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폭풍세가

제20장 여제천모(女帝天母)의 초야(初夜)

오늘의 쉼터 2014. 9. 30. 16:20

 

제20장 여제천모(女帝天母)의 초야(初夜)


 

 

밤은 깊을대로 깊어 있었다.

십천제왕성은 깊은 어둠과 적막 속에 잠겨 평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여제천궁의 내실.
군검풍은 쉽게 잠이 올것같지 않아 책을 읽고 있었다.
사르륵...!
문득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한밤의 고요를 마세하게 흔들었다.
군검풍은 옷자락 스치는 소리에 흠칫하며 책에서 시선을 뗐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저...신첩이에요."
문 밖에서 다소곳하고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어 방문이 열리며 한 명의 미인이 사뿐 안으로 들어섰다.
뜻밖에도 여인은 여제천모 나후란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오늘밤 따라 유난히 아름다웠다.

곱게 성장한 그녀의 모습은 가히 선녀(仙女)가 무색할 정도다.
농염한 아름다움과 은은한 기품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서 향기처럼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실내에는 그윽한 체향이 가득하게 느껴졌다.
나후란은 섬섬옥수로 찻잔을 받쳐들고 있었다.
군검풍은 나후란의 때 아닌 방문에 의외로운 듯 입을 열었다.
"천모! 야심한데 자지 않고 어쩐 일이오?"
"..."
나후란은 옥용을 발그레 붉히며 들고온 찻잔을 탁자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어 그녀는 다소곳한 자태로 침상에 걸터앉았다.
"잠자리가 적적하실까봐 모시러 왔어요.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떨구어 버렸다.
"..."
군검풍은 나후란의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 놈의 팔자는... 한시도 여난을 벗어날 수 없군.)
그는 당혹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문득, 그의 뇌리로 십절천마후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 모든 환락을 네게 주겠다. 본후를 구해준 대가로...!


"으음...!"
군검풍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그는 가만히 나후란의 턱을 받쳐 들었다.
"천모는 아름답소."
"지존...!"
나후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그 사이로 맑은 이슬이 흘러내렸다.
군검풍의 그 말은 곧 자신을 허락한다는 뜻이 아닌가?
그녀의 전신에 한 가닥 알 수 없는 전율이 스쳤다.
군검풍은 그런 나후란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후훗! 나는 복이 많은 놈이오. 천모 같은 좋은 아내를 얻게 되다니 말이오."
문득, 고개 숙인 나후란의 코앞으로 군검풍의 얼굴이 다가왔다.
"...!"
그의 숨결이 나후란의 입술에 닿았다.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입맞춤은 형언할 수 없을만큼 달콤하고 황홀했다.
이윽고, 군검풍은 바르르 떨고 있는 나후란의 교구를 따뜻하게 품어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침상에 누웠다.
"지존...!"

나후란은 군검풍의 육중한 체구에 눌리며 감격과 희열의 미소를 지었다.
군검풍은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 끝에 의해 옷자락이 벗겨져 나갈 때마다 나후란은 마치 뇌전을 맞은 듯 교구를 전율했다.
마침내, 불빛 아래 농염하기 이를데 없는 나후란의 나신이 드러났다.

양지유로 이루어진 듯 희고 매끄러운 살결에는 그윽한 향기가 서려있고
비단보다 보다 보드라웠다.
나후란은 이미 삼십대의 나이였다.

물이 오를대로 오른 성숙한 몸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청백지신을 지키고 있었다.

군검풍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는 평생을 독수공방 해야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군검풍은 나후란에게 있어 더할 수 없이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정신적 희열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인의 품에 안기게 되었으니 더 이상 바랄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오늘 밤 기꺼이 군검풍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나후란은 따뜻하고 넓은 대지(大地)가 되었다.

그녀의 육체는 군검풍에게 더할 수 없이 안락한 쉼터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나후란의 무르익은 육체를 어루만지던 군검풍의 손길이 이윽고 그녀의 하체에 이르렀다.
난생 처음 사내의 손길이 허벅지 안쪽에 닿자

나후란의 미끈한 두 다리가 퍼뜩 경직되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힘을 빼고 군검풍의 처분에 몸을 맡겼다.
군검풍의 뜨거운 손길이 그녀의 꼭 붙어있던 허벅지를 부드러우나 단호하게 좌우로 벌렸다.
"아아...!"
자신의 하체가 부끄럽고도 민망한 자세로 벌려지는 것을 느끼며

나후란은 절로 신음을 흘렸다.
군검풍의 손이 무성한 밀림지댈르 헤치고 그 안의 깊은 계곡을 탐사해들어갔다.

그의 부드러운 손놀림에 비밀의 화원에 숨은 꽃잎들이 경련하며 눈물을 흘렸다.
생경하고도 관능적인 그 감촉에 나후란의 육체는 삽시에 달아올라

뜨거운 샘물이 계곡을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대지가 해빙을 한 것을 확인한 군검풍은 마침내 돌격대를 나후란의 성으로 돌입시켰다.
이미 치밀하게 교란당해 준비가 끝난 나후란의 성채는 일거에 무자비한 점령군에게 유린당했다.
그녀는 무엇인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공이가

자신의 애액을 윤활유 삼아 몸안으로 미끌어져 들언오는 것을 느꼈다.
발끝까지 소름이 끼치는 작령감에 나후란은 잔신도 모르게 군검풍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녀의 벌려세운 미끈한 두 다리가 작살에 궤뚫린 물고기 처럼 퍼득였다.
'뜨...뜨거워!'
나후란은 하체의 틈으로 무언가 뜨거운 불덩이가 자신의 몸안으로 그드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일거에 나후란의 성을 정복한 군검풍은 곧 부드럽고도 완만하게 율동을 일으키기 시각했다.
나후란은 군검풍이 파도를 타며 일렁일 때마다

가장 예민한 부분에서 전해오는 말할 수 없는 감각에 절로 신음을 토했다.
처음의 고통은 곧 사라지고 간지러운 듯 하면서도

몸안의 정수를 다 뽑아가는 듯한 쩌릿쩌릿한 쾌감이

몸의 중심부로부터 사지백해로 흘러가는것이다.
그 야릇한 느낌은 군검풍의 몸짓이 점점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급격히 고조되었다.
"상...상공! 흐윽!"
마침내 나후란은 참지 못하고 희열의 울음을 터트렸다.

군검풍의 몸과 섞이고 있는 그녀의 하체는 절로 물결치듯 울동을 일으켜

군검풍의 행위에 동조했다.
군검풍은 울며 매달리는 나후란을 부등켜 안은 채 한층 행위에 박차를 가했다.
두 남녀는 서로가 하나임을 확인하며 격한 희열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육체로 인해 최상의 기쁨과 쾌감을 얻고 있었다.
나후란은 일찍이 상상할 수 없었던 첫 경험의 아픔마저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며 그녀는 숨막히는 격정에 몸부림쳤다.
밤은 깊은데...
두 남녀는 한 덩어리 불꽃이 되어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몸짓, 그 하나에도 형언할 수 없는 희열과 쾌감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얼마나 신기하고 벅찬 체험인지...


한편 침실 밖에는 세 명의 여인이 당혹한 표정으로 호법을 서고 있었다.
거녀성주 철담온후 철라영,
쾌활림주 극락몽후 교옥령,
천애낭인사주 천애유흔 부운선
여자의 몸으로 구류종사에 드는 절정 여고수들,
이미 오늘 밤의 성스런 의식을 각오한 나후란은

같은 여자들인 그녀들로하여금 여제천궁의 호법을 서게 한 것이다.
이미 알 건 다 아는 그녀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오는 두 남녀의 뜨거운 신음성에 낯을 붉히며 어색한 눈웃음을 교환하고 있었다.
"아아... 상공... 흐윽!"
"천모...!"
침실에서 새어나오는 나후란의 비음섞인 교성에

세 여종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호호...! 곧 소맹주(小盟主)님을 안아 볼 수 있게 될지 모르겠군."
세 여인 중 가장 연장자인 쾌활림주 극락몽후가

소리 낮추어 웃으며 군검풍의 침전을 주시했다.
그 말에 천애유흔 부운선이 교소를 터뜨리며 선수를 쳤다.
"호호! 그러게 말이에요.

소맹주의 유모자리는 제가 점찍어 놓았으니

몽후언니와 온후동생은 넘보지 않은 것이 좋을 거야."
극락몽후는 그 말을 듣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호호! 유모자리가 아니고 지존의 첩자리를 점찍어 놓았겠지."
"언니도 참...!"
천애유흔의 옥용이 부끄러움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황금장극을 비껴 든 철담온후의 옥용에도 한 줄기 홍조가 떠올랐다.
정(情)이 깊고 어둠이 깊어가는 좋은 밤이었다.


"우...!"
문득, 막강한 패기가 실린 장소성이 대파산역 전체를 뒤흔들었다.
"...!"
군검풍은 그 소리에 흠칫하며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때는 사경(五更) 말,
희뿌연 미명 속에 아직은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각이었다.
그의 옆에는 나후란이 희고 매끈한 어깨를 드러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행복감이 충만한 표정이었다.

여인으로서의 행복이 그 얼굴 속에 모두 깃들어 있는 듯했다.
군검풍은 검미를 모으며 중얼겨렸다.
'내가 잘못 들었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장소성은 더욱 가까운 곳에서 미명을 깨며 들려왔다.
"우...우...!"
심혼을 얼어붙게 만드는 가공할 패기가 깃든 장소였다.
군검풍은 번쩍 두 눈을 빛냈다.
"잘못듣지 않았다!"
슥!
그는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상공, 무슨 일이죠?"
나후란이 그제서야 놀란 표정으로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군검풍은 빠르게 옷을 걸치며 말했다.
"그가... 오고 있소."
"그라니요?"
나후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천패마종 남궁형님...!"
"천패마종...!"
나후란의 안색이 하얗게 변색되었다.

그녀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패마종 남궁무외!
그가 누군가?

십패천중 가장 패도적이라는 패왕궁의 궁주인 천하제일패웅이 아닌가?
군검풍은 침중한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남궁형님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단신으로 십만강병속으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을...!'
이때였다.
"지존...!"
창 밖에서 다급한 철담온후의 음성이 들렸다.
"철담온후! 상황은 어찌 되었는가?"
드르륵!
군검풍은 문을 활짝 열며 뜨락으로 내려섰다.
철담온후는 군검풍이 내려서자 한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동방(東方)으로 강적이 내습했습니다.

일 인인데... 삽시에 무적천공과 철기신극존을 쓰러뜨리고 여제천궁으로 접근...!"
그녀의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우... 제왕지존! 어디 있느냐?"
우르르...!
일천 장 밖에서 사위를 뒤흔드는 가공할 함성이 들려왔다.
뒤이어, 분분한 여인들의 외침이 미명의 하늘을 깨며 터져나왔다.
"어디를 난입하느냐?"
"우리 일천여제군단의 시체를 밟고서야 궁으로 들어설 수 있다."
콰...쾅!
우르르...!
마침내 침입자는 일천여제군단과 격돌한 듯 잇달아 굉음이 터져나오며 주위를 뒤흔들었다.
군검풍은 철담온후를 향해 짤막하게 말했다.
"철담온후, 천모를 지켜라!"
"옛!"
철담온후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군검풍은 허공을 밟으며 그대로 여제천궁의 외곽으로 날아갔다.
"상공...!"
이때, 나삼자락으로 가슴을 가린 나후란이

난간으로 나와 군검풍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주시했다.
그녀의 두 눈은 온통 염려의 빛으로 가득했다.

하룻밤 사이 만리장성을 쌓은 그녀,

어느 덧 그녀가 살아있는 목적은 곧 군검풍으로 인한 것이 되어버렸다.


여제천궁의 동방외곽.
콰콰쾅...!
우르르...!
일천대 일의 대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천여제군단,

그 최강의 여전사들은 거대한 병진(兵陣)을 형성하여 일인의 자포장한과 맞서고 있었다.
뇌전 같은 안광을 번뜩이며 막강한 패기를 폭풍처럼 휘몰고 날아든 자포문사.
천패마종 남궁무외, 바로 그였다.
당대제일효(當代第一梟)이자 제일패웅(第一覇雄)!
콰콰쾅...!
"비켜라! 너희 어린 계집들과 다투기 위해 오지 않았다.!"
콰드득!
쩌정...!
천패마종의 일거수 일투족에는 태산을 무너뜨릴 듯한 거창한 장력이 내포되어 있었다.

가공할 강기의 폭풍이 마치 해일인 듯 일천여제군단을 향해 몰아쳐왔다.
그럴 때마다, 천지를 박살낼 듯한 폭음과 굉음이 잇달아 짓터져 울렸다.
"과연... 천패마종답다!"
"바득! 하지만 여제천궁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 모두를 죽이기 전에는...!"
일천여제군단은 천패마종의 공세를 맞받으며 완강하게 방어했다.
이 때였다.
"우우...! 천패마종이 간이 부었군."
"제왕맹을 패왕궁의 안마당쯤 생각하는 것이냐?"
휘르르... 스스...!
사위에서 음엄한 함성과 함께 강자들이 꾸억꾸억 모여들었다.
구류종사와 그들을 수행하는 고수자들과 천지인 삼대밀부의 초강자들이었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천패마종을 수십겹 수백겹으로 에워쌌다.
이때였다.
"물러나랏!"
찌렁찌렁한 일성 폭갈이 혼란한 장내를 뒤흔들었다.
콰르릉...!
그에 이어, 야천에서 새파란 강기에 뒤덮인 한 명의 인물이

벼락같이 천패마종을 휩쓸어갔다.
"지존!"
"물러서라!"
휘르르...츠으...!
일천여제군단은 일제히 외치며 뒤로 퉁겨졌다.
"네가 제왕지존이냐?"
콰쾅...!
천패마종은 무섭게 폭갈을 내지르며 쏘아져 내려 오는 군검풍을 향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의 우수에서 십 장 검형(劍形)이 일어 군검풍을 갈라갔다.
"사라청명강살(沙羅靑冥 煞)...!"
츠으...!
군검풍의 우수에서도 새파란 강전(剛電)이 일어 벽력성과 함께 천패마종을 맞아갔다.
양인의 공격이 서로 정면으로 격돌을 일으켰다.
콰...쾅!
쩌저정...!
천개의 화살이터지는 듯한 경천동지할 굉음이 작렬했다.
동시에, 굉렬한 강풍이 백 장을 휩쓸었다.
그 여파는 실로 얼마나 얼마나 가공스러웠는지 모른다.
"크읏!"
"어이쿠... 피해랏!"
관전하는 군웅들마저 강풍에 휘말려 분분히 밀려났다.
그런 장내의 혼란을 뚫고 낭랑한 군검풍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핫핫! 여전하십니다, 그 괄괄하신 성격은...!"
"으음... 너였구나. 영령이를 울린 못된 놈이 있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겼더니...!
휘르르...!
이윽고 강풍 속에서 군검풍과 천패마종이 마주보며 날아내렸다.
군검풍은 호쾌하게 웃고 있었다.
반면 천패마종은 우는 듯 마는 듯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내로 내려선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를 마주보았다.
군검풍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오히려 젊어지셨읍니다, 남궁형님!"
"으응... 네 녀석이 제왕맹주였구나.

네녀석에게서 제왕맹을 뺏으라고 영령을 보낸 우형이 어리석었다."
천패마종은 낭패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반갑게 두 팔을 벌려 보였다.
"하하! 형님!"
군검풍은 천패마종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검풍! 너무 미끈해졌군.

천하미인들의 방심을 모두 사로잡아 상사병이 생기는 사태를 내겠다."
천패마종도 파안대소하며 군검풍의 손을 마주 쥐었다.

마주친 두 사람의 손길로 뜨거운 정이 오갔다.
그 뜻밖의 광경에 군웅들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어엇! 천패마종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단 말인가?"
"이거 낭패군! 천패마종이 지존의 의형이신 줄 알았다면

십대패왕을 개패듯 쫓아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물러섰던 구류종사와 삼대밀부주들은 당혹함을 금치못하며 낭패의 기색을 지었다.

그들로서는 실로 상상할 수도 없었던 뜻밖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군검풍은 천패마종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잔 하셔야지요. 소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하지만, 천패마종은 그 말에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술은 다음 기회로 미루세. 우형은 급히 갈곳이 있네!"
"이거 섭섭한데요. 몇 년 만에 만났는데...!"
군검풍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운한 기색을 지었다.
그러자, 천패마종은 군검풍의 손을 쥐고 흔들며 말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네."
그 말과 함께 그는 더 지체치 않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시렵니까?"
"음!"
천패마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문득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군검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형과 현제가 가는 길이 서로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틀려 서로 싸우는 일이 더 있어라도 이것을 잊지 말게.

우형이 현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형님...!"
그 말에 군검풍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격동을 느꼈다.
"하하...! 그리고 영령, 그 아이를 더 이상 울리지 말게.

애초에 현제의 첩으로 줄 생각으로 기른 아이였다네.

또 울린다면 다시 찾아와 제왕맹을 들었다 놓을 것이네."
천패마종은 짐짓 군검풍을 향해 눈을 부라려 보였다.
"형님도 참...!"
군검풍은 난처한 기색으로 홀깃 주위를 돌아 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도끼눈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여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벽신후 나후란을 비롯하여, 철담신후, 천애유흔 부운선, 극락몽후 교옥령,

그리고 만능야제에게 안긴 채 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있는 귀여운 소녀 내내까지...
그 숱한 여인들을 본 군검풍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눈길을 둘곳을 찾지못한 것이었다.
이때였다.
"핫하... 영령이를 곧 보낼 테니 알아서 하도록 하게."
츠으... 휘르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천패마종은 야풍을 타고 까마득히 날아올랐다.
군검풍은 고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한 분이시군. 겨우 쫓아낸 골칫덩이를 되돌려 보내겠다니!"
이때, 문득 그의 귓전에 천패마종의 은밀한 전음이 들려왔다.
"은밀히 북망산(北邙山)에 가보도록 하게.

그곳 어딘가에 북망귀왕부(北邙鬼王府)라는 곳이 있고,

그 중에서 천하무림의 안위와 관련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네."
군검풍은 그 말에 흠칫했다.
"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의혹을 느끼며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천패마종은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우우...!"
그의 장소성은 이미 십리 밖에서 터지고 있었다.
군검풍은 검미를 모았다.
'북망귀왕부? 천하무림의 안위에 관련된 단서라니...?'
그는 곤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휘이잉...!
문득, 한 줄기 산풍이 생각에 잠겨 있는 군검풍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빠...!"
이때, 한소리 맑은 소녀의 음성과 함께 앙증맞은 교수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내내였다.
그녀는 극락조 금아를 안은 채 졸린 눈을 비비며 군검풍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군검풍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하하! 이런... 우리 내내까지 왔군."
그는 미소 지으며 내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내는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군검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내는... 졸려! 내내를 안아줘!"
"저런! 남궁형님이 내내에게 큰 죄를 지으셨군. 내내의 잠을 깨우다니...!"
군검풍은 내내를 번쩍 안아들었다.
이어,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 오빠가 재워 주마!"
그는 내내를 안고 침궁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주위에 몰려든 중인들도 그만 맥이 탁 풀어지고 말았다.
"쩝! 잠만 설쳤군!"
만능야제가 입맛을 쩍 다시며 무영살제를 툭 쳤다.
"이봐, 인간백정아! 기분도 그런데 술이나 한잔 하자!"
"녠! 좋습니다, 잠노야!"
"허허! 술이라면 나 표풍비천영이 빠질 수 없지!"
이어, 구류종사들은 서로 뜻이 통한 듯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디론가 몰려 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십천제왕맹은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어느덧, 동녘이 불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낙양(洛陽).
주(周)대 이래 제국(帝國)의 도읍이 되어온 고도였다.
문물이 번화하고 교통이 발달된 낙양의 거리는 언제라도 복잡한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봄, 낙양에 봄이 찾아왔다.
낙수(洛水)가에는 흐트러진 양류(楊柳)의 신록이 곱고 야산에는 기회이초가 만발하다.
태양은 불끈 떠올라 대지를 비추고, 거리에는 선남선녀의 물결이 쏟아지고 있었다.

봄은 청춘의 계절이었다.


낙수(落水)에 황혼이 지고 있었다.
물결은 금빛으로 넘실거리고 양류 사이로 찬연한 놀이 물들고 있었다.
띵... 띠딩...!
문득, 한 줄기 해맑은 금음(琴音)이 선계의 신음인 듯 흘러 나왔다.
낙수의 상류.
촤...아!
한 척의 화선(火船)이 유유히 흘러내려 왔다.

봉황(鳳凰)이 수놓인 화려한 화선이었다.
선상에는 한 명의 흑삼을 걸친 장발청년이 고금(古琴)을 안은 채 탄금하고 있었다.
그는 영준한 용모에 매력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또한 일신에서 흘러나오는 고아한 기품은 선인(仙人)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바로 제왕맹을 떠나 온 군검풍이었다.
"...!"
군검풍의 뒤에는 한 명의 훤칠한 체구의 미청년이 단좌하고 있었다.
그는 키가 구 척으로 당당하기 이를데 없는 체격이었다.

하지만, 용모는 오히려 군검풍이 무색할 정도로 영준하고 단아해 보였다.
그 청년은 다름 아닌 남장을 한 철담온후 철라영이었다.
스슥...!
이때, 노을에 물든 대기를 쩍 가르며 한 줄기 흐릿한 인영이 선상으로 날아들었다.
"지존, 돌아왔습니다.!"
그 인영은 공손한 음성으로 말하며 군검풍의 뒤에 부복했다.

그 인물은 일신에는 헐렁한 갈포를 걸쳤으며

삼단 같은 머리를 갈건으로 질끈 묶어 넘긴 낭인(浪人) 차림의 미소부(美少婦)였다.
천애유흔(天涯幽痕) 부운선,
그녀는 바로 제왕맹 구류종사중 천애낭인사의 사주인 천애유흔이었다.
군검풍은 그제서야 고금을 내려놓고 돌아앉았다.
"그래, 어떤 단서를 찾았는가?"
"죄송해요. 맹의 모든 정보망을 총동원했으나...

북망귀왕부의 위치는 고사하고 북망귀왕부라는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했어요."
군검풍의 물음에 부운선은 민망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으음! 사주(社主)가 미안해 할 것은 없네."
부운선은 천하를 떠돌아 다니다 대지에 스러지는 낭인집단의 총수였다.
그런 그녀의 낭인의 기질은 군검풍의 기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
군검풍의 시선을 받은 부운선은 옥용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무... 무슨 수를 쓰든... 내일 저녁까지는 북망귀왕부의위치를 알아내겠어요."
군검풍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서두르지 않아도 좋네.

남궁형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다지 서둘지 않아도 될 일인 듯하니...!"
부운선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어요. 그리고, 몇가지 흥미있는 얘기를 들었어요."
"흥미있는 얘기?"
군검풍은 의아한 표정으로 부운선을 바라보았다.
부운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예! 근자 일 년 사이 낙양부중에서 상당수의 여인들이 의문의 실종을 당한다고 해요."
"여인들이 실종된다고?"
군검풍의 두 눈에 번뜩 이채가 스쳤다.
부운선은 다시 설명을 계속했다.
"예! 일년 동안 모두 일백여 명의 여인들이 실종되었다고 해요.

한 가지 공통점은 그 여인들이 모두 십칠 세 미만의 소녀들이라는 점이에요."
"음음...!"
군검풍은 고개를 갸웃하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했다.
부운선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될 여아가 한 명 있는데...

바로 낙양왕부(落陽王府) 낙일황야(落日皇爺)의 천금

낙봉군주(落鳳君主) 주금예(朱金霓)가 그녀예요."
"낙일황야의 천금까지 실종되었단 말인가?"
군검풍은 뜻밖이라는 듯 흠칫하며 되물었다.


-- 낙일황야 주뢰운(朱雷雲).


그는 황실제일의 연장자로, 당금 황상인 선덕제(先德帝)의 숙부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세속의 영리를 초월하여 일찌감치 황경을 떠나 낙양에 은거했다.
그러나, 낙일황야는 홍무제(洪武帝) 직전의 황실무예를 익힌 황실최강의 고수였으며

또한 극히 엄격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따라서, 황제조차 경외하는 명황실의 숨은 실력자였다.
그런데, 그 낙일황야에게는 고희에 가까워 얻은 딸이 하나 있었다.

그 딸이 바로 낙봉군주 주금예(朱金霓)였다.
가히 낙일황야가 장중보주로 여길만큼 사랑하는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당금 십 칠 세였다.

하지만, 하늘이 그녀의 미모를 시기한것인지 주금예는 태어날 때부터 난치의 체질을 지니고 있었다.
천음혜극신체(天陰慧極神體).
이는 천지지간에서 가장 음기(陰氣)가 강한 체질을 말한다.
본래, 주금예는 십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낙일황야를 아버지로 둔 덕분으로

만종의 절세영약들을 장복하여 지금까지 연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가련한 운명을 타고 태어난 소녀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일 년 전 갑자기 위문의 실종을 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낙일황야 부부는 이로 인해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부운선의 이야기를 듣고 난 군검풍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예삿일이 아니군.

천음혜극신체의 낙봉군주는 피납되고, 순음지기가 가장 강할 나이의

십 칠 세 전후의 잇달아 소녀들이 실종되다니...!"
그는 유현한 눈빛을 북쪽으로 던졌다.
북망산이라 불리는 망산(邙山)의 음울한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부운선은 눈을 내리깐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근래 일 년 내 근 삼백여 명의 미청년들이 변사로 발견되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요."
"변사?"
"예! 낙양부중의 수려하게 생긴 미청년들이 거의 매일밤 한 명씩 실종되는데,

일단 실종된 뒤 며칠 후 낙수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곤 한다는 거예요."
"사인(死因)은?"
부운선은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옥용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어, 그녀는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좀...!"
"양기(陽氣)와 정수(精髓)가 고갈되어 피골만 남은 모습으로 죽어 있었겠지?"
군검풍이 부운선의 곤란함을 덜어주려는 듯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부운선은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그래요. 어떤 못 된 계집이 미청년들을 납치하여

채양보음의 사술의 재물로 쓰는 모양이에요."
"계집이라..."
문득 군검풍은 섬뜩하도록 무서운 시선을 낙수의 동안(東岸)으로 던졌다.
"...!"
"...!"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부운선의 봉목이 번쩍 빛을 발했다.
낙수변에 늘어선 휘휘 늘어진 양류(楊柳)의 숲,
한 명의 여인이 양류 그늘 아래 서서 군검풍을 바라보며 요염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이십 전후로 보였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지극히 요염한 기운을 흘리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중년여인에 못지않은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지녔는데,

지나치게 요염한 것을 빼면 경국지색이란 미명을 들을만 했다.
군검풍은 그 여인을 바라보며 두 눈에 기광을 발산했다.
"후후훗! 여인답지 않게 화양강흔(火陽剛痕)이 느껴지는 계집이군."
이어, 그는 싱긋 웃으며 여인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보였다.
"...!"
여인은 자극적인 추파를 보내며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미끄러지듯 양류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부운선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추격할까요?"
하지만 군검풍은 신비한 미소를 베어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말꼬리를 늘이던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부운선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나의 주위에 배치한 여제군단의 전사들을 철수시키도록 하게."
"분부거행하겠어요."
대답을 마침과 함께, 부운선은 군검풍을 향해 공손히 절하고 이내 사라졌다.
"아름다운 황혼이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군검풍은 의미있게 싱긋 웃었다.
이어, 그는 다시 고금을 안고 탄주하기 시작했다.
띵... 띠딩...!
그의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해맑은 금음이 낙수의 물결을 타고 멀리멀리 울려퍼졌다.


그런데, 그가 고금으로 한 곡을 연주하고 났을 때 였다.
짝! 짝!
문득, 가볍게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군검풍은 흠칫하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그의 눈에 양류 사이에 자리한 한 채의 정자(亭子)가 보였다.
그 정자 안에서 한 명의 운학(雲鶴)을 닮은 노인이 표표히 선 채

군검풍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수염과 머리가 모두 눈같이 흰데 얼굴만은 붉으레한 동안이었다.

야학인 듯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위엄을 갖춘 노인이었다.
노인의 뒤쪽에는 두 명의 시녀에게 부축받은 한 명의 미부가 그림같이 서 있었다.
'저 분은...!'
군검풍은 한눈에 백발노인을 알아보고 흠칫하는 기색을 지었다.
"허허! 선음(仙音)에 취해 소공의 흥취를 깨뜨렸네. 미안하이."
이때 백발노인이 군검풍을 향해 포권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군검풍도 즉시 일어서 마주 포권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지음(知音)의 지기를 만남은 평생행운이 아닙니까?"
"번거롭지 않다면 이 늙은이에게 좋은 차(茶)가 있네만 한 잔 하는 것이 어떤가?"
백발노인의 그 말에 군검풍은 사양치 않고 미소로 대답했다.
"하하... 갑사합니다. 폐를 끼치겠습니다."
이어, 그는 즉시 노를 저어 정자로 다가갔다.
슥!
이윽고, 정자 안으로 내려선 군검풍은 다시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생은 군검풍이라 합니다."
"헛허...좋은 이름이군. 노부는 주뢰운(朱雷雲)이라 하네."
백발노인도 자신을 소개하며 마주 포권했다.
군검풍은 흠칫하며 노부부를 주시했다.
그가 바로 낙일황야 주뢰운이라니 놀라운 사실이었다.

대명황실의 숨은 실력자.
실로 우연찮게 군검풍은 주뢰운과 만난 것이다.
하지만 별로 놀라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주뢰운은 이윽고 자신의 부인을 소개했다.
아름다운 얼굴에 우아한 기품이 흐르는 미부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딸을 잃은 상심으로 안색이 초췌하고 극히 우울해 보였다.
시종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그러나 군검풍을 대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밝아져 온화하고 기품있는 미소로 답례했다.
"허허... 금예, 그 아이가 실종되지 않았으면 노부도 자네 같은 사위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주뢰운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
그 말에 노부인은 다시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군검풍은 그런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군주께서는 단명하실 분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상봉하게 될 것입니다."
"헛허!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군검풍은 문득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쩌면 소생이 며칠 내 군주를 두 분께 모셔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주뢰운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는 새삼스럽게 군검풍을 자세히 주시했다.
이어, 그는 홀연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자네 말을 들으니 웬지 자네 말대로 모든 것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군."
그것은 사실이었다.

군검풍은 비록 오늘 처음 만났으나 그의 말은 주뢰운으로 하여금 신뢰와 확신을 주었다.
그런 신뢰감은 주뢰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기이한 확신과 믿음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는 좌수에서 하나의 지환(指環)을 빼내어 군검풍에게 건네주었다.
"낙일옥새(落日玉璽)라는 것이네.

노부가 죽으면 전할 수 없는 물건이니 사양말고 받게."
"...!"
군검풍은 흠칫했다.
낙일옥새, 그것은 도장이 새겨진 반지였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반지가 아니었다.

그 평범해 보이는 도장에 어떤 막강한 힘이 담겨있는지 군검풍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무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낙일옥새는 홍무제(洪武帝)가 야심이 큰 사자(四子) 연왕(燕王:후일 영락제)에게

경계의 뜻으로 주었다는 신물이었다.
그것은 황실비밀시위인 낙일천군단(落日天軍團)을 움직일 수 있는 단 한가지 신물이기도 했다.
또한, 그 중에는 황실최강무학인 낙일호황결(落日護皇決)이 감추어져 있었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군검풍은 주뢰운의 노안에 깃든 간절한 빛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침음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 분은 내가 구문제독부의 사자(祠子)임을 이미 알고 계시다.

그러기에 서슴치 않고 낙일옥새를 맡기시는 것이다.'
생각을 마친 순간, 군검풍은 주저없이 일어나 주뢰운에게 삼배했다.
"미생 군검풍! 삼가 낙일옥새를 인수하여 낙일제군(落一帝君)의 의무와 권리를 접수합니다."
"...!"
주뢰운은 무릎을 꿇고 군검풍에게 낙일옥새를 끼워주었다.
"낙일옥새의 막중함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줄 아네."
"물론입니다."
군검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한 순간, 노룡(老龍)의 눈과 젊은 맹룡의 눈이 허공에서 어우러졌다.

그들의 눈빛이 뜨거운 감정의 흐름으로 얽혀들었다.
스으... 스으...!
황금빛 놀은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찬란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새롭게 맺어진 그들의 인연을 축하해 주듯이.


사위는 죽은 듯 조용했다.

주위는 적막했고 흐릿하게 깜박이며 졸고있던 별빛마저

구름속으로 숨어버린 하늘은 검은 흑색 천을 펼쳐놓은 듯 어둡기만 하다.
'왔군!'
침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군검풍은 미세한 옷자락 스치는 소리에 잠이깼다.

그의 입가에는 한줄기 묘한 미소가 어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침실문 앞에 한 줄기 온밀한 그림자가 유령같이 다가섰다.
그 인영은 마치 스치는 미풍인 듯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전혀 기척을 내지 않았다.

절정고수자라 할지라도 그의 은밀한 접근을 눈치챌 수는 없을 듯 했다.

하지만 결코 군검풍의 이목까지는 속이지 못했다.
이윽고, 창문이 살짝 뚫어지고 은으로 만든 대롱 하나가 방 안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슈우...!
문득 은대롱 끝에서 분홍빛 안개가 환상처럼 흩어져 나왔다.
"으음...!"
군검풍은 짐짓 그 안개를 맡고 취한 척 힘없이 침상에서 너부러졌다.
그러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창문이 스르르 열리며

하나의 인영이 암코양이같이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분홍빛 복면을 한 왜소한 체구의 인영이었다.

섬세한 몸매로 보아 아마도 여인인 듯 했다.
'호호...오늘은 횡재를 했군. 이런 보물을 얻다니...!'
몽면여인은 만족스럽게 중얼거리며 군검풍의 준미한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 순간 후끈한 체향이 군검풍의 코끝을 스쳐 아찔하게 만들었다.

군검풍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독히도 색기(色氣)가 강한 계집이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염두를 굴렸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몽면여인은 몹시 만족스러운 듯 나직한 교소까지 터뜨렸다.
"호호... 낭군님! 잠깐만 참아요.

소녀 사황귀비(邪皇貴妃) 자옥경(紫玉瓊)이 극락의 맛을 보여드릴 테니...!"
그녀는 달뜬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축 늘어진 군검풍의 몸을 안아들었다.
그 바람에 탄력 있는 젖무덤이 군검풍의 얼굴을 눌러 그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호호 사황사염(邪皇四艶)! 부(府)로 돌아가자!"
스윽!
몽면여인은 문득 주위를 돌아보며 나직한 교성을 발했다.

이어 그녀는 군검풍을 안은 채 유령같이 떠올랐다.
슥... 스윽...!
그러자, 객실 주위에 은신해 있던 네 줄기 인영이 유령같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들은 사황귀비라는 여인을 호위하며 함께 허공으로 떠올라 북쪽으로 사라졌다.


헌데 군검풍이 사황귀비라는 여인에게 유괴(?)된 직후였다.
스슥!
군검풍의 침실에 크고 작은 두 줄기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녀들은 바로 철담온후와 천애유혼 부운선이었다.
천애휴혼은 신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지존께서는 예측대로 우연찮게 북망귀왕부를 찾게 되겠는 걸."
"빨리 가요, 언니!"
철담온후는 조급한 표정을 지으며 재촉했다.
"훗! 그 계집이 지존과 잠자리를 함께 할까봐 안달이 났구나, 철매!"
"언니도 참... 그 사내정기를 빨아먹는 계집에게 지존이 빠져드시기라도하는 날에는...!"
철담온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천애유혼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호호... 지존을 어찌보고 하는 말이야?

아마도 그 계집이 오히려 지존에게 정기를 빼앗기게 될걸.

기왕이면... 천천히 가자! 지존께서 천모와 헤어진 지도 열흘이 넘었으니, 그 계집을 대신...!"
"태평도 하시군요."
스윽!
마침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철담온후는 급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천애유혼은 그제서야 교소를 터뜨리며 재미있다는 듯 철담온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호호... 같이 가자!"
이어, 그녀도 표표히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
언제부턴가 한 쌍이 봉목이 허공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그눈의 주인은 특이하게도 눈동자가 네 개로 보이는 마의여인이었다.
"바람둥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군.

계집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다니...!"
마의여인은 못마땅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어쨌든... 또 위험한 장난을 시작하시는군.

북망귀왕부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천패마종의 꼬임에 빠져 잠입하려 하다니...!"
그녀는 자못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마의여인은 허공에서 수평으로 몸을 움직여 천천히 북쪽으로 이동했다.
"어쨌든... 방관할 수 없다.

나 십전마혜(十全魔慧) 을유향의 남편될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

대책 없는 바람둥이라는 점이 화가 나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녀의 중얼거림이 허공에 떠돈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흩어지고 없었다.
십전마혜 을유향!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