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제왕맹주(帝王盟主)의 귀환(歸還)
"흐윽!"
자신의 부끄럽고도 예민한 곳을
사내의 음탕한 손길이 헤집고 벌리는 것을 느끼며 나후란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끝이다. 자결하여 여제천모의 명예를 지키는 길만이 남았을뿐!'
그녀는 깨끗하게 자결할 것을 결심하고 막 혀를 깨물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그녀의 봉목이 크게 떠지며 순간적으로 놀라움의 빛이 스쳤다.
스스스...!
천정으로부터 한 명의 인물이 마치 거미처럼 스며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윤기 도는 긴 머리카락을 질끈 뒤로 묶어 넘긴 청년.
그의 두 눈은 마치 폭풍의 핵을 보는 듯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군검풍이었다.
그 순간 옥면신룡제도 기이한 예감을 느끼고 손을 멈추었다.
그는 서늘한 한기를 느끼고 흠칫했다.
'누군가 있다.'
그렇게 느낀 순간, 그의 행동은 눈부시고 민첩하게 행해졌다.
파...앗!
그는 벼락같이 나후란의 나신에서 퉁겨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서는 그의 귓전으로 한 소리 냉엄한 일갈이 파고들었다.
"여제천모의 순결을 위해 너는 그만 죽어 주어야겠다!"
츠츠츠...!
돌연, 팔극(八極)이 온통 검푸른 용(龍)의 비늘로 뒤덮였다.
환룡섬린! 바로 무영환자의 환상살법이 펼쳐진 것이었다.
옥면신룡제는 위기를 직감했다.
"아... 안 돼!"
파파팍!
그는 전공력을 끌어올려 호신강벽으로 내치며 빠르게 뒤로 폭사되어 나갔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날카롭게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용의 비늘은 허무하게 옥면신룡제의 호신강벽을 꿰뚫어 버렸다.
"케...엑!"
쿠웅!
옥면신룡제는 천돌혈에 용린 모양의 혈흔을 새긴 채 그대로 바닥에 거꾸러졌다.
"아...!"
그것을 확인한 나후란은 경악과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며 힘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스스...!
이때, 나후란의 앞으로 군검풍이 그림자처럼 내려섰다.
나후란은 옥용을 붉히며 급히 손으로 하체의 비소를 가렸다.
"고... 고마워요, 은공...!"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겨우 이렇게 말했다.
군검풍은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마워할 필요없소.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을 뿐이오!"
이어 그는 자신의 장포를 벗어 나후란의 나신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말없이 시선을 돌려 죽옥의 밖을 살폈다.
툭!
문득 군검풍의 장포에서 하나의 옥패가 떨어졌다.
그것은 다름아닌 제왕부(帝王符)였다.
그것을 본 나후란은 깜짝 놀라며 봉목을 크게 떴다.
"아... 제왕부...!"
그녀는 놀라움과 희열을 금치못하며 탄성을 발했다.
군검풍은 싱긋 웃었다.
"이제야 알겠소? 여제천모인 그대를 지키는 것은 나의 임무이고 권리요!"
"아... 지... 지존!"
나후란은 탐스러운 나신이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없이 군검풍의 앞에 털썩 부복했다.
그제서야 참고 참았던 오열이 터졌다.
그것은 격동과 희열, 그리고 오랜 기다림에 대한 서러움의 표출이었다.
'이제는... 되었다. 나를 지켜주실 분이 오셨으니...!'
그녀는 따뜻한 안도감에 전신이 솜처럼 나른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쓰러져 잠이 들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나후란은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죽옥 밖으로 어둠이 첩첩으로 싸여가고 있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띵... 띠딩...!
맑고 아름다운 금음(琴音)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희고 고운 옥수(玉手)가 현을 스칠 때마다 천상옥음이 꿈결처럼 흘러 퍼졌다.
"...!"
한 명의 백의궁장 여인이 그림같은 자세로 앉은 채 탄금하고 있었다.
백의 위로 달빛이 부서져 내리자
마치 배꽃인 듯 아름답고 흐드러진 자태를 드러내는 미인이었다.
"십사형(十師兄)! 무슨 일이죠?"
섬섬옥수를 유연하게 놀리던 백의미녀는
문득 탄금을 멈추고 옥구슬이 흐르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각 밖에 달빛을 이고 한 명의 묵인(墨人)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묵황패룡이었다.
천웅패천좌 서열 십위에 드는 초강자인,
"심상치 않은 일이 있어 백매(百妹)의 지시를 받으러 왔네."
묵황패룡은 묵직한 걸음으로 누각을 올라오며 말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니요?"
백매(百妹)라 불린 백의여인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반짝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묵황패룡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마의혈황과 함께 철담온후를 요격하러 갔던 마패삼십육절 중 삼십오 인이 귀환하지 않았네."
"그들이... 누군가에게 변을 당했단 말인가요?"
묵활패룡은 반짝이는 봉목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백의여인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철담온후를 생포하여 돌아온 마의혈황도 의심가는 곳이 있네."
"그런가요?"
백의여인은 생긋 미소지었다.
그 순간, 묵룡패룡은 움찔하며 내심 신음성을 발했다.
'웃!'
백의여인의 미소가 그의 철담이 울렁거릴 정도로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관음환희소(觀音歡喜笑)를 익힌 계집이군!'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관음환희소(觀音歡喜笑).
서천축 일대를 장악한 요문(妖門) 환희밀교(歡喜密敎)의 비전 미공(迷功).
미소 하나로 생명을 제압할 뿐 아니라, 의지대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가공할 마공이었다.
그런데 백의여인이 지금 그 관음대환희소를 펼친 것이었다.
백의여인은 생긋 웃으며 묵황패룡을 주시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나? 내가 누구냐고?"
묵황패룡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래요. 귀하는 묵황패룡이 아니에요."
백의여인은 말과 동시에 옥수로 고금의 현을 가볍게 퉁겨냈다.
따당!
그러자, 한 줄기 예리한 금음(琴音)이 튀어나오며 묵황패룡을 휩쓸었다.
"웃!"
묵황패룡은 신형을 휘청했다.
백의여인의 금음은 실로 무서웠다.
그것에는 만근거쇠를 깨치는 마력이 담겨 있었던 있었다.
설사 금강지체인 고수자라도 내부를 산산이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가공할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하지만 묵황패룡은 한차례 상체를 휘청했을 뿐 이내 바로 섰다.
"호... 대단한 분이군요!"
백의여인의 눈가로 빠르게 놀라움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훗! 과연 무섭군, 백의관음(白衣觀音)."
묵황패룡이 갑자기 눈썹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것은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몸짓이며 어투였다.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에 백의여인은 흠칫하는 기색이었으나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그녀도 짐작가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묵룡패룡의 피부를 감싸고 있던 묵기(墨氣)가 스러지며
아주 영준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군검풍, 바로 그였다.
"...!"
군검풍의 진면모를 확인한 백의여인, 백의관음의 시선이 한차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평정을 회복하며 말했다.
"귀공은 대단한 분이군요."
"그대야 말로 놀랍소.
패왕궁에서 왜 백의관음을 가장 무서운 인물이라고하는 줄 이제야 알겠소."
군검풍은 감탄의 눈빛으로 백의관음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그의 미소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 백의관음 복영령(茯孀玲).
이것이 백의여인의 이름이다.
그녀는 천웅패천좌(天雄覇天座) 서열 일백위에 든다.
즉, 천응패천좌의 막내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천패마종 남궁무외만큼 무섭다고 알려진 절세기녀였다.
그녀는 여제갈이란 별호를 지닐만큼 뛰어난 여모사(女謀士)이기도 했다.
또한, 천패마종 남궁무외의 유일한 제자인 그녀는
십지마련 막하 십대마맥중 천패마맥(天覇魔脈)의
패도마공과 환희밀교의 환희밀경(歡喜密經)을 익힌 초고수였다.
따라서, 외공이 남궁무외에게 뒤지는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오히려 남궁무외보다 무섭다고 알려져 있었다.
군검풍은 두 눈에 신비한 이채를 발하며 백의관음 복영령을 주시했다.
"그런데, 본인이 묵황패룡이 아닌 것을 어떻게 알았소?"
그는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훌륭한 역용술이었지만 당신은 두 가지 실수를 했어요."
"들어봅시다."
군검풍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며 미소지었다.
언뜻 보기에 그들 두 사람은 다정한 여인들이 정담을 나누는 듯 보였다.
백의관음은 다시 생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첫째, 묵황패룡은 감히 본녀에게 백매(百妹)라 부르지 않아요.
소궁주(小宮主)라 불러야 했어요."
"아, 실수했군. 두 번째는?"
"호홋... 기도예요."
"기도!"
"당신의 기도는 너무 강렬했어요. 그것은 제왕의 기도였죠.
묵황패룡이 비록 강하기는 하지만 그런 당신 기도의 일할에도 못미친다는 것을 알고있어요.
물론 다른 사람이면 못 알아 볼 수도 있었겠죠."
"핫하! 첫 번째 대결에서는 무참하게 패배했군."
군검풍은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금은 패배를 시인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소맹주를 제압해야 내일 제왕집회(帝王集會)의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날 테니 말이오."
그 말에 백의관음의 옥용에 한 줄기 경이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은...제왕지존(帝王之尊)이군요."
"핫하! 역시 여제갈이시오."
군검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백의관음은 문득 봉목에 야릇한 이채를 띄우며 물었다.
"과찬이예요. 그런데... 당신은 소녀를 제압할 자신이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군검풍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십초 안에 제압하지 못하면 물러가겠소.
제왕맹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말이오."
그는 이렇게 장담했다.
"호호... 지나친 자신감이로군요."
백의관음은 유난히 큰 소리로 교소를 터뜨렸다.
"후훗! 수하들을 부르실 생각은 하지 마시오.
십대패왕이 물려들면 본인이라 해도 감당치 못할테니 말이오!"
군검풍은 말과 함께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제서야 백의관음은 미소를 거두고 안색을 심각하게 굳혔다.
'단음기공(斷音氣功)...!
주위 백 장이 이자의 단음기공으로 차단되어 있다.
설령 우뢰성이 일어난다 해도 외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고 긴장했다.
하지만, 긴장과 동시에 그녀는 초강적을 맞았다는 사실에 야릇한 흥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과연... 십초 내에 소녀를 제압할 수 있는지 보겠어요!"
그녀는 말과 함께 섬섬옥수를 들어 칠현고금의 첫째 현 궁현(宮鉉)에 올려놓았다.
따...당!
피잉!
그녀의 옥수는 일순 요란하게 궁현을 끊어내며 가공할 우뢰성을 작렬시켰다
콰르릉...쾅!
그 가공할 음파에 누각의 지붕이 단번에 박살나 날아갔다.
실로 대단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훌륭한... 척천파멸음공(擲天破滅音功)이오!"
군검풍은 안색이 핼쓱하게 질리며 신형을 휘청했다.
하지만 그는 감탄의 말을 잊지 않았다.
-- 척천파멸음(擲天破滅音).
이는 마도의 전설적인 파천마음이었다.
모두 칠음(七音)으로 이루어졌으며 한 음절의 진행시 위력이 점점 배가 된다.
천음부 제형천음경상의 음공을 빼면 단연 천하무적으로 꼽을 수 있었다.
백의관음은 생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대단한 안목이군요. 제 이음 군상군천음(郡像君天音)은 어떨지요?"
따당...!
그녀의 옥수에 의해 다시 상현(像鉉)이 요란한 음향을 내며 끊어졌다.
콰콰쾅...!
뒤이어 천 개의 뇌정 같은 음파가 군검풍의 전신에 작렬했다.
군검풍은 그 막강한 여파에 한 순간 신형을 휘청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몸을 바로 세우며 백의관음과 마주 앉았다.
"핫하, 훌륭하오. 어디 더 감상해 봅시다!"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백의관음을 주시했다.
웃고 있었지만 그의 입가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사지체가 아니었다면 그의 내부는 이미 가공할 음파에 박살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군상군천음은 무서웠던 것이다.
"호호... 좋아요! 지음(知音)의 벗을 만남은 평생 행운이죠."
백의관음 역시 안색이 하얗게 변한 채 교소를 지었다.
땅... 따당...!
이어 다시 그녀의 옥수 아래 고금의 현이 차례차례 끊어졌다.
그때마다 음파의 위력은 무섭도록 배가 되었다.
그 가공할 위력은 군검풍의 전신을 위태롭게 강타했다.
그리고 한 순간, 백의관음의 핼쓱한 옥용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이번에도 견디신다면 소녀의 모든 것을 드리겠어요."
그녀는 밀납같이 창백한 안색으로 마지막 칠현(七絃) 무현(武鉉)에 떨리는 우수를 가져갔다.
군검풍은 안색을 굳히며 긴장했다.
'그냥은 받지 못한다.'
그는 폭풍제왕검을 들어 우수 식지로 가져갔다.
"조...심해요...!"
백의관음의 입에서 미약한 경각성이 터졌다.
따...당!
그와 함께, 날카롭게 무현이 끊어지며 형언불가의 거대음파가 군검풍을 휩쓸었다.
군검풍도 눈썹을 꿈틀하며 침중하게 외쳤다.
"추태를 부림을 용서하시오. 탄(彈)!"
그의 입에서 짤막한 외침이 터짐과 함께
그가 우수 식지로 폭풍제왕검의 끝을 벼락같이 퉁겨냈다.
--탄음파천황(彈音破天荒)!
드디어 고금제일탄음(古今第一彈音)이 펼쳐진 것이었다.
웅...!
너무도 거대하여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음파의 강벽이 일어났다.
꽈르릉...! 쾅!
뒤이어, 가공할 폭음과 함께 백의관음의 칠현금이 박살나 가루로 부서졌다.
"악!"
쿵...!
백의관음은 뾰족한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하며 넘어졌다.
"음...!"
군검풍도 결코 무사치 못했다.
그는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쓰러질 듯 신형을 휘청거렸다.
"훌륭해요, 지존!"
백의관음은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띄웠다.
"소녀는 음공(音功)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뒤 결심한 것이 있답니다.
만일 음률로 저를 꺽는 분이있다면 평생 그분께 봉사하겠다고...!"
"무...무어라고요?"
군검풍은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소녀의 몸과 마음은 모두 지존의...!"
백의관음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며 혼절하고 말았다.
"음... 힘든 싸움이었다."
군검풍은 입가의 선혈을 손으로 쓱 닦아냈다.
바로 그때,
"괜찮으세요, 지존?"
스슥...!
문득 허공에서 한 명의 여인이 훌훌 날아내렸다.
나후란이었다.
군검풍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나후란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괜찮소, 힘들기는 했으나 최강의 적도 쓰러뜨렸으니...
내일 제왕집회는 제대로 치룰 수 있을 것이오."
그 말과 함께 그는 스르르 뒤로 넘어졌다.
"지존!"
나후란은 비명을 울리며 급히 다가가 군검풍을 부축했다.
그녀는 군검풍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보듬어 안았다.
뭉클...!
농염한 여체(女體)의 향기가 군검풍의 코끝에 물씬 감겨들었다.
군검풍은 그 향기를 음미하며 싱긋 웃었다.
"하하! 천모는 좋은 아내가 되겠소. 품이 이토록 포근하니...!"
"지존...!"
나후란은 그의 말에 사르르 옥용을 붉혔다.
여제천모,
그 지위는 제왕지존의 대리자인 동시에 제왕지존이 남자일 경우 그 아내가 되는 지위였다.
따라서, 군검풍으로부터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칭찬을 들은 나후란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군검풍은 졸음이 쏟아지는 듯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피곤하구료, 쉬어야겠소."
"쉬세요, 얼마든지...!"
나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군검풍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월색(月色)이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
-- 제왕대전(帝王大殿).
여제천궁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전각이다.
이 제왕대전은 지금 일천 명의 여전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숨죽이게 만드는 긴장감이 뒤덮인 가운데
대전 안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좌정하고 있었다.
상좌의 여제천모 자리에는 우아한 자태의 나후란이 앉아있고
그녀의 앞쪽에는 열 개의 의자가 놓인 거대한 원탁이 놓여 있었다.
그 원탁은 본래 구류종사들의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구류종사 대신에 아주 굴강한 인상의 십 인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패왕궁의 십대패왕(十大覇王)들이었다.
천패마종 남궁무외가 자랑하는 패왕궁 최강의 고수들인 그들은
개개인이 십패천의 종사들만큼 강한 인물들이었다.
문득, 숨막히는 적막을 께고 십인중 한 명의 독비(獨臂)노이
웅웅 울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궁주(小宮主)! 왜 소궁주의 휘하 관음일천위(觀音一千衛)를 제한
우리 십대패왕의 패왕군단(覇王軍團) 일만을 성 외곽으로 배치하는 것이오?"
-- 독비천황(獨臂天皇).
그 인물은 십대패왕의 수좌인 독비천황이었다.
이미 백 년 이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대거마인 그는 천패마맥의 태상호법이기도 했다.
헌데 소궁주라니...?
독비천황은 여제천모의 자리에 앉아있는 나후란을 백의관음 복영령으로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십천제왕성에 잠입한 패왕궁의 고수들을 총 지휘하는 백의관음 복영령은
자신이 나후란으로 화신하여 곧 도착할 구류종사들을 상대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십대패왕들로서는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들의 영도자인 백의관음 복영령이 간밤에 군검풍에게 패하여 잡혀버렸다는 사실을...!
지금 여제천모의 자리에 앉아있는 여인은 진짜 여제천모인 나후란인 것이다.
여제천모 나후란은 독비천황의 불만스러운 질문에 담담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이곳의 제왕대전은... 열 분과 일천관음위대로 충분해요.
걱정되는 것은 구류종사들을 수행해온 구류의 강자들이예요.
패왕군단을 성 밖으로 이동시킨 것은 그들을 제어하기 위함이에요."
"...!"
"...!"
십대패왕은 나후란의 차분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한 가닥 불만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 때였다.
"무적천병단(無敵天兵團) 무적천공(無敵天公) 굴천무(窟天武) 단주께서 오셨습니다."
문득 대전 밖에서 날카로운 여전사의 교갈이 들려왔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십대패왕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스스스...!
"그럼 우린 소궁주만 믿겠소!"
그들은 이 한 마디를 던지며 일제히 안개처럼 제왕대전의 십방으로 몸을 숨겼다.
직후,
뚜벅 뚜벅...!
이윽고, 대전의 정문으로부터 한 명의 거한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는 일 장의 거구를 지닌 매서운 독수리 눈의 소유자였다.
기이하게도 그는 일신에 무려 십팔종의 신병을 지니고 있었다.
-- 무적천공(無敵天公) 굴천무(窟天武).
바로 그였다.
제왕맹 최고의 전사(戰士)로 꼽히는 인물.
그가 다루지 못하는 병기는 세상에 없다.
그는 휘하에 무적의 일만천병신장(一萬天兵神將)을 거느리는 거인이었다.
쿵쿵...!
굴천무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여제천모 나후란 앞으로 다가섰다.
"굴천무가 삼가 천모님께 문후드리오!"
그는 나후란 앞에 이르러 한쪽 무릎을 꿇며 정중한 군례를 취했다.
"급한 일이 있어 다망하신 단주를 불편하게 해드렸어요."
나후란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천모께서 부르시기만 한다면 어디엔들 못가겠습니까?"
굴천무는 묵중한 어조로 말하며 겸양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지정된 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뒤이어 다시 대전 밖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천추녹림맹(千秋綠林盟) 녹림대제(綠林大帝)와
신주표풍호화련(神洲杓風護花聯) 표풍비천영(杓風飛天影) 종사께서 입성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대전 안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들왔다.
-- 녹림대제!
-- 표풍비천영!
각기 휘하에 수십만의 수하를 거느린 방문좌도의 거인들.
그 두삶을을 필두로 하여, 구대종사들이 차례로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무영인자단주(無影刃刺團主) 무영살제(無影煞帝).
팔황철기대주(八荒鐵旗隊主) 철기신극존 나뢰(羅雷).
천애낭인사주(天崖浪人社主) 천애유흔(天崖流痕) 부운선(賻雲宣)
쾌활림주(快活林主) 극락몽후(極樂夢后) 교옥령(嬌玉靈).
그리고, 백의관음이 역용시켜 대기시킨 가짜 만능야제와 철담온후도 모습을 드러냈다.
일방의 패주들인 구류종사, 그들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넓은 제왕대전이 꽉 차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나후란이 좌중을 들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다망한 중에 여러 종사들을 모이라 한 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에요."
"...!"
"...!"
좌중의 시선을 일제히 나후란에게 집중되었다.
나후란은 침착하고 조용한 음성을 말을 이었다.
"첫째는, 일단의 흉사들이 본맹의 전복음모를 꾸미고 있기에 이를 분쇄시키기 위함이에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좌중은 크게 동요했다.
"무... 무엇이!"
"어떤 자들이... 감히...!"
구류종사들은 모두 크게 놀라며 분노의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이때, 대전의 구석에 숨어있던 십대패왕은 내심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 소궁주가 지금 무슨 말을 ...?'
'저 어린 계집이 미...미쳤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후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제왕지존께서 현세하셨기에
그 분의 등극식 거행을 위해 원로의 아홉 분 종사를 호출한 것이예요."
"아!"
"제... 제왕지존이 현세하셨다니...!"
구류종사들은 안색이 홱 변하며 일제히 격동의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그 때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십대패왕이 분노의 이를 갈며 몸을 드러냈다.
"바득... 네년은 소궁주가 아니었구나."
"우... 감히 패왕궁을 우롱하다니...!"
"캇! 소궁주를 어찌했느냐?"
콰르릉...!
쇄...액!
그제서야 모든 상황을 짐작한 십대패왕은
가공할 패기를 폭사하며 십방에서 일제히 나후란을 휩쓸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공세는 이내 차단되었다.
"감히...!"
"미친 놈들이군! 감히 제왕맹을 어찌 보고!"
우르릉...쿠...쿵!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여제천모 나후란이 위험에 처하자
구류종사들은 일제히 공세를 발동하여 십대패왕과 맞섰기 때문이었다.
콰...쾅! 콰르르...!
굉렬한 푹음과 함께 제왕대전의 지붕이 무참하게 박살나며 날아갔다.
"우우!"
"바득... 속았다니...!"
십대패왕과 구류종사들은 쓰러질 듯 신형을 휘청하며 물러섰다.
결코 만만치 않은 호각지세를 이룬 것이다.
그들은 한 번의 격돌로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며 분노를 금치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나후란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진정하세요 여러분...!"
그녀는 여전히 기품있는 모습으로 단좌한 채 십대패왕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는 신비하고 유현한 눈길로 십대패왕을 주시했다.
"모든 음모는 분쇄되었어요! 순순히 투항하세요."
그녀의 말에 독비천황은 안면을 참담하게 일그러뜨리며 부들부들 신형을 떨었다.
"으음... 너는 진짜 나후란였구나!"
"소...소궁주가 이미 남에게 당했단 말인가?"
독비천황 등의 그 말에무적천공이 부리부리한 두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폭갈을 내질렀다.
"미친 놈! 이거야 여제천모께서 두 분이나 된다는 말투가 아닌가?"
독비천왕은 전율의 눈으로 나후란을 바라보았다.
"그럼 만능야제와 철담온후도 진짜겠지?"
이어 그는 만능야제와 철담온후를 돌아보았다.
만능야제는 여부가 있겠느냐는 듯 여유있게 웃어보였다.
"클클... 독비늙은이야! 각오하는 게 좋아! 나 만능야제를 건드렸으니...
이후 늙은이에게 연분있는 모든 놈들을 알거지로 만들어줄 테다!"
독비천황은 입술을 질끈 악물었다.
이어 그는 재빨리 염두를 굴렸다.
'누군가 있다! 나후란, 저 계집이 제법이라 하나 이 정도 역전극을 펼칠 능력은 없다.'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독비천황은 자타가 공인하는 거마(巨魔)였다.
정작 그는 나후란이나 구류종사등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무섭게 느낀 것은 나후란의 배후에 어떤 거인(巨人)이 있음을 느낀 것이었다.
이윽고, 독비천황은 거마답게 이내 평정을 회복하고 나후란을 주시했다.
"일만패왕군단을 외부로 산재시킨 것도, 관음일천위도... 모두 사전계획한 일이겠지?"
나후란은 물론이라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아마 칠만패왕군단은 지금쯤 삼대밀부의 밀사들의 매복에 걸려 전멸했을 거예요!"
"그... 그럴 수가...!"
"부득! 누구냐? 너 어린 계집의 머리로 이 같은 병법을 쓰지는 못했으리라!"
십대패왕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며 경악성을 발했다.
그제서야, 구류종사들은 모든 상황을 짐작했다.
그들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천모께서는... 능력 이상의 일을 하셨다!'
'역시... 제왕지존의 현세는 사실이었구나!'
구류종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격동과 희열의 표정을 떠올렸다.
다음 순간 무적천공이 눈알을 부라리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캇! 어서 투항하지 않고 무엇하느냐?"
그는 무서운 예기를 쏟아내는 십팔종의 신병을 앞세운 채 독비천황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독비천황은 눈썹을 꿈틀하며 정면으로 무적천공을 직시했다.
"후훗! 너희 정도로 우리 십대패왕을 어쩔 수 있다고 생가하느냐?"
그 모습에, 문득 나후란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정도는 어때요?"
그녀는 가볍게 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여인의 교갈이 터져나왔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바득! 십대패왕에게 당한 수모를 열 배로 돌려 주마!"
콰...쾅!
와지끈! 쿵...!
돌연, 제왕대전의 사방벽이 박살나며 일천 명의 여전사들이 속속 날아들었다.
그녀들은 다름 아닌 일천여제군단이었다.
십대패황이 백의관음 휘하의 관음일천위인 줄로만 알고 있던 일천명의 여전사들.
그녀들은 바로 금단마옥에 갇혀있던 일천여제군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철담온후 철라영이 그녀들의 금제를 풀어주고
밤새 관음일천위와 바꿔치기 한 것이었다.
사태는 무섭게 격변하고 말았다.
콰...쾅!
우르르...!
천하최강의 여인군단의 여전사들은 성난 암표범같이 십대패황을 휩쓸어왔다.
그 기세는 십대패왕과 구류종사들의 간담이 오그라들 정도로 표독스럽고 신랄했다.
독비천황은 사태가 여의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는것이 무모하다고 판단했다.
"우... 다 틀렸다! 각자 산개하여 탈출하라!"
"우우... 비켜랏!"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역시 같은 생각에 이른 십대패왕은 장소성을 발하며 일제히 십방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을 쉽게 보내 줄 구류종사들이 아니았다.
"캇! 감히 제왕맹을 우롱하고 무사할 줄 알았느나?"
"우하하...! 가긴 어딜 가느냐? 너희들이 갈 곳은 지옥 외에 달리없다.!"
콰쾅... 우르르..!
그들은 벼락같이 신형을 떠올리며 십대패왕과 맞서갔다.
무서운 굉음과 폭음이 진동하며 장내에는 대격돌이 일어났다.
그 엄청난 격돌로 인해 제왕대전은 삽시에 터져나가고 무너져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뿐 아니라 제왕대전의 주위 일천 장도 눈 깜짝 할 순간 초토화되고 만것이다.
붕괴되고 있는 그 제왕대전이 내려다 보이는 여제천궁의 고각 위.
"후훗...!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군."
군검풍은 뒷짐을 지고 선 채 여유있게 미소짓고 있었다.
휘르르...!
서늘한 산풍에 장발을 흩날리며 우뚝 선 군검풍의 모습은 마치 천신인듯 거대해 보였다.
문득, 그는 미간을 모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남궁형님이 대노하시겠군. 내가 형님의 수하들을 모질게 다룬 것을 알면..."
이때, 두 명의 인물이 경외의 시선으로 군검풍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제왕지존이시다.'
'본맹은 비로소 제대로 주인을 찾았다.'
그들은 흐뭇함을 금치 못하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라천효와 혈전인황으로 삼밀부의 지밀부(地密府) 인밀부(人密府)의 수좌들이었다.
천밀부의 수좌 천강패왕(天剛覇王)은 지금 일만패왕군단을 요격 중이었다.
군검풍은 전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피흘림이 없이 제왕맹을 내내에게 줄 수 있어 다행이다."
이어, 문득 그는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지밀존!"
"옛! 지존."
지밀존 지라천효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군검풍은 그에게 지시했다.
"백의관음을 적당히 탈출시키도록 하시오!
엉뚱하게도 내 첩이 되겠다며 버티는 바람에 아주 골치가 아프오."
"분부 받들겠습니다!"
지라천효와 혈전인황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고개숙여 대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군검풍에게 패한 백의관음은 자신의 맹세대로 군검풍의 첩으로
아예 십천제왕성에 눌러 앉을 기세였다.
그 때문에 군검풍은 심각하게 골치를 썩히는 중이었다.
지라천효는 내심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염려말라는 듯 군검풍을 안심시켰다.
"십대패왕 중 몇 명에게 백의관음을 구출케 하여 탈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백의관음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군검풍은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밀존을 믿겠소."
그는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는 천천히 고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은황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내내를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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