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폭풍세가

제23장 전화위복(轉禍爲福)

오늘의 쉼터 2014. 10. 1. 00:17

 

제23전화위복(轉禍爲福)


 

 

십전마혜 을유향의 앞쪽에는 하나의 거대한 지하공동(地下空洞)이 자리하고 있었다.

헌데 그 지하공동 일대는 온통 자욱한 핏빛 운무만이 가득하게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핏빛의 지옥혈무(地獄血霧)속에는 한 명의 인물이 눈을 감은채 정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인물은 놀랍도록 장대한 체구의 거인이었다.

앉은 키만 해도 일장에 달하는 거구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자의 몰골은 실로 흉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가지 온통 피에 젖어있는 것처럼 시뻘건 핏빛으로 뒤덮인 괴인이었다.
가공할 사기(邪氣)의 파동은 바로 그 괴인에게서 비롯되고 있었다.
"지옥....사황(地獄邪皇)!"
을유향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뱉아냈다.


-- 지옥사황!


천사일맥의 당대종주이며, 천사종과 지옥사종을 합일시킨 천년제일사종(天年第一邪宗).

그자는 신비의 지존십좌(至尊十座) 중 서열팔위의 인물이었다.
을유향은 긴장된 안색으로 지옥사황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자는 천사절기와 지옥혈공을 합일시켜 절대사종경에 육박하고 있다!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불사무적(不死無敵)이 된다!'
그녀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솟아났다.

그와 함께 그녀의 눈동자가 네 개로 나타났다.

그 네 개의 눈동자는 무서운 투지의 불꽃을 일으켰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번쩍!
감겨있던 지옥사황의 두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

그러자 마치 피빛의 창같은 두줄기의 강렬한 안광이 그자의 떠진 두 눈에서 터져나왔다.
"흐윽!"
그 피빛 안광을 직시한 을유향은 눈알이 터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고 휘청 물러섰다.
"크녠! 감히 나 지옥사황을 해하려 들다니...!"
웅웅...!
직후 지옥사황의 음울하고 사악한 웃음소리로 지하공동이 온통 진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능히 심혼을 제압할 수 있는 가공할 마력이 담긴 음성이었다.
"크... 흐흐! 나의 눈을 보아라 계집!"
지옥사황이 두눈을 무섭게 빛내며 명령을 내렸다.
"음...!"
을유향은 충격을 받은 듯 신형을 휘청거렸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그녀에게 몰려왔다.
지옥사황의 섬뜩한 혈안(血眼)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 눈을 마주본 을유향은 마치 자신의 심령이

지옥사황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천뇌마맥의 후예인 나 십전마혜 을유향의 심령마저 제압당할 정도라니...!'
을유향의 교구는 경악과 공포로 연신 부들부들 떨렸다.
이때 지옥사황의 입에서 악귀가 울부짖는 듯한 섬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크크... 들어라! 나는 유계(幽界)의 제왕이며 네 영혼의 주인이다!"
"아...!"
콰쾅...!
천개 만개의 핏빛 번개가 을유향의 전신을 강타해 왔다.
범인이라면 그 혈전 하나에만 살짝 스쳐도 여지없이 심혼이 제압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을유향은 저 천뇌마맥의 적손이었다.

그녀는 가공할 사념에 휘말리면서도 한 가닥 이성 또한 잃지 않고 있었다.
'제압당한 척 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사황의 사념이 점점 배가되어 도저히 당할 수 없게 된다.'
내심 빠르게 염두를 굴린 을유향. 그녀는 황망히 눈빛을 흐트렸다.
"크녠... 이리 오라! 너는 나 지옥사황의 종이니...!"
츠으...!
득의에 찬 지옥사황의 음성과 함께 일순 강렬한 흡력이 을유향의 전신을 휘감아왔다.
'최후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을유향은 짐짓 눈빛을 흐트린 채 지옥사황의 사념과 맞서며 모든 공력을 좌수로 모았다.
츠으... 우르르...!
그 사이, 그녀의 신형은 지옥사황의 공력에 휘말려 점점 앞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지옥사황의 일장 앞까지 끌려왔다.
"크녠!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나...

네 년을 지옥마혈(地獄魔血)의 제물로 삼겠다!"
을유향이 자신의 사념에 제압당했다고 믿은 지옥사황은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흡족해했다.

그같은 만족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여 틈을 보이고 있었다.
을유향은 점점 지옥사황의 앞으로 가까이 끌려가

마침내 지옥사황의 앞석 자 거리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죽어랏! 사황!"
번...쩍!
그 순간,

을유향의 초점없이 멍하게 풀린 눈이 돌연 천 개의 화산이 터지듯 가공할 안광을 토해냈다.
꽈르릉...!
그와 동시에, 그녀의 좌수에서 선종(仙宗) 비전의 대라천강이 벼락같이 쏟아졌다.

엄청난 폭음이 장내를 뒤흔들며 터져나왔다.
"악!"
날카로운 비명이 그 폭음속에 회오리쳤다.
콰르르... 콰쾅!
"크윽...!"
반격을 후려친 을유향과 기습당한 지옥사황은 다 함께 신음을 터뜨리며 뒤로 퉁겨졌다.
지옥사황의 가슴에는 을유향이 내친 장인(掌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지옥사황을 가격한 을유향의 좌수는 온통 피범이었다.

지옥사황의 호신강벽은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결과는 판가름나지 않았다.
"캇! 제압당하지 않았었다니... 괘씸한 계집이구나!"
콰...아!
다시 지옥사황의 전신에서 엄청난 사강풍이 일었다.
"캇! 네년을 오체분시하리라! 뒈져라!"
다시금 놀라운 사공이 펼쳐지며 장내에 거대한 아수라의 형상이 일어났다.

이어, 그것은 가공할 힘과 속도로 을유향을 뒤덮었다.
'맞받을 수 없다. 너무 강하다!'
을유향은 안색이 핼쓱하게 질렸다.

그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번...쩍!
갑자기, 천정 저편에서 가공스런 무형검기가 섬전같이 쏘아져 왔다.
쩌정...!
"어엇!"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엉겁결에 내친 지옥사황의 호신강벽은 허무하게 찢어져 버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크아악!"
처절무비한 비명이 지옥사황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가슴에 검기를 관통당한 것이었다.
콰쾅!
검기에 관통당한 지옥사황의 처절비명이 터지는 순간,

그의 신형은 뒤로 거칠게 퉁겨져 그대로 석벽에 박혀버렸다.
지옥사황의 가슴에는 어느새 한 자루 투명한 장검이 관통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투명심인검(透明心刃劍)이었다.

독종지검인 절대독병.

바로군검풍의 애병이 아닌가!
"우우!"
직후 한소리 낭랑한 장소성과 함께

한 줄기 흑영이 흡사 섬전처럼 지하동부 저편에서 떠올랐다.

그곳은 바로 막강한 검기가 쏘아온 곳이었다.
장소성의 주인은 물론 군검풍이었다.
그의 안색은 다소 피곤에 지쳐 보였다.

그리고 그의 등에는 군검풍의 장포로 감싼 낙봉군주 주금예가 업혀 있었다.
을유향은 그 광경에 다시 묘한 질투심을 느끼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바람둥이...!"
쿵...!
하지만 그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크... 독황야였단 말이냐?"
이때 지옥사황도 고통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심장에 꽂힌 투명심인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만독의 정화로 이루어진 투명심인검에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아직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지옥사황은 설사 군검풍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초강자였다.
다만 그는 을유향에 대한 분노로 인해 주의력이 산만해진 상태에서

군검풍의 어검술에 기습을 받았을 뿐이었다.
또한 군검풍이 던진 투명심인검은 천고기병이었다.

그것은 지옥사황의 사종지체(邪宗之體)를 깰 수 있는

고금오대천병(古今五大天兵) 중 일병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옥사황을 쓰러뜨리게 했을 뿐이었다.

만약, 투명심인검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를 쓰러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지옥사황은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이어 그는 가슴에 박힌 투명심인검을 뽑았냈다.
"크으!"
촤아...!
투명심인검이 뽑히자 섬뜩한 청혈(靑血)이 폭포같이 그의 심장에서 쏟아져 내렸다.
"크크크... 혼자 죽지는 않겠다! 오라!"
쩌정!
지옥사황은 석벽에 박힌 채 투명심인검으로 군검풍을 가리켰다.
"어엇!"
화드득...!
오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군검풍이건만

그는 어이없이 지옥사황의 접인마력에 휘말려 끌려갔다.
"상공!"
그 광경에 을유향이 대경하여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녀는 당황하며 황급히 지옥사황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군검풍이 급히 그녀를 저지시켰다.
"금예를 데리고 물러서시오!"
휘익!
군검풍은 재빨리 등에 업힌 주금예를 을유향에게 내던졌다.
"안 돼요!"
을유향은 날아오는 주금예를 잡아채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군검풍은 주금예를 던지는 순간,

그대로 지옥사황이 내뻗은 투명심인검을 향해 무섭게 부딪쳐갔기 때문이었다.
"우!"
군검풍은 다급한 함성을 터뜨렸다.
쩌정!
그의 좌수가 불쑥 튀어나와 투명심인검의 검날을 잡아갔다.

그의 좌수에는 어느새 검은빛의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바로 잠형묵린갑이었다.
쩌...정! 카캉!
다음 순간,

가공할 금속성과 불꽃이 동시에 일어났다.
투명심인검의 검날이 군검풍의 좌수에 잡혔다.

잠형묵린갑이 보호하고 있었지만 투명심인검의 검날은 그의 손바닥을 파고 들었다.
"크... 오냐! 내부를 산산이 부수어 주마!"
지옥사황은 최후까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투명심인검을 통해 군검풍의 내부에 막강한 사기를 쏟아넣었다.
콰콰...!
"크읏!"
군검풍의 몸 속으로 가공할 사종지기가 투명심인검을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크윽...!"
군검풍은 내부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반불사지체인 군검풍이건만,

지옥사황의 사종지기가 그의 내부를 무참히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상공!"
보고있던 을유향은 울음 섞인 안타까운 외침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는 감히 군검풍의 옆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때, 군검풍은 정신이 아득하게 흐려지는 와중에도 한 가지 구결을 떠올리고 있었다.
'투명심인검을... 거둬들여야 한다!'
심인수혼검결(心刃搜魂劍訣)-!
바로 투명심인검을 다시 팔 속으로 흡입시키는 기절검결이었다.
"어헉!"
한 순간, 지옥사황은 아연실색했다.
츠으...!
별안간 투명심인검이 군검풍의 팔 속으로 얼음 녹듯이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광경은 기이하고 신비롭기 이를데 없었다.
지옥사황은 두 눈 가득 혈광을 번뜩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바득, 오냐! 투명심인검과 함께 사종지력도 함께 넣어 박살내주마!"
츠으...!
이어 그는 백 년 동안 고련했던 천사종과

지옥종 양파의 모든 사종지력을 군검풍의 몸에 쏟아 넣었다.
"크으..."
군검풍은 투명심인검과 함께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거대한 사념을 느끼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했다.

그는 오공과 팔만사천모공에서 피를 토해냈다.


-- 역천파멸강(逆天破滅剛)!


지옥종과 천사종의 역천사공이 합일된 것으로

천지지간에서 가장 잔혹하고 끔직한 공력이었다.
콰콰...!
군검풍은 거의 혼절 상태였다.
"...!"
그는 투명심인검을 반쯤 거둬들인 채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죽여주맛! 캇캇...!"
쩌정!
지옥사황은 득의의 괴소를 흘리며 최후의 본원진력까지 쏟아냈다.

그러자 바로 그때 군검풍의 내부에서 어떤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
불사강력(不死剛力)!
바로 불사용수의 잠력이 역천파멸강의 자극에 의해 깨어난 것이었다.
"비... 빌어먹을... 끊질긴 놈이군!"
지옥사황의 안색이 허옇게 시체같이 변했다.

그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은 희망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자신의 마지막 진력까지 쏟아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마지막으로 택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뿐이었다.
"카카캇! 같이... 무저지옥갱(無底地獄坑)에 묻히자!"
콰득...!
지옥사황은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이어 그는 석벽에 박힌 몸을 빼내 벼락같이 군검풍에게 덮쳐갔다.
군검풍에게 덮쳐간 지옥사황은 그와 몸이 한덩어리가 되어 한쪽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곳은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뻗어있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무저지옥갱 아래였다.
"안 돼!"
휘익!
을유향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군검풍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쾅!
돌연, 하나의 거대한 고묘(古墓)가 폭음과 함께 박살났다.
"우우...!"
그 폭음속에 섞여 날카로운 교갈이 터져나왔다.

이어 한 가닥 왜영이 일남일녀를 옆에 끼고 봉분에서 솟구쳐 올랐다.
왜영은 바로 을유향이었다.

물론 그녀가 구해낸 두 남녀는 검풍과 주금예였다.

군검풍과 주금예는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 때였다.
"지존!"
"아앗, 지존!"
스슥! 휙!
어디선가 염려와 근심이 가득한 여인들의 외침이 잇달아 들려왔다.

이어, 두 줄기의 크고 작은 인영이 나타났다.
때는 여명 무렵이었다.
여명의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두 줄기의 크고 작은 인영들,

그들은 마치 놀란 기러기처럼 떠올라 을유향에게로 날아왔다.
그들은 물론 철라영과 부운선, 그 두 사람이었다.
그녀들은 죽은 듯 미동도 하지않는 군검풍을 바라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어찌된 것이죠?"
"당신은 누군가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소녀의 물음이 동시에 터졌다.
을유향은 사뿐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
그러자 철라영과 부운선도 그녀의 양 옆으로 따라내렸다.
을유향은 창백하게 질린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어서 이 바람둥이와 우리를...낙일황부(落日皇府)에..."
간신히 그 한마디를 내뱉은 을유향은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스르르...!
그녀는 마침내 고목이 쓰러지듯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지존!"
철라영은 땅에 눕혀진 군검풍을 안으며 걱정스럽게 외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전혀 거녀성주답지 않았다.

그저 섬세하고 나약한 여인의 모습일뿐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정인을 염려하는 여인의 지고지순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영문을 모르겠으나.. 이 아이의 말대로 어서 낙일황부로 가자!"
이때, 부운선은 애써 침착한 얼굴로 철라영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녀의 내심도 철라영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이윽고 철라영이 을유향과 주금예를 안고 부운선은 군검풍을 안은 채 몸을 날렸다.
스슷...! 슥!
"지존... 돌아가지 마세요!"
철라영은 몸을 날리면서도 찔끔찔끔 눈물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군검풍과 네 여인들이 사라지고난 뒤였다.
"흐윽...! 군검풍! 네가 할아버지를 시해하다니...!"
별안간 통한이 서린 여인의 울음이 터졌다.
그그긍...!
이어 하나의 고묘 앞의 묘석이 옆으로 움직이며 하나의 밀로가 나타났고
그 안에서 한명의 절세미녀와 네 명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앞선 여인은 전신이 요염하고 사악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더불어, 지극히 농염한 교태를 지닌 미녀였다.
사황귀비 자옥경!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뒤를 호위하는 네 여인들은 물론 사황사염이었다.
아직도 군검풍과의 열풍이 식지 않은 탓일까?

자옥경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한 가닥 홍조가 깃들어 있었고,

하체는 고통으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바득... 죽인다! 가장 처절하게 죽일 것이다.

나 자옥경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나쁜 자식!"
자옥경은 입술을 꼭 깨물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주르르...
그러나 그 눈물의 의미는 각각 다른 대립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미움과 애정...원한과 연모의 모순이 그녀의 눈물속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옥경은 눈물이 맺힌 눈길로 군검풍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원앙환의고를 발동시켜 간단히 죽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다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두고봐라! 어떤 짓을 해서라도 네놈을 죽여 천사일맥의 분노를 보여주겠다!"
츠으...
다음 순간, 자옥경은 사황사염과 나란히 신형을 허공으로 떠올렸다.
콰쾅...!
쩌정...!
그 순간, 돌연 북망산 전체가 뒤흔들리며 엄청난 굉음이 터져올랐다.
콰르르... 쾅!
수천 개의 봉분이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침몰했다.
그것은 분노를 삭이지 못한 자옥경의 무서운 손속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의 일장에 의해 북망귀왕부는 무참히 박살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이는 하룻밤의 광풍이 몰고온 어마어마한 사태였다.

하지만, 광풍의 흔적으로 풍지박산난 북망산역 위로 서서히 햇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햇살은 밝고 투명했다.

언제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누리를 비추고 있었다.


전운(戰雲),
가공할 전운이 북서로부터 몰려와 천하를 뒤덮기 사작했다.

그 내막은 대략 이러했다.


-- 초원(草原)의 전설 적붕존성이 옥문관을 향해 남하 중,
변황무림은 적붕존성을 중심으로 사상 최강의 변황무맹 새황적붕맹(塞荒赤鵬盟)을 결성했다.
-- 새황적붕맹의 고수자는 백만, 그들이 창검의 기치를 들면 장성 밖 만리가 뒤덮인다.
-- 아무도 막지 못하리라, 새황적붕맹을! 패왕궁이든...

제왕맹이든 십패천, 대정팔극세 모두가 부활한다 해도.
-- 범중원무맹(凡中原武盟)이 결성되기 전에는 그 무엇도 새황적붕맹을 막지 못하리라.
-- 범중원무맹이 결성된다 해도 중원은 새황적붕맹에 패할 확률이 높다.
저 대초원의 제왕 적붕천존을 막을 초강자는 없을 테니까...
-- 결국 중원은 대파멸을 당하리라. 새황적붕맹의 말발굽 아래.


<새황적붕맹(塞荒赤鵬盟)>


구주가 그 이름에 전전긍긍했으며, 팔황이 그 적붕천번(赤鵬天幡)에 앙복하였다.


-- 적붕천존(赤鵬天尊) 철목천!


그 이름은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진 중원에 대한 변황의 도전 중

가장 거대하고 가장 위협적인 이름으로 부각되었다.
강북(江北)의 패왕궁(覇王宮)과 강남(江南)의 제왕맹(帝王盟).

남북이패(南北二覇)로 분할당해 그나마 간신히 평화를 유지해 오던 중원무림은

이제 그 평화마저 송두리째 빼앗겨야만 했다.
새황적붕맹...
적붕천존 철목천!
대전운(大戰雲)은 장성(長城) 밖에서 임박하고 있었다.


<낙일황부>


어느날 아침, 한 마리 맹룡이 낙붕군주 주금예를 데리고 낙일황부로 날아들었다.
그 날을 기해 일 년간 암운이 끼었던 낙일황부의 불행은 일시에 제거되었다.

그리고, 낙일황야의 노안에 다시 호탕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공공연히 측근들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 헛허... 인간사 참으로 새옹지마일세.

잃었던 딸을 되찾고 사위까지 얻다니 이 얼마나 홍복인가?


아침.
낙일황부의 후원에는 신비하고 자욱한 자하(紫霞)가 흐르는 원시림이 펼쳐져 있다.
그 중 특별히 아름답게 지어진 하나의 누각이 눈에 들어온다.
"...!"
군검풍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누각에 선 채 원시림 사이의 인공호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찬란한 아침 햇살이 그의 새하얀 백삼 위로 부서져 내렸다.
군검풍의 뒤에는 자면(紫面)에 강궁(强弓)을 멘 한명의 장한이 부복한 채
군검풍에게 무엇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총수 벽안신녀께서는 분명 만독지존(萬毒至尊)이란 자가

사사독마갱의 공격시 묘강 군역에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자면신장이었다.
"독황군단은 총수의 명에 의해 만독지존과의 대전 피해를 복상하였고,

그 과정에서 벽안신녀께서 실종된 듯 합니다."
그는 지금껏 벽안신녀의 종적을 탐색하던 중이었다.
벽안신녀 휘하 일천독황군단과 중원에 산재한 사독마맥 십만강병의 건재는 확인되었다.

그들은 독황군단이 주축이 되어

묘강 사사독마갱의 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실종된 벽안신녀의 종적만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군검풍은 자면신장의 보고를 듣고 내심 생각에 잠겼다.
'최후의 가능성은 두 가지다.

백소저가 만독지존과 충돌하여 전사했거나 아니면 만독지존에게 제압당했든지...'
그는 침중한 눈빛으로 호수에 떠있는 수련을 바라보았다.
화중제후(花中帝后)로 불리는 연(蓮).
그 모습이 군검풍의 눈에는 흡사 최강의 여전사

벽안신녀 백옥상과 같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무쪼록 후자이기를 바랄 뿐이다.

어떤 처참지경에 빠졌더라도 내가 은혜를 갚을 가능성은 있으리라...!'
군검풍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이어 그는 자면신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장, 수고했네. 대파산 십천제왕성으로 가도록 하게.

가서 사사독마갱의 재건을 도와 주도록 하게."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자면신장은 공손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융천신마룡은 두고 가도록 하게. 그 녀석을 타고 갈 곳이 있으니까."
"예! 하오면...!"
자면신장은 대례를 올린후 즉시 물러갔다.

군검풍은 누각의 중앙 탁자 앞에 좌정했다.

그곳에는 몇 가지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사황천종경, 지옥혈경, 그리고 황금단극과 흑호비도 등이었다.
문득 군검풍은 나직하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자옥경에게는 못할 짓을 했다.

지옥사황은 누가 뭐라해도 그녀에게는 단 하나 뿐인 친인인 것을...!"
그는 지옥사황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황귀비 자옥경에게 죄책감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군검풍은 북망귀왕부에 들기 전보다 두 배 강해진 상태였다.

지옥사황이 군검풍을 죽이려고 불어 넣었던 역천파멸강은

군검풍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내공과 합일된 상태였다.
악연(惡緣)이랄까?
군검풍은 삽시에 지옥사황만한 사도최강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직 역천파멸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내공을 삽시에 십 갑자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

그 경지는 거의 무적지경이었다.
과연 천하에 군검풍에 필적하는 내공을 지닌 자가 몇이나 있을 것인가?
이 때였다.
사르르...
가볍게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며 군검풍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금예...!"
그는 뒤돌아보며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그의 뒤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화사한 궁장차림의 소녀가

옥용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서 있었다.
군검풍조차 모르도록 다가설 수 있는 여인은 천하에 단 한 명 뿐이었다.
낙봉군주 주금예,
바로 그녀였다.

자기도 모르게 천년사후가 된 낙일황야의 천금.
그녀는 무적여제(無敵女帝)가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무림인이기보다 평범한 군검풍의 아내가 되기를 더 원하는 여인이었다.
"전청에 드시지 않으시기에 조반을 가져왔어요."
주금예는 군검풍의 앞에 살며시 들고온 소반을 내려놓았다.
소반 위에는 몇 가지 되지 않았지만

정갈하고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정성껏 차려져 있었다.

그 하나하나는 주금예가 군검풍은 위해 정성을 다해만든 음식들이었다.
"하하... 맛있어 보이는데...!"
군검풍은 미소 지으며 수저를 들었다.
"...!"
그런 군검풍을 주금에는 홍조를 띄우며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흡사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아아,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이대로...!'
주금예의 봉목이 꿈꾸듯 촉촉히 젖어들었다.

그런 그녀의 해맑은 옥용으로 아침 햇살이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운중산(雲中山).
산서(山西) 북단에 위치한 험험고산이었다.

사철 자욱한 운무로 뒤덮여있어 운중산이란 이름이 붙어졌다.
운중산은 거의 인적이 닿지 않는 신비의 산이었다.


초여름.
싱그러운 수목의 계절이었다.
우르르...
문득 멀리서 우뢰성이 들려왔다.

곧 폭우라도 쏟아질 둣 하늘에는 묵운(墨雲)이 잔뜩 밀려오고 있었다.

운중산 전체는 암운으로 뒤덮여 앞을 분간키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 때였다.
고오...!
한 소리 굉음이 남천(南天)의 저편에서 들려왔다.
이어 묵운 사이로 한 마리의 거대한 익룡이 나타났다.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무려 삼십 장에 달하는 그놈은 바로 융천신마룡이었다.

융천신마룡의 등에는 군검풍이 타고 있었다.
"흠... 벌써 사흘째다. 흑호(黑湖)라는 곳이 운중산에 있기나 한지 모르겠군."
군검풍은 융천신마룡의 날개 밑으로 운중산역을 내려다 보며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흑호(黑湖)>


그것은 북망귀왕부에서 얻은 흑호비안(黑湖秘眼) 속의 신비호(神秘湖)였다.

흑호비도는 분명 흑호가 운중산에 있다고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검풍은 사흘 내내 융천신마룡을 타고 운중산을 뒤졌으나

흑호는 고사하고 보통 호수 하나 찾지 못했다.
군검풍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신(魔神)! 북서(北西)로 다시 한 번 가보자. 그곳에도 없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고오...!
군검풍의 말에 융천신마룡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콰콰...!
이어 그놈은 거대한 선풍을 일으키며 이내 북서로 사라졌다.

그런데,

"....!"
하나의 고봉(高捧) 위에 누군가가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우뚝 선 채 사라지는 군검풍과 융천신마룡을 주시하고 있었다.
츠으... 츠으...!
전신이 온통 환몽인 듯한 신무(神霧)로 뒤덮인 그 인물에게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한 쌍의 사자안(獅子眼)과 막강한 패기를 흘리는 한 자루 고검(古劍)뿐이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고검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신비패검(神秘覇劍)이라 불리는 고금오대천병(古今五大天兵)의 일병이었다.
"흠! 이 영감(靈感)의 파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문득 뿌연 안개에 싸인 괴인은 기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융천신마룡이 사라진 북천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융천신마룡의 등에 나의 친인이 타고 있는 느낌이 들다니.."
그는 나직이 침음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씁쓸한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후훗! 친인이라니...나 뇌모(雷謀)에게도 친인이 있단 말인가?"
뇌(雷)...신비인은 아마도 뇌가(雷家)인 듯했다.
그 때였다.
"핫하... 신비대형(神秘大兄). 먼저 오셨군요!"
문득 한 소리 호탕한 웃음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이어 선풍을 타고 한명의 인물이 신비인의 앞으로 날아 내렸다.
그는 일신에 자포(紫袍)를 걸친 인물이었다.
장대한 체구에 뇌전인 듯 막강한 패기를 흘리는 패웅의 눈을 지닌 중년문사.


-- 천패마종(天覇魔宗) 남궁무외.


그 인물은 바로 천패마종 남궁무외가 아닌가?
십패천중 패왕궁의 궁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패웅(天下第一覇雄)!
그는 군검풍에게 북망귀왕부로 가도록 암시를 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어찌 이곳에서 나타났단 말인가?
또한 천하의 천패마종이 대형(大兄)이라 부르는 신비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신비인은 천패마종을 바라보며 고소를 지었다.
"대형이라니... 남궁형은 종종 십존(十尊) 서열을 잊는구료.

나 신비종(神秘宗)은 십존서열의 십 위이고 마종은 십존서열 구 위라는 것을 말이오."
그러나 그 말에 천패마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나 남궁무외에게 대형이라 불릴 분은 신비대형 뿐입니다."
"마종은... 만날 때마다 본인을 곤란스럽게 만드는구료."
천패마종은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시간나면 멋지게 한 잔 내지요."
"좋소이다. 우선 탑(塔)으로 갑시다. 다른 팔존(八尊)이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르니..."
"그러지요."
스슥...슥!
이 인은 이내 훌훌 허공으로 날아 오르더니

평지를 걷듯 산곡 사이의 자욱한 안개를 밟으며 나갔다.
그들이 가는 곳, 그곳은 북서(北西)쪽이었다.

바로 군검풍이 융천신마룡을 타고 사라진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