고 고생하는 것도 태 형님과 같은 인물이 임금이 되는
불행을 막아보자는 충심이지요.
저는 형님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형님께서는 과연 태 형님이 계림의 제왕감이라고 여기시는지요?”
그러자 성질 급한 비담은 앞뒤 재지 않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제왕감은 무슨, 일개 현을 다스리기에도 벅찬 인물이지!”
비담의 진심을 확인하자 춘추는 다시 조용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난 병술년에 일어났던 당나라의 정변도 실은 이와 신기할 만큼 똑같은 경웁니다.
그때 지금의 당황제께서는 형제간의 정리로 괴로워하시며 형을 죽이고
제나라 임금이 된 소백의 일을 제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마땅히 대의멸친을 주장하여 당황제가 큰 결심을 하도록 도와주었고,
이에 당황제께서는 무능한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올라 지금과 같은 성세를 열어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당황제에게 대의멸친을 주장한 것과 같은 간곡한 마음으로 형님을 찾아왔습니다.
더구나 이는 남의 나라 일도 아니요,
바로 내 나라 계림의 천년 사직이 걸린 막중대사가 아닙니까?
형님께서는 부디 저의 충정을 헤아리셔서 현명하고 옳은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춘추가 말을 하는 동안 비담은 눈에 광채를 번뜩이며 두 주먹을 몇 번이나 불끈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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