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폭풍세가

제24장 낙영탑(落影塔)의 괴인(怪人)들

오늘의 쉼터 2014. 10. 1. 00:19

 

제24장 낙영탑(落影塔)의 괴인(怪人)들


 

 

"엇!"
군검풍의 눈이 갑자기 번쩍 빛을 발했다.
안개 속으로 언뜻 거대한 탑(塔) 같은 형상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신! 저 운해(雲海)쪽으로 내려가자!"
그는 융천신마룡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고...오! 콰콰콰...!
다음 순간, 융천신마룡은 자욱한 운해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과연...!"
군검풍은 융천신마룡의 위에서 경악의 눈을 부릅뜨며 신형을 휘청했다.
츠으 츠으...!
운무 중으로 내려감에 따라 막강한 무형잠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형성된 전세에서 느껴지는 탄진잠력(彈陣潛力)이다.
저중에 무엇인가 있다!"
군검풍의 눈빛이 휘황하게 빛을 발산했다.
짙은 운무 중에 어떤 거대한 진세가 펼쳐져 있는 것을 군검풍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였다.
구워...!
갑자기 융천신마룡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츠으... 츠으...!


아래에서 이는 막강한 진운으로 인해 융천신마룡의 거구는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자꾸 떠밀려 올려지는 것이 아닌가?
군검풍은 그 모습에 즉시 입을 열었다.
"마신, 수고했다. 이곳에서부터는 나 혼자 갈 테니 멀리 가 있다가 부르면 다시 오너라."
휘익...!
말과 함께 그는 융천신마룡의 등에서 바람같이 날아내렸다.
고오...!
융천신마룡은 조심하라는 듯 군검풍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몸을 돌렸다.

이어 그놈은 뇌전인 듯 멀리 운무 속으로 폭사되어 나갔다.
군검풍은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금천구중대금제(禁天九重大禁制)다!

천 년 이전의 실전진세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거대한 산악 속에 해일처럼 일어나는 가공할 진운 속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천하에 군검풍 밖에 없을 것이다.
군검풍은 형형하게 신광을 빛냈다.
"위험은 많으나 오히려 사문(死門)은 없는 진세다."
그는 진세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망설임없이 진세를 역으로 밟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곳이... 흑호(黑湖)인가?"
군검풍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우르르... 츠으츠으...!
금천구중대금제는 군검풍의 등 뒤에서 계속 우뢰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음울한 안개를 토하는 반경 십여 리의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이유인지 호수의 물은 먹물인 듯 새까만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저편의 호수 중앙에는 믿어지지 않게도 하나의 거대한 탑이 우뚝치솟아 있었다.

그것은 높이 오십여 장에 달하는 구층(九層)의 석탑(石塔)이었다.
석탑의 벽에는 몇 자의 글이 이끼에 덮인 채 쓰여져 있었다.

군검풍의 시력은 그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낙... 영... 탑(落影塔)>


이런 글씨였다.
"낙영탑이라! 오긴 제대로 왔군."
군검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손가락을 흑호의 호수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서늘한 한기와 함께 금방 손가락 끝이 새파랗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역시... 이 물은 지옥중수(地獄重水)다."
군검풍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옥중수란 물 중에서 가장 무서운 물을 말한다.

그것은 수은(水銀)을 다량 포함하고 있어

설사 금강지체라도 단번에 녹여버리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군검풍은 지옥중수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독황지체가 되지 않았다면...

지옥중수에서 이는 지옥마무(地獄魔霧)에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어 그는 기이한 눈빛을 지었다.
"이런 곳에서 회합을 갖다니...

뭔지 모르지만 음모의 냄새가 나는군. 우선모습을 바꿔볼까?"
그는 손으로 가볍게 얼굴을 슥 문질렀다.

그러자 금방 그의 얼굴은 시체같이 새하얀 노인의 얼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군검풍에게 죽은 지옥사황(地獄邪皇)의 모습이었다.
군검풍은 화밀마맥(花密魔脈)의 절정기환대법인 천환역형술(千幻易形術)을펼친 것이었다.
"저중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옥사황의 얼굴을 빌어 잠입하는 것이 좋다!"
그는 염두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변했다.
휘이이!
삽시에 한 줄기 운무처럼 흐릿해진 군검풍의 신형은

음산한 산풍을 타고 훌훌 날아 낙영탑쪽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가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스...
문득 음풍(陰風)을 일으키며 한 명의 자의몽면녀(紫衣蒙面女)가

군검풍이 서있던 곳에 환상처럼 나타났다.
츠으으으!
그녀의 복면 사이로 드러난 봉목은 아주 무서웠다.

지독히도 강한 마기(魔氣)가 침잠해 있는 눈빛이었다.
"모습이 눈에 익다니...

저자는 설마 자금성 금마천벽(禁魔天壁)에서 사부를 풀어준 그 멍청이란 말인가?"
자의몽면녀는 군검풍이 사라진 곳을 주시하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헌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금성내의 비역 금마천벽(禁魔天壁)을 입에 올리다니...!
이 자의몽면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쨌든 대단한 자다. 감히 지옥사황을 위장하여 낙영탑으로 스며들다니...!"
자의몽면녀는 봉목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옥보를 옮겨 지옥중수의 위를 평지 걷듯 걸어왔다.

지옥중수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오다니,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그때 그 멍청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 천년마후(千年魔后)의 손에 죽으리라."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가 깃든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스스스...!
그녀의 모습은 곧 지옥마무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천년마후...!
이것이 자의몽면녀의 이름인가?

아무튼 그녀의 존재는 신비롭고 놀라운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의몽면녀도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
또 한쌍의 신비한 봉목(鳳目)이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봉목은 차일천폐금제(遮日天閉禁制)라는 상고절진(上古絶陣)을 펼쳐
그 속에 숨어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눈동자가 네 개로 보였다.
두 개의 눈에 네 개의 눈동자!

그 기이한 눈은 한없는 지혜와 총명함이 깃들어 별빛보다 더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특이한 눈의 주인은 일신에 허름한 마의를 걸친 여인이었다.

그녀는 비록 차림은 수수했지만 용모 만큼은 경국(傾國)이란 수사가 어울링 만했다.
미녀는 인상은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고 쌀쌀맞게 보였으나

대신 아주 이지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녀는 바로 십전마혜(十全魔慧) 을유향이었다.

이런 특이한 분위기와 인상을 지닌 여인은 단연코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을유향은 골똘한 생각에 잠긴 듯한 음성으로 나직이 뇌까림을 발했다.

"천년마후! 이백년만에 세상에 뛰쳐나온

십절천마(十絶天魔)가 기른 천년제일마후(千年第一魔后)라는 계집일까?"
의혹이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던 을유향은 그제서야 몸을 숨겼던 진세에서 걸어나왔다.

그녀의 봉목은 온통 근심과 우려의 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정체가 무엇이든 정말 무서운 계집이다. 저 계집에게 바람둥이의 정체를 들켜 버렸으니...!"
그녀는 난감해진 듯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여튼 그 바람둥이는 한시도 내가 눈을 떼도록 만들지 않는구나.

내가 은밀히 따라오지 않았다면 또 어떤 꼴을 당할 뻔했을까?"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어투 속에는 이미 마음속의 정인으로 작정한

군검풍을 지킨다는 행복감과 자부심이 은연중에 깃들어 있었다.
"자, 이제 움직여야겠다.

저 낙영탑에서 바람둥이가 무사히 빠져나오게하려면 보통의 안배,

보통의 조력자들로는 되지 않는다!"
그녀는 아미를 모으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생각했다.
"우선 열화창(熱火廠)에 연락해서 열화뢰강전(熱火雷剛電)을 빌려야 하고,
그런 후 마궁삼태상(魔宮三太相)을 이곳으로 유인해야겠다.

바람둥이의 종적을 흘려 그 세 늙은 괴물을 유인해 두기를 잘했지."
그녀는 혼자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녀의 눈빛은 한시도 게을리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윽고 을유향은 생각한 것을 즉시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그녀는 곧 교구를 떠올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바람둥이... 제발 반나절 내에 말썽을 일으키지 말아요!"
그녀는 사라지면서 근심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군검풍이 들으라는 듯이.

그녀의 염려 가득한 음성은 바람을 타고 여운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군검풍은 낙영탑의 정면이 바라보이는 곳에 서 있었다.

그는 호면을 딛고선 채 형형한 시선으로 낙영탑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 거창하군!"
그는 자못 감탄을 금치못하는 표정이었다.
가까이서 본 낙영탑은 흡사 거대한 괴물과도 같았다.
츠으으으...!
흑호(黑湖)의 지옥흑무가 뱀처럼 휘감긴 칙칙한 오십 장 높이의 거탑,

그것은 흡사 십팔층 지옥에서 아수라의 뿔이

세상으로 빠져나온 듯한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군검풍은 눈썹을 찌푸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 없군.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낙영탑을 세웠단 말인가?
더군다나... 흑호의 바닥에서부터 이 탑을 쌓아올린 듯 하니...!'
그는 거대한 낙영탑의 위용에 절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그와 함께, 그는 낙영탑의 그림자가 음울하게 전신을 눌러옴을 느끼며

웬지 섬뜩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싱긋 웃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강렬한 호기심은 결코 낙영탑이 풍기는 위용에 압도당해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그는 낙영탑의 일층 전면으로 다가섰다.
그곳에는 검푸른 이끼가 가득 낀 삼 장 높이의 석문(石門)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옥마무의 풍화에 시커멓게 변색된 화강암의 석문이었다.
석문 위에는 천 년, 아니 그 이전에 쓰여진 듯한 흐릿한 글이 몇 줄 드러나 보였다.
그것은 세월의 풍상에 깍이고 패여 몇 자 외에는 제대로 해독조차 되지
않는 글이었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지존혈(至尊血)... 맹(盟)이... 당한 치욕... 구천(九天)... 폭풍(暴風)... 잊지말도록...

반드시... 지존부활... 복수를 위해서라면... 천 년이라도... 기다리...>


그것을 읽고 난 군검풍은 두 눈을 번쩍 빛냈다.
"지존혈맹(至尊血盟)?"
그의 뇌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 글대로라면... 지존혈맹이란 단체가 구천(九天)...

폭풍(暴風)의 합격에 패멸한 후 이 탑을 세웠다는 얘기인데...!'
그는 검미를 찌푸리며 염두를 굴렸다.
'구천이라면 구천마야 독고의 사문 구천마교(九天魔敎)일 것이고,

폭풍이라면 천수백 년 전 구천마교와 천하를 놓고 싸우다 패멸한 폭풍일맥(暴風一脈)...!'
그의 얼굴에는 문득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지존혈맹은 폭풍일맥과 구천마교을 세우기 그 이전,

상고에있었던 집단이란 얘긴가?'
그는 신안을 빛내며 정확하고도 예리한 추리를 밟아나갔다.
이 때였다.
그그긍...!
돌연, 석문이 둔중한 굉음과 함께 옆으로 갈라졌다.
"...!"
그 갑작스런 광경에 군검풍은 흠칫하며 석문의 안쪽을 주시했다.
석문의 안쪽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섬뜩한 음풍이 기분 나쁘게 몰아쳐 왔다.
그런데 군검풍은 그 안을 주시하다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있다.'
그는 긴장하며 숨을 멈추었다.
과연 어두운 낙영탑의 안쪽에 한 명의 인물이 벽면을 등지고 좌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새하얀 백발이 무릎까지 덮고 있는 괴인이었다.
그는 대체 나이를 추측할 수 없어 보였다.

그리고, 괴인의 얼굴은 아주 강팍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초강자다!'
군검풍은 한눈에 그렇게 짐작했다.

그는 백발괴인의 전신에서 폭발할 듯 쏟아지는 패기(覇氣)를 느끼고는

부지불식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큼 탑 안으로 들어섰다.
그긍...!
그러자, 육중한 굉음을 일으키며 다시 석문이 뒤에서 닫혔다.
번...쩍!
그와 동시에, 가공할 뇌전이 벼락같이 작렬하며 군검풍의 전신을 강타했다.
'읏!'
군검풍은 내심 흠칫 놀라며 신형을 휘청했다.
'무서운 눈빛이다!'
그는 신음을 발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예의 뇌전은 놀랍게도 바로 백발괴인의 눈에서 폭사된 것이었다.
"내... 놓아라!"
웅웅...!
문득, 백발괴인이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일갈했다.

그와 함께 그는 다짜고짜 군검풍의 앞으로 불쑥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마른 나무같이 깡마른 손이었다.
군검풍은 흠칫하며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했다.

'무엇을 달란 얘긴가?'
콰...앙!
그 순간, 다시 백발괴인의 깡마른 손이 벼락같이 허공을 갈랐다.

뇌전같이 가공스러운 속도를 지닌 일권(一拳)이었다.
그 일권은 가차없이 군검풍의 가슴을 강타했다.
쿠...쿵!
"녠!"
군검풍은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백발괴인의 일권을 그대로 얻어맞고 뒤로 퉁겨졌다.
군검풍은 아연실색했다.
"섬전비폭신권(閃電飛瀑神拳)! 노인장은 권왕(拳王) 뇌붕(雷鵬)이시오?"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그는 백발괴인의 가공할 일권을 맞았으나 불사강벽(不死剛壁)이 저절로 일어나

몸을 보호해 주었기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군검풍이 놀란 것은 바로 백발괴인의 신분 때문이었다.
그때 백발괴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문득 한 줄기 괴로운 빛이 떠올랐다.
"권왕 뇌붕이 누군지 노부는 모른다.

노부는 네놈에게서 한 가지 물건을 보기를 원할 뿐이다."
그는 마치 상처입은 사자같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군검풍은 그의 말에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맞구료! 노인장이 바로 이백 년 전의 천하제일인들이시던

구대천왕(九大天王)중 아홉째 권왕 뇌붕이구료!"
그는 나직한 신음성을 발하며 경악의 음성으로 말했다.


<구대천왕!>


십절천마후가 갓 무림에 등장하여 천하혈세하기 전,

이미 천하무적으로 불리던 구 인의 전설적 강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권왕(拳王),
-조왕(爪王),
-장왕(掌王),
-비왕(飛王),
-화왕(火王),
-수왕(水王),
-검왕(劍王),
-도왕(刀王),
-혈왕(血王).


모두 이렇게 구 인이다.
각기 한 방면에서 천하무적으로 군림한 구대천왕,

그런 그들은 십절천마후의 등장 직전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그런데 그 구대천왕의 아홉째인 권왕 뇌붕이 낙영탑에 있다니...

얼마나 놀랍고도 뜻밖의 사실인가?
권왕 뇌붕은 갑자기 사위를 진동시키는 웅엄한 어조로 말했다.
"네놈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노부는 네놈에게서 한 가지 물건을 보기를 원할 뿐이다."
그는 방금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콰...쾅!
쩌저정!
그 말과 함께, 빗발치듯 그의 권세가 잇달아 날아들었다.


-- 비폭파황십절권(飛暴破荒十絶拳).


무림사상 가장 빠르고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천년제일권세(千年第一權勢)!

그것이 펼쳐진 것이었다.
콰콰쾅...!
군검풍은 미처 피할 여유도 없이 삽시에 십권에 가격당했다.

그러나,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사정을 봐주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 순간,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세웠다.
권왕 뇌붕의 기세는 요란했으나 비폭파황십절권에는 공력이 거의 실려있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권왕이 전력으로 비폭파황십절권을 내쳤다면
군검풍은 그의 삼권도 받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선배...!"
군검풍은 권왕을 향해 무어라 입을 열려 했다.

그러자 권왕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는 짤막하게 내뱉었다.
"황금존극(黃金尊戟)을... 보여라!"
"아!"
그제서야 군검풍은 권왕이 내놓으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탄성을 발했다.
"여기 있습니다."
그는 곧 지옥사황을 격살하고 취한 황금단극을 공손히 권왕에게 바쳤다.
황금단극을 받아든 권왕은 눈을 떠서 그것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어, 문득 그는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지옥사황을... 죽였느냐?"
"예!"
군검풍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으음... 그럼... 군림지존(君臨至尊)! 그 놈을 죽일 가능성도 있군."
권왕의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군검풍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군림지존이라니요?"
"곧... 보게 되리라. 그놈은 우리 구대천왕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든 놈이다.

그리고... 천하혈란(天下血亂)의 배후자인... 무서운 놈이다...!"
츠으...!
권왕의 백발은 가공할 노기로 무섭게 곤두섰다.
군검풍은 내심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군림지존? 그 자가 누구이기에 구대천왕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는 강한 의혹과 호기심을 느꼈다.
이때, 권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이것을... 네게 주겠다. 익힌 뒤... 한 아이를 찾아 전해다오."
권왕은 하나의 철환(鐵環)을 군검풍에게 건네주었다.
"...!"
군검풍은 말없이 철환을 받아들었다.
철환은 반 자 정도의 크기로, 표면이 온통 시커멓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의 표면에는 갑골문자가 가득 쓰여져 있었다.


-- 비폭파황십권결(飛瀑破荒十絶拳).


이같은 이름을 지닌 것에 관한 구결이었다.
군검풍은 철환을 들어보이며 문득 권왕에게 물었다.
"이것을... 어느 분께 전해야 합니까?"
"구천마야... 독고!"
"아!"
군검풍의 안색이 그 순간 홱 변했다.
구천마야 독고!
이 이름이야말로 실로 가공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권왕은 그 이름을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입에 올렸다.

마치 아랫 사람을 대하듯 말이다.
경악을 금치 못하며 망연해져 있는 군검풍에게 권왕은 더욱 경악할 사실을 알려주었다.
"구천마야... 그 어린 아이가 군림지존과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말을들었다.

위쪽의 여덟 형님들께서도 그 구천철강환(九天鐵剛環)을 하나씩 줄 것이다.

그것이 모두 합일되면 군림지존을 패쇄시킬 구천마교(九天魔敎)의 제일절기가 나타난다."
군검풍의 안색이 거듭 급변했다.
'설마 구대천왕도 마교(魔敎)의 인물들이었단 말인가?'
그는 경악이 지나쳐 이제는 놀랄 기력조차 없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선배! 소생은 ...!"
그러나, 권왕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시끄럽다! 귀찮게 굴지 말고... 올라가랏!"
그는 버럭 일갈을 내지르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나의 계단이 나있었다.
군검풍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더 이상 거절할 명분조차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오면... 다시 뵙겠습니다!"
군검풍은 하는수 없이 권왕에게 공손히 절하고 몸을 돌렸다.
"아이야!"
이때 문득, 권왕이 군검풍을 불러 세웠다.
"옛?"
군검풍이 돌아보자 권왕은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아직... 너는 군림지존은 고사하고 다른 구대지존(九大至尊)의 적수도 못된다."
"구대지존(九大至尊)...!"
권왕은 무심한 음성으로 일러주었다.
"유사시에는... 구층 지존각(至尊閣)의 서방 창문으로 빠져 나가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군검풍은 권왕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이어 그는 계단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긍...!
이내 그는 윗층의 석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권왕은 문득 나직이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잘 가거라. 폭풍후예...!"
폭풍의 후예라니 무슨 말인가?

권왕은 한눈에 군검풍의 내력을 알아본것일까?
"이제... 치욕적인 잔생을 청산할 때가 왔다.

후훗! 군림지존! 네놈의 야심은 결코 이우어질 수 없다!"
권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음울하게 미소지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한 줄기 허탈한 기운이 스쳤다.


그긍...!
군검풍은 석문이 열리는 순간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지존각(至尊閣)인가?"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곳은 넓은 대전이었는데 중앙에는 하나의 커다란 원탁(圓卓)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원탁의 둘레에는 일에서 십까지의 숫자가 새겨진 옥좌(玉座)가 열 개 놓여 있었다.


-- 십존군림(十尊君臨).


그 옥좌에는 용사비등하는 필체로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군검풍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구천혈강환은 반드시 구천마야께 전하겠습니다!"
열린 석문의 저편 어둠속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온통 타는 듯 시뻘건 모발을 지닌 인물이었다.

석실의 바닥까지 덮은 그의 혈발은 치렁치렁하게 그의 몸을 덮고 있었다.

하지만, 기괴한 혈발이 풍기는 느낌과는 달리 그는 용모가 청수한 노문사였다.


-- 혈왕(血王)!


이 인물은 바로 구대천왕의 대형이었다.
구천마교(九天魔敎) 구천장로(九天長老)의 혈왕(血王) 고륜(古輪).
이것이 그의 신분이었다.
"그대를 믿네!"
혈왕은 군검풍이 들어서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담담히 그를 맞이했다.

그는 군검풍을 향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긍...!
이윽고, 석문이 굉음을 내며 닫혔다.
"...!"
군검풍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존각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자리가... 지옥사황(地獄邪皇)의 자리군."
그는 팔자(八字)가 새겨진 태사의에 단좌했다.
"번거로움은 피하는 것이 좋다."
스윽...!
그는 곧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츠으으으...!
그러자, 삽시에 군검풍의 전신은 섬뜩하도록 검붉은 사강풍(邪 風)이 일어

그의 모습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 지옥탄강(地獄彈剛).


그것은 바로 지옥혈경(地獄血經)상의 최강호신기공이었다.
이 때였다.
"호호! 지옥사황(地獄邪皇) 팔존자(八尊子)께서 먼저 오셨다니!"
문득 한 줄기 교태로운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이어 일 인의 왜영이 지존각 안으로 들어섰다.
"...!"
군검풍은 지옥탄강에 덮인 채 실눈을 뜨고 들어온 인영을 주시했다.
놀랍게도 그 왜영은 바로 쳔년마후(千年魔后)라 자칭한 신비자의녀였다.
그녀는 여전히 몽면을 벗지 않고 있었는데 기이한 시선으로 군검풍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나직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천일폐관하시고 또 은공이라니... 지옥사황께서는 역시 남다른 면이 있으세요."
그녀는 천천히 옥좌로 다가섰다.
군검풍은 경이로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십존중 여인도 있었다니...!'
그 사이 자의몽면녀는 서열 삼위의 옥좌에 그림같이 앉았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서는 제후(帝后)의 기품이 자연스럽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십존서열 제삼위! 예사 계집이 아니다!'
군검풍은 절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자의몽면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흥! 지옥사황께서는 삼 년 전보다 한층 더 준수해 지셨군요."
그녀는 턱을 고이고 앉은 채 맞은편의 군검풍을 주시했다.

군검풍은 내심 움찔했으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크녠! 두 분의 정의가 각별할 줄은 몰랐는 걸?"
문득 음산한 일성이 두 사람의 귓전을 울렸다.
스스스...!
이어, 지존각으로 환상같은 일 인이 날아들었다.

그는 남녀를 구분할 수 없이 모호한 황영에 뒤덮인 괴인이었다.
그 인물을 보는 순간 군검풍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따.
'화밀마맥의 기환절예를 능가하는 기환술(奇幻術)을 지닌 자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경악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마중제일이며 천세제일(千世第一)인 기환술의 본류

화밀마맥을 능가하는 기환술을 지닌 자가 있다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정녕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막강하기 이를데 없는 공력을 지닌 군검풍의 시선 앞에서도

몸을 감출 수 있는 환술의 소유자가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기환술로 몸을 감춘 괴인이 나타나자 자의몽면녀는 야릇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홋! 은환종(隱幻宗)! 늘 선착이시던 칠좌께서 오늘은 늦으셨군요."
교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녀의 말 속에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은환종이라 불린 신비괴인은 음산하게 웃었다.
"녠! 글쎄... 본종이 선착으로 왔는지 아닌지 천년마후께서 어찌 단언하시오?"
이어 그는 마치 형체없는 그림자처럼 군검풍의 옆 옥좌로 이동했다.
'은환종... 십존서열 제칠좌...!'
군검풍은 슬쩍 은환종을 돌아보았다.
"...!"
그와 동시에, 은환종도 환영 속의 군검풍을 돌아보았다.
짧은 순간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불꽃을 튀겼다.
"녠...! 팔좌는 점점 더 무서워지는 구료."
은환종이 먼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런데 군검풍은 이 순간 기이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지분냄새다. 그렇다면...은환종도 계집이란 말인가?'
그는 새롭게 알게된 뜻밖의 사실에 내심 침을 삼켰다.
은환종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

한 가닥 은은한 지분내음이 그의 환영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극히 미약한 것이었지만 군검풍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군검풍이 다시 기광을 빛내며 은환종을 돌아보려 할 때였다.
쿵쿵...!
갑자기 둔중하게 계단을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낙영탑 전체가 온통 무너질 듯 뒤흔들리는 엄청난 소리였다.
"...!"
"...!"
지존각 안의 삼 인은 시선을 일제히 석문으로 향했다.
'무서운 내공이다. 어떤 자일까?'
군검풍은 눈을 빛내며 석문을 주시했다.
그 순간 석문이 열리고 일 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전황(戰皇)!"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좌!"
천년마후와 은환종이 황망히 일어나 고개를 숙여보이는 것이었다.
군검풍도 그들을 따라 급히 일어서며 석문을 주시했다.
뚜벅...!
주위를 진동시키며 한 명의 거인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일 장의 키에 관운장같은 긴 흑염을 기른 노인.

그는 일신에 검고 붉은 철릭(鐵翼)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체구가 장대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였다.

눈빛까지도 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군검풍은 그를 일견한 순간 가습이 서늘해짐을 금치 못했다.
'무서운 자다! 저 자가 십존서열 제이위인가? 군림지존 다음 가는 인물...!'
바로 그 때였다.

군검풍의 귓전으로 나직한 여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조심하는게 좋아요. 불패천황(不敗天皇)은 회주만큼 무섭고 예리한 눈을 가졌으니..."
그 전음성에 군검풍은 흠칫했다.

'천년마후가...!'
그렇다.

전음은 바로 천년마후가 보낸 것이었다.
군검풍은 천년마후를 힐끗 일견했다.

그러나, 천년마후는 시침을 뚝 떼며 불패천황이라는 노인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중에도 다시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불패천황은 정도지존(正道至尊)으로 일천정파를 막하에 수렴하고 있어요.

본회십존 중 최대의 전단을 영도하는 인물이예요."
"...!"
천년마후는 재차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내 불패천황에 대해 설명했다.
군검풍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도지존(正道至尊)!

그럼... 이미 정파 전체가 이 비밀결사의 통제하에 들었단 말인가?'
그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었다.
"...!"
"...!"
불패천황의 등장으로 지존각은 묵직한 침묵에 잠겼다.
그렇게 일다경쯤 지났을까?

다시 침묵을 깨뜨리며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녠! 노부 만독지존(萬毒至尊), 늦었소이다."
"하하...! 전황이좌보다 늦다니... 죄를 지었소이다."
두 마디 음성과 함께 지존각 안으로 이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전신에 새카만 묵의를 걸친 은발괴인과 청수한 인상의 중년문사였다.
츠으...!
묵의를 걸친 괴인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사멸독기(死滅毒氣)가 흘러나오고있었다.

놀랍게도 독기는 군검풍의 독황지력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청수한 인상을 지닌 중년무사는 허리츰에 한 자루 보도를 차고있었다.
언뜻 보도의 손잡이에 쓰여진 검명(劍名)이 눈에 들어왔다.


-- 사라천강도(沙羅天剛刀).


군검풍은 새롭게 나타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내심 침중한 신음성을 발했다.
'저 자들도 십존중에 드는 인물이었단 말인가?'
그는 나타난 두 인물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내심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때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귓전으로 다시 천년마후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묵의괴인은 만독지존(萬毒至尊)으로 십존서열 제오위의 인물이예요.

그리고, 기생오라비 같은 저 작자는 사해지존(四海至尊)으로 서열 제육위예요.

겉보기는 중년이지만 사실은 백세가 다 되어가는 노물이예요.

사해오호(四海五湖)가 저 늙은이의 수중에 있어요."
"...!"
군검풍은 천년마후의 설명을 들으며 말없이 만독지존과 사해지존을 주시했다.
두 인물은 모두 군검풍이 빚을 받아낼 대상이었다.
즉 만독지존은 사사독마갱을 붕괴시킨 장본인이고

사해지존은 군검풍의 의형인 만수중 해극패를 사십여년동안

멸신천황도에 묶어두었던 원수인것이다.
군검풍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들을 격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그런 충동을 억눌러 참았다.

결코 경거망동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였다.
스윽!
지존각의 입구로 한 명의 여인이 그림자같이 들어오더니

자리에 앉은 만독지존의 뒤에 시립했다.
그녀의 전신은 온통 벽색(碧色)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벽의(碧衣)와 벽검(碧劍),

거기에다 벽붕의 투구를 쓴 특이한 차림새를 한 여전사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군검풍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백옥상...!'
그는 터지려는 외침을 다급히 삼켰다.

벽의여인은 군검풍이 너무도 잘 아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 벽안신녀(碧眼神女) 백옥상(白玉霜)!


그녀는 바로 실종되었던 사사독마갱의 제일여전사 벽안신녀 백옥상였던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만독지존과의 쟁패 때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벽안신녀가 만독지존과 함께 나타나다니...!
이 때였다.
"만독오좌! 동행을 데리고 오지 못한다는 규칙을 잘 아실 텐데 무슨 일이죠?"
천년마후가 만독지존을 바라보며 싸늘한 교갈을 내질렀다.
츠으...!
그녀의 교구에서는 가공할 마기가 일어 일시에 지존각을 뒤덮었다.
그 모습에 만독지존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저 어린 계집이...!'
그은 내심 당장이라도 천년마후를 때려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서열상 자신은 엄연히 천년마후의 하수였기 때문이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
"허허! 오해하지 마시오. 이 아이는 최근에 건둔 제자인데...

재질이 특출하여 군림지존 회주께 첩으로 바칠까 하여 데려온 것 뿐이외다."
"흥! 회주께서... 기뻐하시겠군."
천년마후는 못마땅한 듯 표독스럽게 일갈했다.
이어 그녀는 홱 고개를 돌리며 만독지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저... 저 계집이...!'
만독지존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천년마후의 노골적인 경멸의 태도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화를 억눌러 참았다.
"...!"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벽안신녀를 바라보던 군검풍의 눈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어렸다.
'약물에 중독되어 만독지존에게 이지를 제압당했을 뿐, 이상은 없다!'
그는 백옥상이 무사함을 알아내고는 아무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 때였다.
"녠! 신비대형(神秘大兄)이 오시는군."
문득 은환종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창 밖을 주시했다.
군검풍은 그 말에 내심 의아함을 느꼈다.
'신비대형? 은환종이 대형이라 부르는 인물이 있다니...!'
그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이어, 중인들과 더불어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츠으으...!
창문 밖은 온통 지옥흑무가 자욱하게 허공을 뒤덮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세 명의 인물이 신인(神人)인 듯 다가서고 있었다.
일 인만으로도 능히 천 리를 뒤덮을 패기를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선두를 지키고 있는 인물은

전신이 온통 신비로운 강무에 덮인 한 명의 신비검수였다.

그는 미끄러지듯 허공을 건너 낙영탑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군검풍은 그를 일견한 순간 크게 놀랐다.
'저런 인물이 있다니...!'
갑자기 그는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어떤 강렬한 예감과 함께 신비검수의 장쾌한 기도가

그의 전신을 완전히 압도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이때 다시 천년마후의 전음이 군검풍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 사람은 신비종(神秘宗)이에요.

천하 백만은자들의 우상이며 모든 것이 비밀속에 가려진 신비제일인이에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군검풍은 내심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신비종...!'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인물에게 강한 관심과 이끌림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천년마후의 전음이 그의 귓전에 다시 이어졌다.
"그는 서열십위이지만 십존중 가장 무서울지도 모르는 인물이예요.

그 옆의 문사가 바로 천패...!"


듣고 있던 군검풍이 이번에는 천년마후의 전음을 끊었다.
"알고 있소!"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전음을 보내며 신비종 좌측의 인물을 주시했다.
그는 군검풍이 잘 아는 인물이었다.

바로 천패마종(天覇魔宗) 남궁무외였던 것이다.
군검풍은 남궁무외를 바라보며 뜻밖이라는 눈빛을 지었다.
'남궁노형도 십존의 일 인이라니...!'
그것은 그가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었다.
이어 그는 신비종 우측의 인물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군검풍은 흠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저것은...!'
일순 그의 눈에서 강렬한 뇌전이 흘렀다.
신비종 우측의 인물은 일견하기에 문약해 보이는 백삼문사였다.
그는 사해지존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초탈하고 청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군검풍이 놀란 것은 백삼문사의 외형적인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는 하나의 고금이 안겨 있었다.

그 고금이 군검풍의 피를 달아오르게 한 것이었다.
'저것은... 천형신금(天形神琴)이다. 고금제일음병(古今第一音兵)...!'
군검풍은 가슴이 거세게 격동하는 것을 느끼며 기광을 번뜩였다.
백삼문사가 안고있던 고검을 군검풍이 단번에 알아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전일 묘강 만수천형곡에서 만수천형존(萬獸天形尊)이

위지대영이란 효웅에게 상실했던 절세신병이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것을 백삼문사가 지니고 나타난 것이었다.
군검풍은 대뜸 직감했다.
'저 자는... 위지대영이다!

내내의 아버지이며 만산제일가(萬山第一家) 악가(岳家)를 망친 배후자다.'
이렇게 판단한 그의 두 눈에 은은한 살기가 흘렀다.

내내와 그의 모친을 생각하자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살기를 느낀 것이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위지대영을 일장에 쳐죽이고 싶었다.
천년마후는 군검풍이 살기를 떠올리는 모습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예리한 눈빛은 군검풍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 놓치지 않고 읽고있었다.
그녀는 군검풍에게 주의를 보내왔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나 진정하세요. 자칫 불패천황의 의심을 살 수도 있어요!"
군검풍은 흠칫하며 그제서야 감정의 격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천년마후의 경고는 그의 흥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그는 얼른 두 눈에서 살기를 거두며 담담한 신색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계속하여 천년마후의 설명이 들려왔다.
"그는 천음존자(天音尊子)라는 인물이에요. 음공에서는 가히 무적이죠.

또한, 만수만금을 다스리는 만산(萬山)의 제왕(帝王)이기도 해요."
그녀가 설명하는 사이, 삼 인은 신비종을 필두로 지존각 안으로 날아들었다.
"늦었소이다, 제존(諸尊)!"
신비종이 삼 인을 대표하여 좌중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이 때였다.
"핫하! 십좌(十座), 어서오시오."
돌연, 구 인의 등 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헉!'
군검풍은 대경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이 일변했다.
언제 나타났단 말인가?

한 명의 인물이 상좌에 오연히 앉은 채 중인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일신에 핏빛 혈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황금의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또한 보홀(寶笏)과 함께 한 자루 보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제왕(帝王)의 풍도를 그대로 지닌 중년인이었다.
패기와, 마기, 사기, 그리고 정기(正氣)까지,

그는 일 인이 지니기에 벅찬 모든 것을 한 몸에 다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기도를 지녔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그 인물이 앉은곳은 바로 지존제일좌(至尊第一座)였다.

그곳에 앉을 수 있는 자는 단 일 인 뿐이었다.
'군림지존(君臨至尊)!'
군검풍은 그를 보는 순간 터지려는 신음을 간신히 억늘러 삼켰다.

그의 가슴은 급격히 경동하며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군림지존-!
암흑 속에 천하무림을 지배하는 암흑의 제왕!

드디어 그와 상면한 것이었다.
"회주를 뵈오이다!"
"회주! 강년을 경하드리오!"
군효들은 일제히 일어나며 군림지존을 향해 포권했다.
"제위들과 무사히 대면할 수 있어 기쁘오!"
군림지존은 침참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답례한 후 다시 좌정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비로소 군효들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 좌정했다.

이 자리에 모인 십 인은 하나같이 천하를 떨어 울리는 초강자들이었다.
가장 약하다는 천패마종 남궁무외가 천하제일패라 불리는 정도였니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인간으로서 최극의 경지에 이른 십 인.

그들이야말로 이미 신의 경지에 육박하고 있는 최고의 인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한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의 내심만은 전혀 일치할 수 없었다.

각기 지닌바 야심과 품은 뜻이 너무 컸고,

하나가 되기에는 너무 강한 절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
"...!"
좌중에 모인 십존 사이에는 잠시 숨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선뜻 그 침묵을 깨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간의 침묵을 방치하고 있던 군림지존이 비로소 먼저 그 침묵을 깨뜨렸다.
"이번 우리 혈맹십존(血盟十尊)의 성회는... 예년의 성회와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성회요."
"...!"
"...!"
중인들은 말없이 군림지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군림지존은 중인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천천히 그러나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